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820화 (820/862)

20화. 외뿔 (5)

“허허허! 그렇게 멋진 동상은 난생 처음 봅니다, 그려.”

“힘을 좀 써 봤지.”

외뿔부족의 마을회관 내에 위치한 회의실.

기다란 탁상을 중앙에 두고, 무왕과 헤노바가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껄껄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혹시 말입니다.”

“말해 보게.”

“저도……?”

헤노바는 무왕이 살짝 말꼬리를 흐리자 왜 그러나 싶은 얼굴로 갸웃하다가, 곧 말뜻을 알아채고 피식 웃고 말았다.

“그야 문제없지.”

“흐흐! 역시 우리 헤노바 님, 시원시원하시다니까.”

“그런데 제자나 여식보다는 커야 하지 않겠나?”

“그럼 이왕이면 한 세 배쯤 되는 걸로다, 마을 중앙 공원에 세우고 옆에는 기념비와 분수대를……!”

“아버지! 제발 좀 그만해요!”

에도라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다 말고, 더 이상 부끄러움을 감당하기 힘들었던지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말허리를 툭 잘랐다. 이미 얼굴은 새빨갛게 익어 버린 상태였다.

청첩장에 이어 동상까지. 부족원들이 결혼식을 기념하겠다며 저지른 짓(?)들은 에도라를 갈수록 미치게 만들었다.

아니, 아무리 장난을 쳐도 정도가 있지, 이게 대체 무슨 짓거리란 말인가……! 문제는 이를 두고 따져 봐도, 부족원들 중 이에 대해 이상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점이었다.

도리어 ‘좋은 게 좋은 거다’, ‘공주님이 부끄러워하신다’, ‘더 열심히 하라고 응원을 하시는군’이라는 말도 안 되는 결론을 내리기 일쑤였다.

그리고 그건 무왕도 마찬가지였으 니. 그는 지금 벌어지는 행사를 기꺼워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크게 날뛰려 하고 있었다.

그 부끄러운 동상을 세운 것만 해도 팔짝 뛰고 싶은 심정인데, 이제는 아버지까지 동상을 세우겠다니!

아무리 대단한 인물이라지만 제 얼굴에 금칠을 해도 유분수지, 그게 대체 무슨 짓거리란 말인가.

거기다 지금만으로도 미칠 것 같은데, 몇 발자국은 더 나가서 아예 분수대를 세우고, 업적비를 세워서 기념 공원까지 짓겠다고 떠들어 댄다.

와르르. 에도라는 자신을 둘러싼 하늘이 그대로 무너지는 듯한 기분을 맛봐야만 했다.

‘부숴 버릴 거야! 동상이란 동상은 전부 다 부숴 버릴 거라고……!’

에도라는 신마도를 꽉 쥐었다. 당장에라도 이곳을 튀어 나가 그 빌어먹을 동상부터 모조리 박살 내 버릴 태세였다.

물론, 무왕은 그런 에도라의 말을 전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눈치였다.

‘어떻게 좀 해 봐요!’

에도라는 불타는 시선으로 연우 쪽을 돌아봤다.

하지만 이미 연우는 해탈이라도 한 것처럼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썩은 동태처럼 두 눈에 초점이 잡혀 있질 않았다.

아마 그동안 겪은 정신적 충격을 따지자면 그가 더 컸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이라도 그냥 ‘굴레’를 도로 감아 버리고, 다시 청혼할까? 아니면 그냥 본체로 강림해서 탑을 쑥대밭으로 만들면……!’

연우는 오늘 하루에도 몇 번씩 그러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눌러 야만 했다. ‘굴레’를 감는 것에 상당한 마력과 인과율이 필요하지 않았다면 진즉에 일을 저지르고도 남았을 터였다.

‘……잘못 건드리면 사부님에게도 피해가 갈 거고.’

게다가 이건 절대 말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여하튼.

그 때문에 연우로서는 지금 이러한 상황에서도 끓어오르는 속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에도.

헤노바와 무왕의 수다는 계속 이어졌다.

“그래도 모두 마음에 든다고 하니 다행이로군. 사실 기일을 맞추지 못할까 봐 걱정했거든.”

“음? 기일이라고 할 게 있습니까? 아직 일자도 잡지 않았는데.”

“잡은 것 아니었나? 그러니 청첩장을 뿌린 것 아니야?”

“그거야 1차지요.”

“1차? 그렇다는 건 2차, 3차도 있다는 소리인 겐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이 나유의 여식과 제자가 혼사를 치르는데! 1차는 앞으로 이런 일이 있을 테니 다들 선물 준비를 단단히 하라는 뜻에서 짧게 모이는 거였고, 2차는 약혼식, 3차는……!”

“아버지! 진짜 이러시기예요……?!”

저 부끄러운 짓을 몇 번이나 더 하겠다니! 에도라는 발 하나를 탁상에 걸치고, 어느새 신마도를 반쯤 뽑아 든 상태였다. 분노로 젖은 두 눈은 더 떠들어 대면 당장에 이 칼을 아버지에게 휘둘러 버리겠다는 무시무시한 경고를 담고 있었다.

