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819화 (819/862)

19화. 외뿔 (4)

‘……미치겠군.’

연우는 잘게 떨리는 자신의 손을 보면서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정말이지 다른 일들은 잘도 턱턱 해내면서, 어떻게 에도라와 관련된 일이면 이렇게 한없이 약해지는 건지.

그의 오른손에는 자그마한 크기의 목함(木函)이 들려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처음 보는 순간 감탄을 터뜨릴 수밖에 없을 것 같은 함이었다.

주요 재질인 목재는 저 깊은 용암 지대까지 내려간 흑단목(黑檀木)의 뿌리가 수백 년 동안 열기에 노출되 어야만 겨우 만들어진다는 강심목(鋼心木)이었고.

그 위에 새겨진 문양은 두 마리의 기러기로,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것처럼 생생하게 조각되어 있어 화려함을 한껏 더했다.

외뿔부족은 전통적으로 원앙과 함께 기러기를 부부의 애정을 상징하는 동물로 여겨 왔다. 기러기는 수십 년의 생을 살면서 일부일처의 습성을 버리지 않으며 항시 새끼를 옆에 끼고 살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 부분은 헤노바가 아니었으면 전혀 신경 쓰지 못했을 부분이었다.

-뭐? 딸랑 반지만 들고 가겠다고?

-그럼 이것들을 담을 작은 용기라도…….

-그래서 뭐 들고 가게?

-이거라면 되지 않겠습니까?

-멍청아! 그딴 걸 어떻게 내놔! 멋대가리 없이 결혼해 달라고 반지만 떡 하고 내놓으면, 어느 여자가 좋아하겠냐고! 너 같은 머저리 새끼가 분위기를 잡으면, 에도라 같이 예리한 아이가 설마 프러포즈인 걸 눈치채지 못하겠냐? 아마 지금 눈치챘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그럼 어떻게 해야……!

-반지함부터 예쁘게 만들어 놔야지! 그런 사소한 것부터 신경을 써야, ‘아, 이 남자가 정말 날 세심하게 챙겨 주고 있구나’하고 생각하지! 그딴 식으로 주머니에서 반지만 떡 하고 꺼내면 흥이 생기겠냐, 안 생기겠냐? 앙? 대가리가 있으면 생각을 제대로 해!

-……듣고 보니 말씀이 맞습니다.

-으이구, 하여간! 젊은 남자란 것들은 이래서 안 돼요. 어찌 이렇게 센스가 없는. 쯧쯧.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거기 있어 봐! 마침 안 그래도 좋은 생각 하나 떠올랐으니까!

헤노바는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못하는 연우의 뒤통수를 몇 번씩이나 후려갈기면서 이런저런 조언들을 던져 주었다.

그 조언들이 하나같이 버릴 것이 없어서 연우로서는 속으로 적잖게 감탄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미처 짚어 내지 못했던 부분들을 훨씬 잘 챙겨 주었으니까.

실은 결혼을 하려는 게 연우가 아니라 헤노바인 것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멘트는? 프러포즈 멘트는 준비했어?

-그게…….

-진짜 멍청한 거냐, 아니면 이런 일에만 저절로 멍청해지는 거냐? 제대로 안 해?

-분위기는 어떻게 잡으려고?

-비밀입니다.

-뭐? 비밀? 왜?

-말씀드리기 조금 부끄럽습니다.

-흐. 흐흐. 네가 그런 말도 할 줄 아냐? 됐고, 어서 제대로 말 안 해? 또 어디서 똥 같은 짓 하지 말고 미리 말해서 확인받는 게 좋을 거다! 설마 다른 부족원들도 있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하려는 건 아니지?

-……밤에 둘이서 산책하면서 할까 합니다.

-어쭈? 어디서 본 건 있어 가지고. 그럼 이벤트는 어떻게 할 건데?

-그게 아니라고!

-그딴 짓을 하면 부끄러워서 에도라가 제대로 대답이나 하겠냐!

