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823화 (823/862)

23화. 외뿔 (8)

사실 연우는 처음 말했던 것처럼 무왕과 겨루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아무리 무왕이 대단하다고 하더라도, 당장 탈각과 초월도 이루지 못한 분이 자신을 꺾을 수는 없을 테니까.

더군다나 이 세계에 ‘종속’되어 있는 이상, 상성 때문에라도 자신을 능가할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무왕이 패배하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최대한 붙지 않으려 했지만.

‘그래도.’

연우가 자신에 대해 한 가지 간과한 부분이 있었다.

‘궁금하긴 해.’

결국 그 역시 칠혹왕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무인(武人)이었다는 것을.

비록 동생의 복수를 위해 무공에 입문하긴 했지만, 거기서 재미를 찾았기 때문에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던가.

게다가 무왕이 떠나고 난 뒤에도 연우는 한참 동안 무왕을 떠올리면서 수많은 상상 대련을 펼쳐 보곤 했었다.

그가 아는 한 이 탑의 세계에서 가장 강한 존재는 바로 무왕이었으니까.

그래서일까.

마음 한편에는 그런 마음이 있었다.

진짜 스승님이 남아 계셨더라면.

그분과 자신이 쌓은 무(武)를 겨뤄 볼 기회가 있다면.

과연 그 결과는 어떠할 것인가?

* * *

“스승님.”

콰르르릉!

연우가 가볍게 허공에다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공간이 부서지는 듯한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빛무리가 치솟으면서 땅에서부터 하늘까지 이어지는 기둥을 세웠다.

마치 저 하늘에 박힌 별이 떨어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눈부신 광경이었지만, 무왕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신기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두 사람의 목소리가 아주 선명하게 들린다는 점이었다.

주변에 잇달아 울려 퍼지는 여러 굉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아마도 두 사람이 공간의 구애를 받지 않는 경지에 다다랐기 때문일 터였다.

“왜 갑자기 불러? 왜? 지금이라도 봐 달라고 하려고?”

어림도 없는 소리.

무왕은 가볍게 콧방귀를 뀌면서 빛무리를 피해 단숨에 연우에게로 치달았다.

손날을 세우면서 허공에다 가볍게 그었다.

하지만 그건 보이는 것과 달리 절대 ‘가볍지’ 않았다.

단천.

무왕이 소호 금천의 행적을 쫓으며 만들어 낸 팔극권의 팔대 비기 중 첫 번째의 묘리가 그 속에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연우는 이것이 하늘에 맺힌 태양을 베는 것을 직접 본 적이 있었다.

이것에 당하면 머리가 쪼개질지도 모른다.

연우는 그런 위험을 느끼면서 몸을 황급히 옆으로 돌렸다.

단천의 천(天)은 단순히 '하늘’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그 공간을 둘러싼 물리적 규칙과 그 너머에 있을 세계의 섭리까지 포함하는 것이었고, 단천에는 그것을 베어 버리는 힘이 담겨 있었다.

실제로 연우의 눈에는 길게 쪽 찢어진 공간 너머로, 이데아가 빠른 속도로 붕괴해 가면서 사방으로 균열이 퍼져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짓을 잘도 저지르시는군.’

머리가 쪼개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건 절대 엄살이 아닌 것이다.

연우, 자신도 저기에 당해 버린다면 분명히 상처를 입을 테니까.

단순히 여기 있는 의신(依身)이 아닌 그 뒤에 있을 본체가 직접 타격을 입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등골이 섬뜩해질 수밖에.

그러면서도 입가에 웃음기가 저절로 번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것이.

이것이 바로 진짜 무왕의 힘이었으니까.

여태껏 연우가 무왕과의 대련에서 봐 왔던 기술과는 전혀 궤를 달리했다.

무왕은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자신을, 제자를, 드디어 동격의 대상으로 여기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그러한 사실이, 연우를 아주 즐겁게 만들었다.

돌고 돌아.

이제야 겨우.

스승님으로부터 ‘인정’을 받게 된 셈이었으니까.