무왕은 그런 딸내미의 반응을 보면서 실웃음을 흘렸다. 쿡쿡 찔러 댈 때마다 저런 식으로 격한 반응을 보이니 도저히 끊을 수가 없었다. 나이를 먹고 생긴 은밀한(?) 취미가 있다면, 바로 딸 괴롭히기였다. 영매는 이를 두고 철들려면 멀었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댔지만, 도무지 끊기 힘든 취미였다.

그래도 이 이상 속을 긁어 댔다간, 정말 의가 상할 수가 있다. 무왕은 여기까지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는 이런 면에서는 ‘선’을 기가 막히게 잘 읽었다.

“그보다 제자 놈아.”

무왕은 딸에게서 제자 쪽으로 슬쩍 시선을 돌렸다.

연우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돈댁은 언제 소개시켜 줄 거냐? 상견례는 해야지?”

상견례.

그 말에 에도라는 슬그머니 탁상에서 발을 내리고, 다소곳하게 의자에 착석했다. 왠지 여기서는 더 이상 소란을 피우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러면서 연우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아직 연우네 가족들과는 제대로 인사를 나누지 못했다는 것이 떠올랐던 것이다.

아버지, 크로노스는 만난 적이 있었다. 비그리드의 상태로 있을 때 대화를 나눴으니까. 하지만 연우의 어머니나 동생과는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이 없었다.

물론, 두 사람이 돌아가셨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연우가 그들을 구하려 노력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어쩌면 그 목적을 달성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올림포스의 주신들도 가족이니까…… 어…… 상견례를 치르려면…….’

에도라는 연우의 태생이 원래 어떤 곳인지를 떠올리고는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왠지 ‘상견례’라고 해도 단순히 두 집안의 어른들끼리 만나는 자리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외뿔부족과 올림포스. 두 곳 모두 탑을 지배하는 최고의 세력들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상견례는 양가 부모님만 동석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연우는 잠깐 고민하다가 그렇게 말했다. 형제들까지 데려오려면 차정우뿐만 아니라, 위쪽도 신경 써야 하는데…… 사실 그쪽과는 말이 형제일 뿐이지, 아직도 서먹서먹한 관계였다. 이 시간대라면 제우스도 한 창 날뛰고 있을 테고.

‘아버지와 어머니만 모시고 와도…….’

자신이 결혼한다고 발표했을 때, 과연 두 분은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아버지는 왜 사서 무덤 파는 짓을 하냐고 장난스럽게 말씀하실 것 같고, 어머니는 재회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어딜 가냐면서 섭섭해하실 것 같고…….’

그와 동시에 연우는 에도라를 만났을 때 두 분의 반응이 어떨지도 불에 보듯 뻔하게 보였다.

웃으실 거다.

좋아하실 거고.

어쩌면 아들보다 며느리를 더 반가워하실지도 모르겠다. 특히 아버지는 원래도 에도라를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으니까.

“그래그래. 어차피 형식상 하는 거니 그건 작게 하고 끝내자. 사돈 부부만 모시고 와. 아님 내가 갈까?”

다행히 무왕도 연우의 제안에 별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아닙니다. 제가 모셔 오겠습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고. 스드메 (‘결혼 사진 스튜디오, 드레스, 메이크업’의 준말)? 뭐 그런 건?”

“그건…….”

연우와 무왕이 빠르게 결혼 준비를 구체화시켜 갔다.

* * *

회의실의 벽 너머.

옆 방에서 연우와 무왕의 대화를 은밀하게 엿듣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드레스가 가장 문제인데. 에도라, 좋은 생각이라도 있냐?

-엄마가 결혼식 때 입으신 거 입으면 되지 않을까요?

-물려받아서 하는 것도 좋지. 하지만 말했잖냐. 결혼식은 외부 사람들 있는 곳에서 한 번, 또 부족식으로 한 번 이뤄질……!

-진짜 칼 뽑을 거예요!

-어이쿠! 우리 따님이 왜 이렇게 화가 단단히 나셨을까? 그래도 이건 어쩔 수 없다. 농담이 아니라, 부족 체면도 있어서 전통 혼례식은 따로 치르긴 해야 해.

-……그럼 드레스가 두 벌이 필요하단 말씀이세요?

-하나는 엄마 걸 쓴다고 했으니, 다른 하나가 더 필요한데. 흠! 그래도 아무거나 할 수는 없고. 아주 특별한 것이면 좋을 것 같은데.

-그럼…….

-오. 역시 생각해 둔 게 있구나. 뭐냐?

이야기를 엿듣고 있던 남자는 내용을 모두 듣고 난 뒤, 천천히 벽에서 귀를 뗐다.

“우후후후!”

남자. 판트는 음침하게 웃어 댔다. 이 시간대의 판트가 있어서 혹여 눈에 띌까 봐 외부 활동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는 늘 줄곧 이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이전 ‘굴레’에서는 못 했던 거, 이번에는 내가 도와주마.”

