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822화 (822/862)

22화. 외뿔 (7)

“그래서.”

말을 한 번 끊는 에도라의 얼굴에서는 깊은 화가 묻어났다.

누가 봐도 속을 가라앉히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게 전부 날 위한 거였다고?”

에도라의 앞.

판트가 선물이랍시고 내려놓은 바구니‘들’은 하나하나가 그녀가 들어가도 한참 남을 만큼 컸다.

그리고 그 속에는 ‘재료’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분명히 반 농담 식으로 말했던 드레스를 위한 재료들이!

'미친 거 아냐……? 대체 그걸 누가 진담으로 받아들이냐고!’

판트가 가져온 것들은 모두 무섭기 짝이 없는 것들이었다.

신단목의 굵은 나뭇가지, 아라크네의 방적돌기, 죽음의 바다에서도 깊은 해수구에 위치한 검은대왕조개의 진주…… 뭐, 그래. 이 정도는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치자.

하지만 트리플 헤드 오우거의 눈알이나, 데저트 원의 가시 점액 따위는 누가 봐도 아름다워야 할 결혼식에는 절대 어울리지 않는 물건들이 아니난 말이다!

그러나.

‘그래. 이 인간이 그만한 상식과 센스가 있었으면 애초에 이딴 식으로 안 굴었겠지…… 으휴.’

애당초 눈치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는 판트가 이런 사실을 알 리 만무했다.

너무 오랫동안 남들의 존경와 승배만을 받으며 살아오면서 그나마 남아 있던 눈썰미도 꽁꽁 싸매다가 시궁창에 던져 버린 지 오래인 모양이었다.

오히려 곧 에도라가 자신에게 존경에 찬 시선을 보낼 거라고 기대하는 투였다.

자, 봐라.

이렇게 오라비가 누이동생을 위해 고생을 했다.

더 많이 감동하고, 더 많이 흠모해라!

자, 어서 이 오라비의 위대함을 찬사할……!

“이 화상아.”

……게 아니었나, 응?

뭐?

화상……?

“가져올 거면 좀 제대로 가져오든가.”

에도라는 팔짱을 낀 채 시큰둥한 투로 말했다.

순간, 판트의 눈동자가 거칠게 떨렸다.

“신단목 나뭇가지…… 가져온 건 좋은데, 여기 있는 것들 왜 죄다 부러져 있어? 제대로 안 들고 와서 껍질이 벗겨진 것도 많잖아. 이래서는 모양새도 그렇고, 신력도 죄다 빠져나가서 월계관으로 만들지도 못해.”

“헉……!”

“그리고 이 방적돌기는…… 으 ……! 이딴 걸 나더러 옷감 짜는 데 쓰라고 주는 건 아니지? 멍청아?”

아라크네의 실이 고급 재료로 분류되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방적돌기의 위치가 위치인 만큼, 이 부분을 따로 분리할 때는 반드시 전문적인 공정이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바구니에 담겨 있는 것처럼 분비물이 잔뜩 묻어 쓸모가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아라크네의 체내에는 독샘도 따로 있었기 때문에 실과 만나면 녹을 염려가 있었다.

지금 판트가 가져온 게 딱 그랬다.

그게 아니더라도 이런저런 분비물로 악취가 진동해서 드레스 재료로 쓰고 싶은 마음 따윈 없었지만.

“아, 안 돼……!”

그제야 현실을 직감한 판트의 얼굴이 조금씩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거기다 깃털은…… 하아! 말도 하기 싫다. 그냥 모가지만 돌려서 가져왔네? 통째로 들고 오기만 하면 될 줄 알았니? 가죽만 멀쩡하지, 깃털들은 죄다 빠져서 쓸 수도 없잖아, 이 등신아!”

물론, 에도라의 팩트 폭격은 쉬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진주도 곳곳이 상처투성이고…… 대체 뭘 하고 다닌 거니?”

"……!"

털썩!

판트는 바닥에 주저앉으며 좌절하고 말았다.

그동안 죽어라 고생하고 다닌 보람 없이, ‘뇌 근육’에 이어 ‘등신’이니 ‘머저리’니 하는 모욕만 잔뜩 듣고 말았다.

에도라의 존경 어린 시선도, 연우가 ‘형님, 형님’ 하면서 따라다니는 광경도…… 모두 불어오는 바람에 신기루처럼 홀라당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

또 뭐가 더 남았단 거지?

판트가 흐리멍덩한 시선으로 고개를 드는데, 에도라가 턱을 높이 든 채로 판트를 노려보았다.