그건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아주 소중한 기쁨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연우는 거기에 감정이 휘둘리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이 소중한 기회를 허망하게 날리고 싶지 않은 데다가, 소홀한 점이 단 하나라도 있다면 스승님에게 예를 다하지 못한 것이라는 걸 아주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연우는 자신이 여태 쌓아 온 무(武)를 보이고자 했다.

모든 힘을 끌어오는 짓은 할 수 없었다.

그랬다간 탑이 붕괴해 버리고 말 테니까.

하지만 신화 중에서 원하는 부분만 추출하여 의념의 형태로 구현하는 것은 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권능을 잠갔습니다!]

[칠흑왕의 신화가 잠깐 잠듭니다.]

[무(武)와 관련된 데이터를 로딩 중입니다.]

쾅, 광, 광!

차차차창-

연우와 무왕이 빠른 속도로 공방을 주고받았다.

일반인의 동체 시력으로는 도저히 쫓아갈 수 없을 속도.

평생을 무공 수련에 투자한다는 외뿔부족들도 좀처럼 따라잡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연우는 무왕의 손발과 맞부딪칠 때마다 찌르르 울려 오는 통증이 이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정신이 확 깼다.

세계에 재인식되기 시작한 이후로 여태 잠들어 있던 감각이 모조리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무왕이 저 깊은 곳에 숨어 있던 그의 무를 강제로 끄집어내고 있었다.

덕분에 연우는 자신의 무가 어떤 형태인지, 과거에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그동안 내면에 잠재 되면서 어떤 방식으로 변화했는지를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연우에게 있어서 또 다른 기연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떤 형태로 보이는 게 좋을까 했던 고민들이 단박에 날아갔으니까.

파바바박!

전혀 다르게만 보이던 연우의 동작은 어느새 무왕과 아주 많이 닮아 있었다.

손을 뻗으면 마찬가지로 손을 뻗어 맞부딪치고, 다리를 걷어차 올리면 똑같이 다리를 이용해 공격을 도중에 끊었다.

마치 두 사람 사이에 거울을 가져다 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지금 이 순간, 연우는 자신이 끌어내는 무에, 그리고 무왕이 보여 주는 무에 완전히 함몰되어 있었다.

하지만 무왕은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아주 대단하게도, 그는 전력을 다해 연우와 부딪치고 있는 와중에도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농담도 툭툭 던져 댔다.

단순히 겉보기로만 센 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이 정도는 시작에 불과하다는 뜻이었다.

그렇기에.

연우도 무왕과 똑같은 미소를 지었다.

입가에 희열이 잔뜩 묻어났다.

“설마 여기까지 와서 제가 봐 달라고 그러겠습니까?”

“그럼?”

“에도라를 위해 말씀드리는 겁니다.”

무왕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또 무슨 헛소리를 떠들려고?”

“결혼하고 나면 스승님께도 귀여운 손주들이 생길 텐데…… 명절에 손주들이 인사를 드릴 때 이가 몇 개 빠진 채로 인사를 받으시면 체면이 좀 그러시지 않겠습니까?”

“허!”

연우는 도발에 계속 도발을 얹고 있었다.

무왕은 참 어이가 없었다.

처음에야 일부러 그의 속을 긁기 위해서 깐족거렸다고 해도, 이건 숫제 아궁이에다 부채질을 하는 격이 아닌가.

“제자야. 못 본 사이에 아주 못돼졌구나?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독을 품었어.”

“글쎄요, 그런 생각은 해 보지 않으셨습니까?”

“무슨 생각?”

“그전까지 하고 싶은 말이 엄청 많지만 말할 수 없어서 억눌려 있던 게 대번 폭발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마음대로 떠들 수 있다는 건 말이다.”

휘이이잉!

무왕이 잠시 말허리를 끊었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던 공세도 도중에 끊어졌다.

마치 음소거 버튼을 누른 것처럼 갑자기 모든 소리가 꺼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귀청이 떨어지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어마어마했던 폭음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하지만 연우는 그것이 폭풍전야의 고요함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역시 똑같이 움직였다.

아니, 똑같지는 않았다.

