18화. 외뿔 (3)
연우는 한순간 마음 한편이 울렁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굴레’를 돌리고 나서 에도라를 다시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그리움.
그리고 죄송스러움.
-헤노바…… 말이우? 음. 이거 뭐라고 해야 하나.
‘굴레’를 감기 전. 판트는 헤노바에 대해서 말하기를 꺼려 했었다. 감추려 한다기보다는 연우가 상처를 입을까 걱정하는 투에 가까웠다. 무신경하기 짝이 없는 판트가 그런 반응을 보일 정도였던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형을 참 많이 그리워하기는 했수. 그, 뭐라고 해야 하나. 분명 형님을 제대로 기억 못 하는 것 같은데, 또 기억하고 있더란 말이지.
-……그게 무슨 소리지?
-에도라만큼이나 형님의 빈자리를 느끼고 있었단 뜻이오. 이따금 탑에서 가져온 모루를 만지기도 하고, 화로에다 신경질적으로 뭘 던져 넣기도 하고…… 뭐, 그랬었지.
그 말에 연우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차정우가 처음 떠났을 때에도. 헤노바는 언제나 그를 그리워했었다. 그리고 연우의 정체를 알고 있었음에도, 그것에 대해 크게 티를 내지 않았다.
자신이 사라졌을 때에도 그러한 모습을 보였을까?
……언뜻 쉽게 상상이 가질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수.
-뭘?
-헤노바가 마지막에 눈 감을 때. 불렀던 이름이 형님의 이름이었소.
-……!
그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정신이 혼미해지던지.
크로노스나 레아도 나중에 가서는 자신의 존재를 떠올렸다지만, ‘이름’까지 완전히 기억해 내는 데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런데 헤노바는 진즉에 떠올리고 있었다고?
그만큼이나 연우를 걱정하는 마음이 컸단 뜻이었으니.
그날, 연우는 한참 동안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판트가 눈치 없게 우냐면서 깐족대다가 눈덩이에 멍 자국이 나기도 했지만, 연우는 그 뒤로도 여러 가지로 복잡한 기분에 젖어야만 했다.
그리고 지금.
헤노바는 기억 속의 얼굴 그대로였다.
짜증 섞인 얼굴도, 틱틱대는 말투도, 정돈 한번 하지 않은 덥수룩한 턱수염도, 더러운 콧수염도…… 모두 똑같았다.
하지만 감회도 잠시. 연우는 크게 티를 내지 않을 생각으로,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은 채, 대꾸했다.
“순간 어디에 계시나 했습니다. 작아서 보여야 말이죠.”
“뭐, 인마?”
헤노바는 신경질적으로 한쪽 눈썹을 꿈틀대다가, 연우를 위아래로 빠르게 훑어봤다.
“헤노바는 왜 그렇게 절 살피십니까?”
“네놈이 이번에는 또 뭘 망가뜨려서 왔나 싶어서 그런다.”
“제가 뭐가 망가져야만 옵니까?”
“그럼 아니냐?”
“그냥 놀러 온 것일 수도 있잖습니까?”
“그냥 놀러 와? 네가?”
헤노바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퍽이나 그러겠다. 목적이 있는 게 아니면 연락도 제대로 안 하는 녀석이 뭔…….”
궁시렁궁시렁. 쫑알쫑알. 헤노바는 여태껏 연우에게 쌓인 화를 전부 털어놓기라도 하려는 듯, 계속 구박을 쏟아 냈다.
듣는 내내 세상에 이렇게 나쁜 놈도 없는 것 같아서,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몇 번씩이나 움찔거리고 말았다.
‘……내가 저렇게 심했나?’
확실히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자신이 참 몹쓸 놈이었구나 싶기는 했다.
아니, 사실 헤노바뿐만이 아니었다. 판트나 에도라, 무왕을 포함해 다른 가족들까지. 아마 칸과 도일도 포함되겠지.
그는 항상 무언가에 쫓기듯이 살았고, 그 때문에 주변 사람들을 제대로 챙기지 못할 때가 많았다.
이따금 한 번쯤은 잠시 멈춰 서서 주변을 돌아봐도 되었을 텐데. 그때는 무엇이 그리도 다급했던 것인지.
“죄송합니다.”
그래서 연우는 여전히 신경질적으로 뭐라 소리치고 있는 헤노바에게 고개를 숙였다.
순간, 헤노바가 도중에 말을 멈추고 두 눈을 끔벅거렸다. 얘가 갑자기 왜 이러냐는 투.
“……뭐?”
“그동안 속 썩이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
이러한 사과가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전달하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헤노바의 화가 가라앉았으면 하는 바람일……!
“너, 누구냐?”
……텐데. 아무래도 정말 조금도 먹히지 않은 모양이었다.