“이딴 식으로 곳곳에다 민폐를 끼치고 다녔는데, 내 결혼식이 제대로 축복받을 수 있겠니? 저주라도 안 퍼부으면 다행이지!”

평생 한 번뿐인 결혼식은 다른 그 무엇보다도 아주 소중하다.

만인의 축복과 축하를 받으면서 사랑하는 사람과 백년가약을 맺는 것.

그것이야말로 결혼을 앞둔 신부라면 누구나 가장 바라는 이상일 것인데…… 판트가 그걸 죄다 뒤엎어 버린 셈이었다.

이대로라면 결혼식에 참석할 사람이 거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에도라의 분노는 불길이 되어 활활 타올랐고.

판트는 자기도 모르게 동생의 기백에 눌려 움찔 떨면서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하지만.

턱!

판트는 그렇게 몇 발자국 옮기다 말고 뭔가에 부딪혀 도중에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멈춰선 그가 뒤를 돌아보니 대장로가 아주 흉흉한 얼굴로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인상이 업마나 험악하던지 흉신악살이 따로 없을 지경이었다.

고오오오!

막강한 기세는 덤이었다.

“우리 할 말이 있지?”

조금 전, 판트 때문에 피해를 입은 곳들의 보상비 산정이 대충이나마 끝났다.

아직 정확한 금액이 나온 건 아니었지만, 얼추 대략적인 예상 금액은 뽑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판트를 갈가리 찢어서 장기들을 모두 내다 팔아도 절대 감당할 수 없을 수준이었다.

판트는 어쩐지 기억 저편에 묻어 둔, 오랜 옛날에 대장로에게 맞아 가면서 혈뢰를 익혔을 때에 갖게 된 트라우마가 떠오르는 것 같아 얼굴이 창백해지고 말았다.

그리고 잠시 후.

으아아아!

판트의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마을을 가득 채웠다.

* * *

아아아악…….

“음? 판트인가? 또 무슨 사고라도 쳤나 보군. 하여간 나이를 저렇게 처먹어도 저 모양이니…… 쯧! 대체 언제 철이 들는지. 쯧쯧쯧.”

판트의 처절한 비명은 연우와 무왕이 있는 곳까지 선명하게 들렸다.

무왕은 겉보기에만 그럴듯해졌을 뿐이지, 속은 이 시간대의 판트와 비교해도 전혀 나아진 게 없는 것 같다면서 연신 혀를 찼다.

그러자 그런 무왕을 보는 연우의 표정이 아주 묘하게 변했다.

“왜 그렇게 존경 가득한 시선으로 날 보는 것이냐, 제자야?”

“……이게 존경으로 보이십니까?”

“그럼 숭배?”

“정말 스승님은 달라진 게 없으신 것 같습니다.”

“당연하지. 사람이 하루아침에 달라지면 안 돼요. 그벌 땐 오히려 의심을 해 봐야 해. 그 사람에게 무슨 이상이 생겼을지 모르거든.”

껄껄껄.

무왕은 회의실이 떠나가라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았다.

역시.

스승님의 저 뻔뻔함을 이길 방법은 없었다.

“그보다.”

그러다 무왕이 싱긋 웃으면서 화제를 다시 원래대로 돌렸다.

사실 회의실의 분위기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주 무거웠다.

대체 어떻게 자신을 되살린 거냐는 무왕의 질문에 연우가 한참의 고민 끝에 대답을 했기 때문이었다.

『…….』

영매에게서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만큼 아주 큰 충격을 받은 것일 테지.

하지만 무왕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한 얼굴이었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개운해 보이기도 했다.

“알았다. 그럼 이후에는? 어떻게 할 건지 생각해 둔 건 있고?”

“부모님을 이 시간대로 모셔 와야 하는 것도 있고 하니…… 당분간은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닐까 합니다.”

“그 말은…… 또 냅다 어디론가 사라지겠다, 뭐 그런 거냐? 감히 내 딸을 두고? 내 딸을 또 청상과부 꼴로 만들면.”

순간, 무왕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아무리 제자라고 해도 뒈진다.”

고오오오-!

막강한 기류가 실내를 가득 채웠다.

살이 찌릿찌릿하게 울릴 정도의 살기.

무왕의 뒤편에서는 보이지 않는 그림자 같은 무언가가 흉포한 이빨을 드러낸 것만 같았다.

‘오랜만에 보는군.’

연우는 그걸 보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 무왕을 만났을 때의 기분이 들었으니까.

