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821화 (821/862)

21화. 외뿔 (6)

-신단목의 나뭇가지로 월계관을 만들면, 예쁘지 않을까요?

판트는 에도라가 말한 ‘최고의 드레스’를 만들기 위해 탑 전역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층계?

시련?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죄다 때려 부수면 그만인데.

“으랏차차차!”

신단목(神壇木). 98층에 상주하는 신과 악마들에게 치성을 드릴 수 있다는 나무.

그 때문에 탑에 거주하는 플레이어들 중 종교인들은 이곳을 즐겨 방문하는 편이었다.

자신들이 모시는 신과 악마에게 목소리가 조금이라도 더 전달되기를 바라면서.

실제로 신단목은 세계수의 나뭇가지를 잘라다 묘목 삼아 심은 것이라는 말이 많았다.

그래서 그런 신단목 위로 판트가 나타나 무언가 일을 저지른 순간, 경건한 태도로 기도를 올리던 신도들은 하나같이 비명을 질러야만 했다.

“저, 저, 저게 뭐야……!”

“외뿔부족이 왜 저기에……?”

“저 미친놈이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는 거야!”

“아아악! 안 돼!”

처음 판트가 신단목의 꼭대기에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또 외뿔부족이 외뿔부족 짓 한다’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성스러운 신단목의 꼭대기에 감히 발을 붙이고 서 있는 꼬락서니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탑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외뿔부족의 지랄 맞은 성격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녀석이 적당히 장난을 치다가 금방 지겨워져서 떠나기만을 바랐을 뿐.

그런데 갑자기 줄기를 잡더니 막무가내로 흔드는 게 아닌가!

잡아 흔든다고 해서 저 커다란 나무가 과연 휠까 싶었지만, 신단목은 마치 비바람에 맞은 대나무라도 되는 것처럼 아주 크게 휘청거렸다.

덕분에 하늘에서 드리우던 나뭇잎들이 요란하게 부딪치면서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했고, 크고 작은 나뭇가지도 쉴 새 없이 쏟아졌다.

나무 그늘에서 기도를 올리던 신도들로서는 갑자기 날벼락을 맞은 셈이라 바깥으로 도망을 칠 수밖에 없었고.

저대로 놔뒀다간 정말 신단목이 꺾이기라도 할 기세라, 신도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고 말았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판트는 한참 동안 신단목을 흔들어 대다가 제법 실한 나뭇가지를 원하는 만큼 얻은 뒤에야 겨우 상황을 끝냈다.

“음…… 이거 생각보다 너무 많이 담았나?”

판트가 등에 짊어지고 있는 바구니에는 이미 나뭇가지가 수북하게 쌓여 있는 상태였다.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하지만 판트는 부족한 것보단 남는 게 좋다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훌쩍 자리를 떠났다.

결국 그가 사라진 자리에는.

휘이이잉-

“아, 아아아……!”

“시, 신단목이……!”

“시, 신이시여!”

“왜 이런 일이 우리에게……!”

나뭇잎이 죄다 떨어지고 앙상한 나뭇가지만 휑하게 남은 신단목이 쓸쓸하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 * *

-아라크네의 실! 그걸로 만든 드레스는 보석을 곱게 갈아서 뿌려 둔 것처럼 아주 아름답게 반짝인다고 들었어요.

아라크네.

올림포스의 대신격인 아테나와 실력을 겨뤘다는 신화가 있을 정도로, 실을 다루는 데 있어서 아주 뛰어난 실력을 지녔다고 알려진 이였다.

하지만 전해지기로 그녀는 자신의 실력을 너무 굳게 믿은 나머지 오만해져서 신을 욕보였고, 그로 인해 저주를 받아 대대로 거미로 지내야만 했으니.

그래서인지 ‘아라크네’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몬스터는 쉽게 상대하기가 어려웠다.

팔족보행의 거미 형태를 띠고 있는 녀석은 엉덩이 부근에 마련된 사출 기관에서 실을 무한하게 뿜어낸다.

이때 나오는 실은 점성이 가득해 아주 끈적끈적하고, 웬만한 악력이나 날카로운 날붙이로도 끊어지지 않는 탄력을 자랑했다.

거기다 무리를 지어서 생활하기 때문에 둥지에는 항상 이런 실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어 침입자가 빠져나갈 수 없는 자연적인 함정을 만들었다.

그래서 웬만한 하이 랭커들도 녀석들의 둥지에는 침입하지 않으려 하는 편이었건만.

“내놔.”

판트가 기세 좋게 기합을 터뜨리면서 지나간 자리에는 죄다 사이좋게 배를 까뒤집고 죽은 아라크네의 시체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덤으로 시체들에는 엉덩이에 달린 사출 기관이 모조리 강제로 떼인 흔적이 있었다.

이 역시 그의 등에 있는 바구니에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내놓으라고!”

거미줄 사출 기관은 아라크네에게 있어 배설물을 보는 항문이며 대장과도 연결되어 있는바.