“내가 아는 카인, 그 싸가지 밥 말아 먹은 새끼는 절대 이런 모습 안 보여. 너 도플갱어나 뭐 그런 거지? 내가 아는 싸가지는 어따 뒀냐? 날 속여서 뭘 뜯어먹으려는 거야?”
헤노바는 품에 한가득 안고 있던 물건들을 바닥에 와르르 쏟아 내고, 갑자기 제 몸집보다도 훨씬 큰 핼버드를 꺼내서는 연우에게로 겨누었다.
기세가 흉흉한 것이 여차하면 당장 이쪽으로 휘두를 태세였다. 살기도 장난이 아니었다.
“…….”
연우는 지금 이 상황을 대체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몰라 한참 동안 두 눈을 끔뻑거려야만 했다.
* * *
“정말, 너 맞지?”
“네. 맞습니다.”
“정말이지?”
“맞다니까요.”
“아닌데. 너무 이상한데…….”
“……제가 대체 뭘 어떻게 하면 믿어 주시겠습니까?”
헤노바를 설득하는 작업(?)은 생각보다 아주 긴 시간을 필요로 했다.
몇 번씩이나 자신이 맞다고 주장하며 근거를 대도, 그때마다 헤노바가 의심의 눈빛을 던졌기 때문이었다.
‘그 싸가지가 이렇게 예의 바를 리가 없다’거나, ‘싹퉁머리가 갑자기 하룻밤 만에 생겨난다는 게 말이 되냐’거나…… 혹은 ‘네놈의 인성이 갑자기 좋아질 리가 없잖으냐’거놈의 인성이 갑자기 좋아질 리가 없잖으냐’거나.
도저히 욕설인지 핀잔인지 구분 못 할 평가들이 한참 쏟아져 나오고 나서야, 헤노바는 아주 조금, ‘아아아아주우우우우 쬐금’ 의심을 거둘 수 있었다.
대신에 그다음에 이어지는 것은 전혀 다른 의심이었다.
“그럼 어디 아픈 건 아니고?”
“……제가 어디 아플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하긴 네놈이라면 저승에 가서도 명왕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서 다시 깨어날 놈이긴 하지.”
“…….”
죽음의 신위를 아래에 두고 있는 게 저입니다만…… 연우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뭐, 사실 생각해 보면 이 탑 안에서 네놈처럼 그렇게 욕을 많이 먹은 사람도 없을 테니…… 그것만 다 합치면 영생은 가능한 수준이겠군.”
그쯤 되니 연우는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그냥 나도 맞받아쳐 버릴까? 헤노바에게 지은 죄가 있어서 여태 잠잠하게 있었다만, 그래도 계속 속을 긁어 대니 원래의 성격(?)이 자꾸만 대가리를 치켜들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쯤 되니 헤노바도 더 이상 연우를 구박하는 게 재미없어졌는지, 팔짱을 낀 채로 시큰둥한 얼굴을 하며 물었다.
“그럼 여긴 진짜 왜 온 거야?”
“그냥 놀러 온 거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정말 용건이 없다고?”
“……뭐, 조그마한 거라면 있긴 있습니다만.”
“흥! 그럼 그렇지.”
헤노바는 네놈의 행동 양식 따윈 모두 다 알고 있다는 투였다.
“그래서 뭘 하려고?”
“모루랑 망치 좀 빌릴 수 있을까요?”
“모루? 망치? 뭐라도 만들려고?”
헤노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무슨 거창한 아티팩트를 만들려고 자신의 대장간을 찾아온 걸까?
그가 알고 있는 연우는 이미 ‘명장(名匠)’의 칭호를 받은 상태. 실력만 따진다면 자신과 비교해도 크게 뒤지지 않았다.
즉, 웬만한 물건쯤은 장소에 구애를 받지 않고 손쉽게 만들 수 있다는 뜻. 굳이 이렇게 찾아올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도 찾아온 것은…… 아주 엄청난 물건을 만들려는 게 아닐까?
어쩌면 현자의 돌에 버금가는 물건을 만들려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허리가 쭈뼛 세워졌다.
당시에 했던 고생이 너무 컸기 때문에 또 그런 것에 휘말릴까 봐 걱정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음?’
연우의 콧잔등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고개를 숙이던 것에 이어서 난생처음 보는 모습에 헤노바는 ‘얘가 정말 뭘 잘못 먹었나’하는 투로 그를 바라보다가, 곧 이어지는 말에 크게 놀라고 말았다.
“반지를 만들까 합니다.”
“반지? 너…… 설마?”
“예.”
“안 된다!”
“청혼…… 예? 무슨?”
연우는 헤노바가 다급하게 소리를 지르자 왜 그러나 싶어 얼결에 반문을 던져야만 했다. 하지만 헤노바의 얼굴은 아주 진지했다.
“에도라, 그 아이가 얼마나 착하고 어여쁜데 네놈 같은 놈팡이에게 시집을 보낸단 말이냐!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절대 안 돼!”