-프러포즈라는 건! 어? 기세! 남자다움! 이딴 게 아니야! 그런 걸 생각하고 있는 거라면 그냥 당장 쓰레기통에 머리 처박고 있어. 분위기다. 무조건 분위기라고!

-제대로 안 해?

‘……그렇게까지 특훈을 했는데 제대로 못 해낸다면, 분명히 날 죽이려 드시겠지.’

연우는 길길이 날뛰던 헤노바를 보면서 내내 작게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하나같이 자신을 타박하는 말뿐이긴 했어도, 그것이 사실은 모두 그를 위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주변 사람들 중 연우와 에도라가 잘되기를 가장 크게 바라는 사람이 바로 헤노바였다.

헤노바에게 있어 연우는 아들과 같았고, 에도라는 오랫동안 외뿔부족과 교류하면서 귀여워했던 아이였으니까. 그녀가 쥐고 있는 칼조차 헤노바가 직접 만들어 준 것이 아니던가.

그러니 더욱더 열성적이었던 거겠지.

다행이라면, 야단만 맞은 건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흠흠! 뭐, 그래도 프러포즈 링을 직접 만든다는 건 괜찮은 생각이었다만.

주물을 몇 번씩이나 두들겨도 좀처럼 원하는 모양이 나오질 않아 완성하는 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완성된 한 쌍의 반지는 너무나 예뻤다.

꽈악!

목함을 쥐는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후우…….”

숨까지 고르고 나니 긴장이 조금은 덜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헤노바.

-왜?

-그렇게 여심을 잘 아시는 분이 왜 여태 솔로이신 겁니까?

-이 새끼가?

피식-

언뜻 대장간을 나오기 직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니, 실웃음까지 흘러나왔다.

역시 헤노바는 깐족댔을 때 보이는 반응이 너무 재미있었다. 연세도 지긋한 분의 혈압을 더 이상 올라가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말부터 불쑥 튀어 나가는 것을 보면 그가 편하긴 정말 편한 모양이었다.

‘감사합니다, 헤노바.’

그렇게 아버지나 다름없는 분에게 속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면서.

저벅.

저벅-

연우는 에도라가 있을 곳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오라버니, 오셨어요?”

에도라는 때마침 화단에다 물을 주고 있었다. 프릴이 달린 하얀 원피스를 입은 채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물뿌리개를 이리저리 흔들고 있는 모습은 정말이지 예뻐도 너무 예뻤다.

그래서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우두커니 서서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말았다.

원래대로라면 아주 조심히 뒤에서 나타나 놀라게 할 생각이었는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에도라가 인기척을 느끼고 왜 그러냐며 돌아본 뒤에야, 연우는 겨우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하지만 모든 이성이 돌아온 건 아니었다.

마침 이쪽으로 불어오던 산들바람에 의해 꽃향기와 함께 에도라의 체향이 같이 섞여 그를 미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맡을 때마다 애간장을 태우게 만들고,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박하향.

그 순간, 연우는 헤노바에게 온갖 구박을 다 들어 가면서 같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던 프러포즈 계획이 단박에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마치 에도라를 닮은 작은 악마가 나타나 커다란 망치로 계획을 송두리째 박살 내 버린 것 같았다.

그래서.

“…….”

“……?”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뭔가에 홀린 것처럼 에도라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에도라는 연우에게 어딜 다녀왔냐고 물으려다가,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을 보고 똑같이 인상을 굳혀야만 했다. 혹시 자신이 잠든 시간 동안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에도라.”

“예?”

연우가 그녀 앞에서 다짜고짜 한쪽 무릎을 꿇더니.

“나랑 결혼해 줘.”

품에서 무언가를 뒤적여 자그마한 목함을 꺼내서는 조용히 뚜껑을 열며 말했다.