그 때문에 둥지에 있던 아라크네들의 눈에 판트는…… 자신들의 엉덩이를 노리고 달려드는(!) 변태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내놔아아아라아앗!”

눈이 마주칠 때마다 미친놈처럼 ‘내놔! 내놔! 내놔아!’라고만 소리쳐 대면서 뛰어오는 놈은 그야말로 광기, 그 자체였다.

아라크네는 인간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저 말이 무슨 뜻인지는 대강 알 것 같았다.

이유 모를 광적인 집착과 탐욕이 아주 철철 흘러넘쳤으니까!

거기에 달려올 때마다 쿵쿵 하고 둥지를 들썩이게 만드는 굉음은 더더욱 소름 끼치게 만들었다.

이 근방에서는 최고의 포식자로 소문난 그들이었지만, 판트는 그들의 머리 위에, 아니, 엉덩이 위에 있었던 것이다!

키에에엑!

키엑! 키에엑! 키이익!

엉덩이 변태가 나타났다! 내 엉덩이를 지켜야 해!

아라크네들은 뒤쫓아 오는 판트를 피해 곳곳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면서 혹시나 엉덩이를 붙잡힐까 싶어 최대한 안쪽으로 접거나 말면서 달리는 모습은 애처롭게 보이기까지 했다.

“하악! 하악! 하악! 엉덩이! 엉덩이다! 흐흐흐흐. 엉덩이가 여기 있다고……! 흐흐흐흐흐……!”

키에에엑!

이제는 음침한 웃음까지 흘려 대는 모습에 둥지는 아라크네의 울음소리로 가득 차고 말았다.

그리고.

키에엑…….

둥지의 가장 안쪽에 있던 두목 아라크네는 덜덜 떨면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여기서 가장 큰 엉덩이를 지니고 있는 것이 자신이었으니까.

곧 눈앞에 닥칠 운명이 어떨지는 불에 보듯 뻔한 것 같았다.

* * *

-30층의 죽음의 바다, 해수구 아래에 있는 진주를…….

드레스에 장식할 진주를 갖고 싶다는 말에 판트는 세 개의 층계를 전부 뒤덮을 정도로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는 죽음의 바다를 통째로 뒤엎었다.

그 때문에 해수면에는 풍랑이 휘몰아치고 용오름이 일어나는 등 자연재해가 연거푸 발생했지만…… 판트가 이를 알 겨를은 없었다.

민폐 중의 상민폐였다.

* * *

-41층에 천망신조라는 새가 한 마리 있는데 거기서…….

“음, 너무 급하게 나오느라 정확하게 어떤 부위의 깃털이었는지 기억이 안 나네.”

그냥 듣기만 했을 때는 별것 아니라고 여겼는데, 에도라가 말한 새는 족히 20여 미터는 넘을 것 같은 무지막지한 크기를 자랑했다.

그런 만큼 깃털이 많아도 너무 많아서 정확하게 어느 것을 원하는 건지를 알 수가 없었다.

화려한 부위라고는 꼬리 부근으로 한정되어 있었지만, 심미안 같은 건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는 판트가 이를 알아볼 수는 없었다.

“뭐, 상관없겠지.”

판트는 송곳니가 훤히 드러나도록 웃었다.

“그냥 다 때려잡아서 갖고 가면 되잖아?”

파아아앗!

그리고 그날, 41층의 스테이지를 거의 절반 이상 차지하고 있던 산맥 하나가 통째로 무너져 내렸다.

판트는 그 짧은 시간 동안 탑의 세계를 거의 다 돌아다니다시피 했다.

* * *

동생을 위해서 이렇게 지극정성으로 뛰어다니는 오빠가 또 어디 있을까?

‘자식. 울지나 않았으면 좋겠는데.’

판트는 감동에 젖은 얼굴로 울먹이는 에도라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 어깨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이전 시간대의 에도라는 마지막까지 그에게 ‘나이를 먹을수록 뇌까지 전부 근육으로 변해 버린 멍청이’라고 줄곧 구박만 하고 다녔었으니까.

하지만 이 시간대에서는 절대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다.

오히려 존경과 흠모가 가득한 시선으로 이 오라비를 우러러보게 될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에도라의 말이라면 꿈쩍도 못 하는 형님이니, 나한테도 더 이상 함부로 못하시겠지! 그럼 확실하게 손위 처형이 될 수 있는 거야!’

사실 판트가 이렇게 에도라를 돕기 위해 발 벗고 뛰어다니는 건 다른 시커먼(?) 속내도 있었지만.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은가?

동생도 좋고 겸사겸사 자신도 좋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인 것을.

판트의 머릿속에는 벌써부터 연우가 굴욕적인 얼굴을 한 채로 자신에게 ‘형님, 형님’이라고 부르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전통을 따지는 외뿔부족에서는 호칭과 예의에 있어 아주 엄격했다.

‘아주 좋구만. 아주 좋아. 음홧홧홧홧!’