짐승 같은 무언가.

그것을 목격했을 때, 무왕은 재미난 녀석을 만났다면서 아주 즐거워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자신을 제자로 받아들인 데에는 그때 보았던 것을 어떤 ‘가능성’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나 또한 스승님을 완전히 부활시켜 드릴 수 있다면…… 정말 제대로 된 모습으로 서게 해 드릴 수 있다면…… 그런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반드시.

‘무조건 해낸다.’

연우가 그리는 미래가 있다.

브라함과 아테나가 예지 속에서 보았다던 사진.

그것을 무슨 입이 있더라도 반드시 완성하고 싶었다.

아니, 그 속에 더 많은 것들을 채우고 싶었다.

잃어버린 사람들, 잃어야만 했던 사람들, 놓치고 말았던 사람들, 스쳐 지나갔던 사람들…… 지금의 ‘차연우’를 있게 만든 모든 사람들을.

99층계의 마지막 시련에서 자신을 이룬 신화들을 모두 조립하여 온전한 '나’를 만들었다면.

이제부터는 ‘나’를 있게 만든 수많은 인과율의 조각들을 다시 조각 모음 하듯이 딱딱 맞춰서 원래 갖춰야 할 모습으로 되돌릴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연우는 그것이야말로 자신에게 마지막 남은 시련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기만 한 초월을 완성할 단계일지도 몰랐다.

‘초월’이라는 것은 결국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뛰어넘어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난다는 뜻이었으니까.

완성(完成)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에.

피식-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고.

“웃어?”

무왕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연우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을 그로서는 연우가 자신의 말이 우스워서 웃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예. 웃었습니다.”

하지만 연우는 그런 무왕의 오해를 굳이 바로 고쳐 주려 하지 않았다.

지금 이러는 것도 재미있었으니까.

무왕과 보내는 시간 하나하나가 전부 다 재미있었다.

“진짜…… 뒈지고 싶나 보구나?”

“하실 수 있으시면 해 보시죠.”

“못할 줄 알고?”

“못하실 겁니다.”

“어제도 그렇고…… 머리 좀 굵었다고 이제 스승한테도 대드는 거냐?”

“스승님.”

연우는 무왕의 말허리를 도중에 끊으면서 도발적으로 상체를 무왕에게 살짝 숙였다.

입가에는 냉소가 걸려 있었다.

아무리 스승님이라고 해도 이제는 저한테 안 됩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언제부터 그렇게 혓바닥이 기셨습니까?”

빠직!

무왕의 이마에 십자 혈관이 잔뜩 돋았다.

“이 새끼가……?!”

무왕이 움직였다.

콰아아아앙!

그 순간, 회의실이, 아니, 회의실을 포함한 전각 자체가 폭발하고 말았다.

댕댕댕댕!

경종이 울리면서 소란은 순식간에 마을 전체로 퍼졌다.

“무, 뭐야?”

“적이라도 나타났나?”

“어디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이 감히 대형 이벤트를 코앞에 둔 우리 마을을 급습할…… 응?”

“그런 게 아니야, 멍청아!”

“그럼……?”

“카인이랑 족장이 붙었어!”

“뭐?”

“오! 오오오! 재미있겠다!”

“아, 이런 건 또 못 참지. 어디냐? 어디냐고!”

부족원들은 연우와 무왕이 겨루고 있다는 장소로 죄다 우르르 몰려갔다.

결혼 준비로 희희낙락하고 있던 그들은 계속된 돌발 이벤트에 열의마저 띠고 있었다.

역시 뭐니 뭐니 해도 세상에서 가장 재미난 것은 불구경과 싸움 구경이 아니겠는가!

“근데 이거 제대로 승부가 나려나? 족장이 좀 강해야지.”

“아냐. 꼭 그렇게 볼 건 아닌 것 같던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카인도 엄청 강해졌대. 막상막하라던데.”

“정말?”

“정말!”

“그, 그, 그럼 오늘이야말로……! 드디어……!”

“우리 족장님의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는 걸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 거지!”

“끼얏호!”

하물며 그토록 부족원들을 괴롭히기 바쁘고, 사람 같지도 않던 부족장이 혼쭐나는 광경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뜨거운 열의에 부채질을 하다못해 아예 석유통을 끼얹는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들의 기대처럼.

콰쾅! 콰콰쾅!

쿠르르, 콰르릉-

콰르르르……!

여러 부족원들이 만든 공터 쪽에서 연우와 무왕이 치열하게 한판 붙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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