원하는 드레스를 가져온다면 앞으로 자신을 우러러보게 될 테지. 그는 이제야 겨우 오빠로서의 체면이 살겠다면서 눈을 빛냈다.

“기다려라, 동생아! 이 오빠가 간다!”

* * *

“어떠냐?”

“차향이 아주 맑습니다.”

“머리도 무척이나 개운하게 해 주는 효과가 있지. 나도 가끔 즐긴단다.”

모든 이야기가 끝난 뒤.

에도라는 어머니와 이야기를 좀 나눠야겠다면서 자리를 떠났고, 헤노바는 무왕의 동상을 한번 만들어 보겠다면서 대장간으로 돌아갔다.

-음홧홧홧! 어떠냐, 내 결혼 선물이?

문득 마지막에 헤노바가 기세등등하게 웃으면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당시에 연우는 전혀 듣지 못한 척 무시해 버렸다.

이미 그는 밤중에 인적이 아주 적어졌을 때 동상을 모조리 부숴 버리겠다고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헤노바가 손수 만들어 준 것이라 막상 부수기가 망설여질 것 같기도 했는데, 정 마음이 쓰이면 어디 뒷산에다 통째로 묻어 둘 참이었다.

그런 괴악한 물건은 굳이 이 세상에 있지 않아도 되었다.

여하튼.

에도라와 헤노바가 빠지면서 회의실에는 연우와 무왕만이 남게 된 상태였다.

사실 연우도 같이 따라갈 예정이었지만, 무왕이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뉘앙스를 팍팍 풍겨 댄 탓에 이곳에 남아야만 했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걸까? 연우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마침 무왕이 마시고 있던 찻잔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 순간. 연우는 무왕의 두 눈이 아주 깊게 가라앉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여태 장난기가 가득하던 것과 확실히 다른 모습.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겼을 때의 얼굴이었다. 그 때문일까? 회의실 내 공기도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어쩐지. 연우는 무왕이 무슨 말을 꺼낼지 알 것 같았다.

“이제 슬슬 알려 줄 때도 되지 않았냐?”

여전히 말투는 가벼웠지만. 연우는 그 속에 담긴 무게를 읽어 낼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그것’이었다.

“앞뒤 다 잘라서 그렇게 물어보시면…….”

그래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뚝 떼 보려 했지만.

피식!

무왕은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렸다.

“얼굴에 다 알고 있다고 써 있는데, 그렇게 말하면 내가 속을 것 같아?”

“…….”

“어제. 영매가 새로 점괘를 내놨다.”

연우는 그게 뭔지 알 것 같아 입술을 꾹 다물었다.

“하나는 필(必). 다른 하나는 멸(滅). 몇 번을 흔들어도 그렇게 나왔다더구나. 이전과 전혀 달라진 게 없는 거지.”

“…….”

“이렇게 말하면 네가 날 팔불출이라고 여길지 모르겠지만, 나는 내 마누라의 실력을 절대적으로 신뢰한다. 아마 점괘는 들어맞을 거야. 왜냐고? 그야 내가 가장 사랑하는 마누라니까.”

외뿔부족은 총 50여 개의 가문과 일족이 하나로 뭉쳐져 ‘부족’을 이룬다. 당대에 족장 혹은 왕으로 추대된 자는 그러한 50여 개의 가문으로부터 차출된 여식들과 차례로 혼례를 치러야 하며, 그들과의 관계에서 무조건 한 명 이상의 자식을 가져야만 하는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태어난 자식들이 차기 왕권을 두고 다투는 식이었다.

그렇다는 건 현재 무왕도 부인이 여러 명이란 뜻이었고, 자식들 역시 판트나 에도라 말고도 많다는 것을 의미했다. 실제로 연우는 오래전에 장이라는 무왕의 아들과도 겨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연우는 여태껏 무왕을 그토록 오랫동안 알아 왔어도 그가 다른 부인에 대해 거론하는 걸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우리 마누라’라고 지칭하는 사람은 딱 한 명, 영매뿐. 그 말은 그가 가장 사랑하고 의지하는 사람은 그녀뿐이란 뜻이었다.

그렇기에 무왕은 영매의 점괘를 신뢰했고, 여기에 절대 불신이나 의문 따위를 가지지 않았다.

“그런데 말이다. 여기서 점괘는 단순한 죽음을 뜻하는 ‘사(死)’가 아닌 사라진다는 뜻의 ‘멸(滅)’이었다. 이 세상에 티끌조차 남기지 못하고 자취를 감춘단 뜻이지. 윤회전생, 그딴 것도 없이.”

무왕의 두 눈이 더 깊게 가라앉았다.

“그렇다는 건 나는 아마도 단순한 죽음이 아닌 ‘멸’에 해당하는 무언가를 겪었다는 뜻일 테지. 나라는 존재가, 영혼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는 거다. 하지만 우습게도 너는 ‘굴레’를 감으면서까지 이곳으로 왔단 말이지. 나는 이렇게 멀쩡하게 남아 있고.”

그때까지. 연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무왕은 확신했다.

이 일과 연우 간에 어떤 관련이 있다는 것을.

“대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