판트의 행복 회로는 열심히 타오르고 있었다.

* * *

“……이게 다 뭔가요?”

에도라는 둘이서 긴히 중요하게 이야기를 나눌 것이 있다는 연우와 무왕을 회의실에 남겨 두고, 밖으로 나온 뒤 인상을 팍 찡그려야만 했다.

가뜩이나 아버지가 또 무슨 해괴한(?) 짓거리를 연우에게 하려 들지 몰라서 걱정되던 차였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다른 복병을 만난 기분이었다.

“항…… 의서라네.”

대장로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검지로 꾹꾹 눌러 대고 있었다.

이를 악문 채로 겨우 말을 잇는 그의 모습에서는 짙은 분노가 느껴졌다.

복도의 한쪽 벽을 가득 채울 정도로, 두루마리가 산더미를 이루고 있었다.

문제는 밖에서 다른 부족원들이 그보다 더 많은 두루마리들을 계속 조달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항의서…… 요?”

에도라는 어쩐지 등골이 싸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 판트! 그 천둥벌거숭이 같은 새끼가 아무래도 여기저기서 사고를 치고 다닌 모양이더구나.”

대장로는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손에 든 두루마리들을 아래로 하나둘씩 던지기 시작했다.

“이건 신단목이 아예 탈모라도 된 것처럼 완전히 발가벗겨져서 천계와의 신통이 영 시원찮게 되었다는 것이고.”

툭.

“이건 갑자기 28층의 바다가 완전히 메말라 버려서 더 이상 스테이지 진행이 불가능하게 되었다며 관리국에서 날아온 항의서고.”

툭.

“이건 11층의 강에 뭘 태웠는지 그걸 마신 환수들이 죄다 배앓이를 시작했다는 내용.”

툭…….

“41층 산맥이 통째로 날아가 버려서 능력치를 올릴 만한 몹이 하나도 없다는 거. 또 이건……."

툭, 툭, 툭…….

두루마리가 하나둘씩 떨어질 때마다, 에도라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하나같이 사소하다고 여길 수 없는 것들.

자연재해.

평지풍파.

판트는 탑 전역을 들쑤시고 다니면서 소란이란 소란은 죄다 일으켜 대고 있었다.

그 때문에 피해를 입게 된 플레이어와 클랜들이 한둘이 아니었고, 심지어 시련이 완전히 중단된 층계마저 생겨난 상태였다.

이대로 둔다면 정말 모든 것이 엉망이 될 판국이라, 플레이어들은 외뿔부족이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집단으로 연판장을 써서 항의를 보내오고 있었다.

심지어 관리국에서마저도 이게 대체 무슨 짓거리냐며 길길이 날뛰고 나섰으니…….

그야말로 판트 한 사람 때문에 탑의 생태계가 전부 잉망이 되어 버린 셈이었다.

‘이 인간은 대체 무슨 짓거리를 하고 싸돌아다니는 거야!’

에도라는 이런 일을 저지를 만한 사람이라곤 연우와 함께 미래에서 온 판트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알기로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상태일 텐데……!

어떻게 된 게 그 나이가 되도록 철이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더 어려진 것만 같아서 머리가 지끈거려 왔다.

‘하여간 머릿속이고 뭐고 전부 근육으로 가득해서는!’

이건 뇌가 근육인 걸 넘어서 영혼까지 죄다 근육으로 차 버린 정도가 아닌가 싶었다.

결혼하고 나서도 판트가 이런 식으로 사고를 쳐서 연우의 발목을 붙잡을까 봐 그게 걱정이었다.

부글부글!

왠지 속이 끓어올랐다.

“그리고 이건 뭔지 아느냐?”

“……뭔데요?”

어쩐지 불안감이 심해졌다.

“올포원의 실종에 대한 조사를 위해 파견되었던 77층의 선발대가 자꾸 근처에서 시끄럽게 군다고 판트가 그들을 죄다 때려눕혔다더구나.”

"……."

“하여간 누가 나유 아들 새끼 아니랄까 봐……!”

대장로는 젊은 시절에 사고란 사고는 죄다 치고 다니던 무왕을 떠올리고는 인상을 팍 찡그렸다.

왠지 당시에 뒤치다꺼리를 한 게 떠올라 화가 났다.

바로 그때.

“난! 난 억울하다고오!”

창밖이 소란스러워졌다.

판트…… 그러니까 현재 시간대의 판트가 여러 부족원들에게 붙잡혀 어디론가 질질 끌려가는 것이 보였다.

이제 막 자다 일어났는지, 입가에는 침 자국이 가득한 녀석은 정말 영문을 모른 채 억울해 죽겠다는 투였다.

미래의 판트가 저지른 일 때문에 아무런 죄 없는 그만 애꿎은 피해를 입게 된 모양이었다.

‘민폐야, 민폐…….'

에도라는 검지로 미간을 꾹꾹 눌러야만 했다.

아무래도 조만간에 대장로와 똑같은 부위에 주름이 질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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