지금까지는 무왕의 무에 함몰되면서 잠들어 있던 자신의 무를 모두 끄집어내는 데 집증했다면, 이제는 그것을 제대로 빚어내는 게 중요했으니까.

그리고.

자신이 탄생시킨 무는 딱 하나였다.

‘검뢰팔극.’

파직!

검지 끝에서부터 검고 붉은 불꽃이 스파크처럼 튀어 올랐다.

연우는 검지와 중지만 편 채로, 주먹을 말아 쥐었다.

검결지.

손에 검이 없을 때에 이를 대신하기 위해 만들어 냈던 방식.

그에게 알맞은 검은 오로지 크로노스의 비그리드밖에 없었기 때문에 다른 검을 사용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파지지지직-

뇌기가 거칠게 타올랐다.

연우는 검결지를 쥔 그대로 팔을 횡대로 그었다.

언젠가 미후왕의 허물이 보여 주었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힘이 폭발하면서 세상이 어두운 벼락 속에 잠겼다.

[최고 관리자의 권한을 이용하여 주변 공간을 탑에서부터 완전히 분리시킵니다!]

다만, 연우는 검뢰를 터뜨리기 전에 미리 자신과 무왕이 있는 공간을 외부와 단절시켰다.

자칫 피해가 마을에 가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콰르르릉!

과연 이 공격을 스승님이 막을 수 있을까?

연우는 무왕이라면 해낼 거라고 생각했다.

가이아의 저주를 안은 채로도, 아스가르드를 멸망으로 이끄셨던 분이니까.

그러니 이것은 어렵지 않게 막아 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퍼퍼퍼펑-

무왕이 지면을 거세게 밟는 순간,  파장이 동심원을 그리며 사방으로 퍼져 나가면서 주변 일대를 거세게 혼들어 놓았다.

검뢰가 날아들다 말고 도중에 파훼되었고, 그 사이로 무왕이 일격을 날렸다.

파쇄.

겉보기엔 단순한 정권 찌르기 같았지만, 연우의 눈에는 험악하게 생긴 짐승이 이빨을 들이 내미는 것으로 보였다.

연우는 적지 않게 놀라야만 했다.

무왕이 어렵지 않게 검뢰일극을 막아 낼 거라고 예상하긴 했다지만, 이건 생각보다 너무 손쉽게 해치운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니, 오히려 무왕의 손을 떠난 파쇄는 검뢰일극이 남긴 잔여 기운을 모조리 집어삼키면서 위력을 더욱 키운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연우는 검결지의 방향을 도중에 틀어 이극을 전개했다.

일극의 두 배 위력에 해당하는 공격.

이 정도면 파쇄를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콰아아아-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이극으로도 파쇄는 위력이 깎여 나가기는커녕 속도도 줄어들지 않았고, 연우는 놀란 채로 잇달아 삼극과 사극을 전개해야만 했다.

쾅! 광!

콰아아앙!

오극을 전개하고 나서야, 파쇄를 모두 없앨 수 있었다.

그 순간, 연우는 섬뜩한 느낌을 맛봐야만 했다.

아무리 자신이 대부분의 권능을 잠근 상태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검뢰 오극이라면 아스가르드도 쉽게 뒤흔들 수 있을 정도일 텐데, 대체 어떻게……?

그리고 연우의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싸움에서 한눈을 팔면 볼기짝에 불이 난다고 하지 않았던가?”

무왕이 어느새 그의 뒤에서 나타나 차갑게 웃고 있었다.

‘감각을 속였다고?’

연우는 눈을 크게 뜨면서 몸을 그쪽으로 빠르게 돌렸다.

검결지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뇌화(雷火)를 일으켰다.

검뢰육극.

이것이라면 스테이지 하나쯤은 손쉽게 붕괴시킬 수 있을 거라고, 아니, 탑에 균열을 일으킬 정도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터억!

무왕은 폭발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면에서 뚫고 들어오면서 손을 뻗었다.

뇌화를 거침없이 꿰뚫으며 연우의 오른쪽 손목을 잡아챘다.

여기서 손을 잡히면 큰일이었다.

