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외뿔 (9)
하지만 검뢰팔극에는 단순히 검뢰만 담겨 있는 게 아니었다.
태극혜 반고검.
언젠가 연우가 탑을 벨 때에 사용했던 것이기도 하며, 까마득한 칠흑 속에서 수많은 참오를 거듭하면서 완성을 이루었던 것.
스르륵…….
연우가 천천히 검결지를 아래로 내리그었다.
그 속도는 하품이 나올 정도로 너무나 느렸다.
마치 그를 둘러싼 시간만 느려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그렇게 느껴지기만 할 뿐.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손끝이 무왕의 머리에 닿을 때까지, 무왕은 꿈쩍도 못 했으니.
무왕은 그 속에서 또 하나의 우주를 보았다.
생과 사. 양과 음. 빛과 어둠. 불과 물. 위와 아래. 좌와 우.
그것들은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반대되는 속성을 지니고 있으나,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것이기도 했으니.
두 가지가 뒤섞이면서 돌고 돌아 이루는 것이 태극(大極)이며, 그것을 깨고 나오는 것이 바로 반고(盤古)였다.
태극혜 반고검에 대한 깨달음은 바로 거기서부터 출발했다.
기존에 갖고 있던 선입견을 버리고, 자신을 옭아매 온 섭리에서 탈출하는 것.
다만, 무왕이 그 위대한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태극혜 반고검을 얻지 못했던 것은 그 존재 자체가 섭리에 완전히 얽매여 있는 신분이기 때문이었다.
태생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이기도 했고, 존재가 가지고 있는 약점이기도 했다.
연우는 그것을 알면서도 무왕이 그토록 궁구했던 태극혜 반고검에 대한 단서를 아주 조금이라도 얻어 가기를 바랐다.
황홀경에 젖어 있는 이때.
무아경에 빠져 깨달음의 늪 속을 허적이고 있는 이때야말로 그 단서를 얻기에 가장 적합한 때가 아닌가 싶었다.
물론, 얻지 못할 수도 있다.
단순히 마음속 씨앗으로만 남을 수도 있고, 그저 잔상처럼 스칠 수도 있다.
하지만 연우는 무왕이라면 충분히 얻을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가 알고 있는 무왕은 괴물, 그 자체였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여기 계신 스승님도 마찬가지일 테고.’
아니나 다를까.
연우는 무왕의 동공 위로 일렁이는 여러 광채들을 볼 수 있었다.
빛이 명멸하기를 반복했다.
마치 거칠게 타오르던 별이 부서져 성운이 되고, 다른 성운들과 뒤섞여 새로운 별이 되듯이.
여러 깨달음이 별처럼 무수히 많이 반짝이다가 무너지고 다시 세워졌다.
깨달음은 빛이었고, 빛은 곧 별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빛은 눈가를 벗어나 이제는 그의 몸에서부터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파아아아-
마치 고운 눈이 내리듯이.
빛의 입자가 떠올랐다가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것은 보통 초월을 이룬 존재들이 자랑한다는 배광(背光)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배광은 상대로 하여금 엄숙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는 반면, 저 빛은 찬란하면서도 따뜻했다.
하지만 연우는 알았다.
저 빛이 분노를 담아 거칠게 타오른다면 세상을 집어삼킬 거대한 불꽃이 되리라는 것을.
멀리서 보는 태양은 아주 아름답고 따스하지만, 가까이 다가가게 되면 그것이 무엇이든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무왕이 바로 그러한 존재가 되고 있었다.
〈별〉.
연우는 지금 무왕을 그렇게 부르고 싶었다.
신. 혹은 악마. 또는 거인이나 용종과 같은 존재들과는 전혀 다른 길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정말이지.’
연우는 그 모습을 보면서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터무니없는 짓을 잘도 저지르신다니까.’
이쪽에서는 그저 ‘보여 드린’ 것밖 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깨달음을 얻어서 새로운 형태로 초월을 이룬다니.
참 대단하다 싶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연우는 무왕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분이 바로 자신을 키워 낸 스승님이다, 하나뿐인 아내의 아버지이다, 그렇게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을 것 같 았다.
그런 생각과 함께.
쿠쿠쿵!
검뢰팔극이 〈별〉이 자랑하던 별빛을 가리고, 태극혜 반고검이 공간을 일소(一提)했다.
* * *
“무, 뭐야?”
“뭐가 어떻게 되는 거지?”
“누가 이긴 거냐고!”
“현기증 난단 말이야. 제발 결과 좀 말해 줘!”
연우와 무왕의 대련을 지켜보고 있던 부족원들은 안절부절못했다.
그들로서도 도저히 따라잡기 어려울 만큼 맹렬한 공방전이 벌어지다가, 두 사람을 중심으로 결계가 세워진다 싶더니, 언제부턴가 그 속에는 오로지 빛의 명멸만이 남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제법 실력 좋은 부족원들은 두 사람이 벌이던 흔적들을 빠르게 쫓으면서 연신 감탄을 터뜨렸다.
자신들이 그토록 바라던 모습이 바로 그곳에 있었으니까!
무왕은 말할 것도 없었고, 연우 역시 무왕에게 절대 뒤지지 않는, 아니, 오히려 압도하는 역량을 보여 주면서 그들은 눈이 탁 트이는 듯한 기분을 맛볼 수 있었다.
그러다 연우가 태극혜 반고검을 일으키려 했을 때.