“…….”
연우는 살면서 처음으로 헤노바가 밉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화르르륵-
따앙! 따앙!
연우는 거칠게 타오르는 화로 앞에서 연거푸 망치를 두들겼다. 자그마한 형태의 반지가 모양을 얼추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가 가진 격에 비하자면 아주 볼품없는 형태의 반지였지만.
망치를 내려치는 연우의 두 눈은 다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후웁, 하아아-
헤노바는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서 그런 연우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곰방대에 불이 붙으면서 연기가 자욱하게 퍼졌다.
‘저 철없는 것이 대체 무슨 헛바람이 든 거지?’
결혼이라. 헤노바는 작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로서는 어쩐지 입에 잘 감기지 않는 단어였다.
그도 그럴 것이, 헤노바에게 결혼이라는 것은 너무 먼 세계의 일처럼 느껴졌던 탓이었다.
탑으로 흘러들어 오는 사람들은 대개 가슴에 한을 품고 있거나, 강한 이상을 갖고 있는 자들. 그렇다 보니 짝을 만나 가정을 꾸리는 경우가 극히 드문 편이었다. 자신들의 행보에 있어 가족이 사슬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그건 헤노바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결혼이라는 걸 생각해 본 적도 없었던 것이다. 탑 내에 짝이 될 만한 여성 드워프의 개체 수가 극히 적은 것도 이유였고, 다른 플레이어들과 마찬가지로 혹시 방해가 될까 우려되었던 것도 있었다.
하지만 헤노바는 오히려 그런 이유보다는 한 번 경험해 본 적이 있었기에 더욱 기피했던 건지도 몰랐다.
남들에게는 털어놓은 적이 없지만, 헤노바는 탑으로 흘러들어오기 전에 가정을 일군 적이 있었다.
비록 부부 사이에 자식은 없었지만, 그래도 끔찍하게 아내를 사랑했었다.
하지만 부부 생활이라는 것은. 결혼 생활이라는 것은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과는 전혀 다른 개념의 것이었으니.
자신에 대한 책임감이 없다면. 한 명이 아닌 두 명이 된 것에 대한 의무감이 없다면 절대 제대로 이어 나갈 수 없는 무거운 것이었다.
철없던 시절의 헤노바는 그런 사실을 잘 몰랐고, 별다른 생각 없이 무턱대고 결혼을 했다가 결국 아내와 갈라서야만 했다.
그런데…….
저토록 철없는 녀석이 갑자기 결혼을 하겠다고 나선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가 알지 못하는 어떤 죽을 위기를 겪고 나서 자식을 보고 싶다는 욕망이 강하게 든 것일 수도 있었고, 이제는 너무 지친 나머지 어딘가에 정착하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 든 것일 수도 있었다. 또는 에도라와 어떤 강한 감정적 교류를 가졌을 수도 있었고.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심적인 변화를 크게 줄 만한 어떤 동인(動因)이 있었던 건 확실했다.
‘미래에서 온 것…… 과 관련이 있나?’
헤노바는 내색하지 않았어도 이미 연우가 자신이 알던 연우와는 많이 다른 존재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제 딴에는 속인답시고 속이고 있다지만, 귀신의 눈은 속일 수 있을지언정 자신의 눈은 피하지 못했다.
격.
눈빛.
자세.
솜씨.
말투.
그 모든 게 다 달랐다.
최소 수십 년, 혹은 수백 년은 넘어야 지닐 수 있을 것 같은 깊이가 물씬 풍겼으니.
‘어떤 수를 써서 돌아온 것인지는 몰라도, 네가 이렇게 왔다는 건 그만큼 원하던 것을 전부 무사히 얻었다는 뜻을 테지.’
저 길의 끝에서 연우가 무엇을 얻었는지, 헤노바는 알지 못했다. 그는 에도라와 달리 혜안과 같은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한 까닭이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는 이제 행복을 찾으려 하는 연우의 저러한 노력이 참으로 대견할 뿐이었다.
‘어디 보자…… 만약 저들 두 사람이 결혼을 한다면 난 뭘 챙겨 줘야 하는 거지?’
명색이 4대 명장 중 한 사람이 되어서. 그중에서도 최고로 손꼽힌다는 자신이 무턱대고 아무거나 줄 수는 없지 않은가.
연우도, 에도라도, 무왕도 모두 놀랄 만한 무언가를 선물해 줘야 했다.
그러길 잠시.
‘오! 그게 좋겠군.’
헤노바는 곧 좋은 생각이 떠올라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미소는 천천히 짓궂게 변했다. 그것이라면 저 뻔뻔하기 짝이 없는 연우 놈이 당황해하는 얼굴을 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으흐흐흐!”
“……?”
헤노바가 음침하게 웃음을 흘려 대자, 연우는 망치질을 하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어쩐지.
그를 보는 헤노바의 시선이 불길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