연우는 무왕의 손길을 뿌리치기 위해서 비교적 자유로운 왼손의 날을 세워서 무왕을 찔러 들어갔고, 무왕은 오히려 몸을 더 들이밀면서 연우의 옆구리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파바바박!

눈 깜짝할 사이에 두 사람의 손과 팔이 뒤엉키면서 물고 물리는 충돌을 벌였다.

그러다 연우는 검뢰칠극을 터뜨렸고, 무왕은 체내에 있던 마력을 단박에 방출하면서 호신강기를 일으켜 공세를 도로 튕겨 냈다.

따다다다당!

쿠르릉, 쿠르릉, 쿠르르르-

콰르르르!

두 사람을 둘러싼 화염이 거대한 회오리바람을 그리면서 저 높은 허공으로 치솟았다가 사그라지길 반복 다.

실전이나 다름없는 격투 속에서.

연우는 순간 확신할 수 있었다.

‘스승님이…… 발전하고 계신다.’

조금 전 공격이라면 갓 ‘황’이 되어 아스가르드를 종말로 이끌었던 무왕이 돌아온다고 해도, 절대 쉽게 막을 수 없을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힘이었다.

그런데.

무왕은 힘들어하는 기색은 보여도, 어떻게든 막아 냈다.

대체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걸까, 연우는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여기 있는 무왕은 무왕이면서도 무왕이 아닌 존재였으니까.

불완전한 존재란 뜻이었다.

그런데도 무왕은 버티고 또 버티면서 오히려 반격까지 꾀해 왔다.

사실 이러한 모습은 언젠가 연우도 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21층.

‘그림자 도장’의 관에서 만났던 무왕의 환영이 딱 이렇지 않았던가.

분명히 시스템이 기록한 과거의 데이터일 텐데도 불구하고, 제약과 한계를 너무 손쉽게 뛰어넘었던 존재.

그러한 모습이 바로 여기서도 나타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무왕은 아주 빠른 속도로 강해지고 있었다.

불완전한 존재라고?

그게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결국 그 역시 무왕일 텐데.

무(武)의 왕(王) 말이다.

무왕은 지금 그가 지닌 제약과 한계를 모두 벗어던지고 있었다.

도저히 필멸자로서는 가질 수 없을 것 같은 너무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태어났으나, 올포원이라는 벽에 부딪히면서 억눌리고 또 억눌려야만 했던 그 천부적인 재능이.

‘연우’라는 자극제를 만나면서 폭발하고 만 것이다.

무왕은 올포원보다도 훨씬 큰 존재를 만나면서 새롭게 눈을 뜨고 있었다.

올포원이 벽이라고만 생각했던 지난 상식관과 세계관이 단번에 붕괴하고, 새로운 시야를 손에 얻게 되면서 재능도 거기에 발맞춰 마구잡이로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연우가 무왕과 겨루면서 무의 업적을 끄집어 올린 것처럼.

무왕은 연우와 다투면서 억눌렸던 무의 업적을 팽창시키고 있었다.

다른 세계에서 태어났더라면 원래 가지게 되었을 모습, 그대로!

휘휘휘휘!

[플레이어 ‘나유’가 변화를 일으킵니다!]

탈아. 무아지경. 입신. 등선. 니르바나.

뭐, 어떤 표현이라도 좋다.

지금 무왕은 황홀경에 젖어 전혀 다른 세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래서.’

연우는 여기서 자신이 어떤 포지션을 취해야 할지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무를 겨루는 것이 목적이었을 텐데, 어쩌다 보니 무왕의 경지 발전에 도움만 준 꼴이었다.

이러다가 지게 되면 쪽팔리겠다…… 그런 생각도 들었다.

‘재능충들이란.’

누구는 그렇게 생고생을 해 가면서 얻었던 것을, 또 다른 누구는 너무 손쉽게 얻는 것에 한숨을 내쉬면서도.

연우는 한껏 웃으며 손을 활짝 펼쳐 무왕에게로 덮어 들어갔다.

검뢰팔극.

이것이라면 무왕에게 더 큰 자극제가 되어 줄 수 있을 터였다.

콰르르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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