딸깍-

목함 안쪽에는 부드럽게 깐 솜 위로 두 개의 반지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이렇다 할 무늬나 장식은 없지만, 아름답게 반짝이는 반지.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저절로 눈길이 가게 만드는 반지였다.

그리고 그 반지만큼이나 에도라의 머리를 멍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아무런 예고도 없이 연우가 꺼낸 말이었다.

결혼을 해 달라.

그 말이 마치 낙인처럼 가슴에 깊숙하게 내려앉았다.

반면에.

연우는 에도라가 두 눈만 동그랗게 뜬 채로 아무 대답도 없자,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확 드는 기분이었다.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멍청한 짓을 했는지 깨달은 것이다. 충동적으로 던지는 프러포즈라니…… 게다가 이렇다 할 분위기도 잡지 못했고, 생각해 두었던 이벤트는 ‘이’ 자도 꺼내지 못했다.

자신이 봐도 멋대가리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어서 추후에 헤노바에게 어떤 잔소리를 들어야 할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러니까, 음, 내 말은…… 이제 떨어지지 말고…….”

그래서 어떻게든 수습이라도 해 보려는데.

“좋아요.”

에도라가 연우의 손에 올라와 있던 함을 확 하고 낚아챘다.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는 채로, 눈가에는 눈물이 살짝 맺혀 있었다.

“반지, 끼워 주실 거죠?”

그 모습이 또 너무 예뻐서 연우는 멍하니 바라보다, 뒤늦게 부랴부랴 자리에서 일어나 작은 반지를 꺼내 에도라의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가녀려 보이지만 오랜 무술 단련으로 굳은살이 잔뜩 박인 손. 하지만 연우에게 있어서는 아름답기만 한 섬섬옥수였다.

반지는.

너무나 잘 맞았다.

에도라는 그것을 소중하게 매만지다가, 활짝 웃었다.

“사랑해요.”

* * *

-카인이 에도라에게 청혼했다!

연우와 에도라의 소식은 금세 마을 전체에 퍼져 나갔다.

두 사람으로선 도저히 어떻게 손을 쓸 새도 없이 퍼지고 만 미친 속도였다.

“뭣이? 그 말이 사실이당가?”

“참말이라니까! 그, 벌초 자주 하러 가는 넨 씨네 막내아들 있잖아?”

“아, 그 말 안 듣는 망아지? 근데 걔는 왜?”

“걔가 우리 공주님의 별채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가다가 우연히 봤다더만. 처음에는 카인의 표정이 너무 심각해서 무슨 일이라도 터졌나 조마조마했는데…… 크! 그걸 보고 만 거지!”

“으으! 나도 그 자리에 있었어야 하는 건데!”

“그러니까, 내 말이! 우리 도도한 공주님 표정이 어땠을지 너무 궁금하잖아!”

두 사람 다 청혼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주변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던 게 패착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아주 조심히 영매에게 가장 먼저 이 사실을 전달할 생각이었다. 무왕에게 전달해도 소문이 떠들썩하게 날 건 뻔해 보이니, 그러기 전에 천천히 일을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애당초 에도라는 마을이 자신의 결혼 때문에 떠들썩해져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괴롭히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일이 터져 버리고 만 것이다.

“우리 얼음 공주님이 결혼하신다는데!”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 없지!”

“뭐부터 하지, 뭐부터 하지?”

“뭐부터 하긴.”

부족원들은 이미 자기들끼리 빠르게 논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무공을 수련하는 것 외에는 이렇다 할 재미있는 놀거리가 없는 마을.

그래서 그들에게 있어 연우와 에도라의 결혼은 같이 축하할 만한 이벤트이면서, 간만에 머리를 맞대고 의기투합을 할 놀잇거리이기도 했다.

“일단 주인공들을 기릴 만한 것부터 세워야지. 무려 부족장의 제자와 공주님의 혼사인데! 탑의 다른 사람들, 아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알 수 있게 해야 하지 않겠나!”

“오오오오!”

“자, 일단! 청첩장부터 뿌리자고!”

부족원들은 부족의 가치가 낮게 보여서는 안 된다며 우선 최고급 비단을 청첩장 재료로 선택했다. 그것도 무려 백년천잠(百年天蠶)으로 만든 비단이었다.

백년천잠은 족히 수백 년 가까이 달빛의 영기를 받아야만 탄생한다는 누에. 그렇다 보니 이것을 이용해 만든 비단은 ‘도검불침, 백독면역’이라는 수식어도 달려 있는 만큼 아주 귀했다. 뛰어난 아티팩트를 만드는 데 재료로도 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부족원들은 거리낄 것 없이 귀중하게 키운 백년천잠을 마구 뽑아 청첩장을 찍어 대고, 그 안에는 탑에서도 가장 글씨체가 아름답다는 서예가를 귀중하게 모셔와 일일이 수작업으로 내용을 쓰게끔 했다.

그 외에도 금박을 입히고, 진은 가루를 뿌려 대는 등 말도 안 되는 미친 짓을 잘도 하더니 탑에 상주하는 주요 클랜에다 골고루 뿌리기 시작했다.

에도라가 부끄럽다며 그걸 어떻게 뿌리냐고 뜯어말리려 했지만, 이미 잔뜩 불이 붙은 부족원들을 말릴 수는 없었다. 아니, 애당초 집배원을 자처한 부족원들은 에도라가 어떻게 따라잡기도 힘들 만큼 뛰어난 경공술의 대가들이었다.

온갖 미사여구가 빼곡하게 적힌 청첩장의 내용은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결혼식 안 오는 놈들은 다 짓밟힐 줄 알아라.

레드 드래곤이 무너지고, 명실상부 탑의 최고 세력으로 자리 잡은 외뿔부족을 무시할 수 있을 만한 곳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문제가 있다면 갑작스러운 올포원의 실종 때문에 최근 탑의 세력 판도가 아주 크게 요동치고 있다는 것이었지만…… 외뿔부족이 그딴 걸 신경 쓸 리가 만무했다.

“자, 청첩장은 전부 뿌렸으니까. 이 다음에는? 이다음에는 또 뭐 하지?”

“뭐 하긴! 주인공들을 기리는 업적비를 세워야지!”

“우리 마을을 빛낸 카인과 에도라의 동상부터 세우자! 아아아아주우우우우 크게!”

동상을 세우자!

그 말에 부족원들은 모두 눈을 반짝였다.

“그런데 동상은 어디서 만들지?”

“아주 휘황찬란하게 만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우리는 그런 쪽과는 거리가 멀단 말이지.”

부족원들은 한순간 고민에 잠겼지만.

“후후후! 그런 건 걱정 말게. 이미 내가 전부 준비를 마쳐 뒀으니.”

때마침 기다렸다는 듯이 누군가의 답변이 들려왔다.

부족원들은 누가 끼어드나 싶어 고개를 돌렸다가, 호언장담한 사람의 얼굴을 보고 곧 화색을 띠었다.

* * *

“제대로 당겨, 하나둘! 셋!”

“으랏차차!”

“야, 이 멍청한 새끼들아! 그쪽 제대로 안 당겨? 이대로 갔다간 뒤로 넘어간다고!”

“알겠습니다! 다들 구호에 맞춰서! 영차!”

“영차!”

부족원 수십 명이 나란히 붙어 줄을 당기면서, 족히 30여 미터는 될 것 같은 거대한 동상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었다.

헤노바는 팔짱을 낀 채로 그 모습을 아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고.

탁!

“……왠지 불길하더라니.”

연우는 손으로 얼굴을 덮고 말았다. 다시 가면을 가져와 써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에도라는 이미 여기 있기 싫다면서 도망친 지 오래였다.

올라가고 있는 동상.

그건 위엄에 찬 얼굴로 비그리드를 높이 들고 있는 연우와 우아한 자태로 웃고 있는 에도라의 동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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