부족원들은 모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놀라기는 에도라도 마찬가지였다.
그토록 닿고 싶었지만, 닿을 수 없었던 천혜의 벽.
부족에서 수백 년의 세월 동안 극복하고자 했던 그것의 정수가 연우의 손에서 빚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폭발했다.
빛무리가 결계 내부를 가득 메우며 거친 진동이 그들에게까지 전해졌다.
결계도 당장에 부서질 듯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몇몇 부족원들은 저러다 큰일 나지 않을까 싶어 결계에 다가가려 했지만.
“모두 떨어져!”
대장로가 다급히 그들의 접근을 막았다.
만약에 결계가 폭발했을 경우, 이곳은 물론 탑이 통째로 날아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어서였다.
그만큼 결계에 가려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감지되는 힘은 머리카락이 쭈뻣 설 정도였다.
그러다 갑자기 결계가 거짓말처럼 확 사라졌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이글거리던 빛무리도 감쪽같이 꺼지고, 대신에 평온해 보이는 연우와 무왕, 두 사람만 나타났다.
“어, 어어……?"
“제대로 치고받고 싸운 거 맞지?”
“여태 보고도 모르냐? 근데 왜 둘 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지?”
부족원들은 두 사람을 보면서 눈을 동그랗게 떠야만 했다.
분명히 치열한 격전을 벌였음에도, 두 사람은 다친 곳은커녕 크게 지쳐 보이는 기색도 없이 서 있었으니까.
오히려 무왕은 한결 개운해 보이는 얼굴이기까지 했다.
뭔가를 깨달은 듯한 얼굴.
그러면서도 연우를 보는 시선에는 따스함이 묻어나 있었다.
“제법.”
그에게서는 더 이상 연우가 ‘별빛’이라고 불렀던 빛무리가 느껴지지 않았다.
태극혜 반고검을 쳐 내면서 모든 별빛을 소모했기 때문이었다.
“많이 컸구나.”
주르륵!
순간, 웃음을 지음과 함께 입가에서 핏물을 쏟아 낸 무왕이 그대로 무너졌다.
털썩.
힘없는 소리가 울린 순간, 좌중은 긴 적막에 잠겼다.
부족원들로서는 절대 패배를 모를 것 같던 무왕이 처음으로 무너지는 모습을 본 것이었으니까.
그것은 부족에게 있어 기존에 갖고 있던 상식을 송두리째 박살 내는 것과 같은 충격적인 일이었으며.
“크아아아!”
“죽이는데!”
“드디어! 족장이 무너졌다아!”
“아즈아아아!”
동시에 그동안 자신들을 그토록 못살게 괴롭혔던 못된(?) 부족장이 쓰러졌다는 통쾌한 일이었다.
그들은 괴물 같던 부족장을 연우가 대신 쓰러뜨려 줬다는 사실에 강한 대리 만족을 느낄 수 있었다.
와아아아!
환호성으로 마을이 들썩였다.
* * *
“정말 금방 돌아오시는 거 맞죠?”
“정말이다. 걱정 마.”
연우는 조금 애타는 시선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에도라를 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그동안 자신이 반려자가 될 사람의 속을 얼마나 썩였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래서 연우는 손을 뻗어 에도라의 보랏빛 머리칼을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에도라는 손길을 만끽하는 고양이처럼 나른한 업굴이 되었다.
“네게는 아주 잠깐 사라졌다가 온 게 될 테니까.”
연우는 크로노스와 레아를 모시러 가기 위해 그들이 있는 시간대로 ‘굴레’를 돌릴 참이었다.
상견례를 하기 위해서는 두 분을 모시고 와야 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그리고 에도라에게는 따로 말을 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나면 틈틈이 무왕의 ‘조각’들을 찾을 생각이기도 했다.
현재 이곳에 있는 무왕은 아직 불완전하다.
그가 가지고 있는 전능의 힘으로 어떻게든 부활시키긴 했으나, 얼마나 유지될지는 그로서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언제든 깨질 수 있을 만큼 위태롭게 서 있는 유리그릇.
그렇게 말할 수 있으리라.
다행히 무왕이 스스로 빛을 내면서 초월자인 〈별〉이 되었기에 정체성이 완전히 확립되고 이데아에도 각인되면서 당분간 깨질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그래도 빠르면 빠를수록 좋으니까.'
결국 완전하지 못한 존재란 그만큼 위태로운 법이었다.
무왕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텐데, 전혀 흔들리는 기색 하나 없는 것이 존경스립기도 했다.
자신이 만약 그의 입장이라면 태연 할 수 있을까?
연우 역시 까마득한 칠흑 속을 오랫동안 방황한 기억이 있기 때문에 무왕의 일이 남의 일처럼 여겨지지 않았다.
‘아니. 이제는 남도 아니지.’
연우의 입가에 살짝 엷은 미소가 걸렸다.
'가족.’
그랬다.
무왕은 이제 가족이었다.
사적으로는 스승이며 공적으로는 장인어른이신 분이지 않은가.
새로운 아버지란 뜻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를 도와 드리는 건 아들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그래도…… 아버지가 깨시고 나서 가시지.”
에도라는 여전히 연우를 보내기가 싫은 건지 조금 미련이 남은 목소리로 연우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연우는 그런 에도라를 한 번 끌어안아 주었다.
“일어나자마자 날 보면 뭐라고 하실까?”
그렇게 말하니 에도라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연우의 말마따나 무왕이라면 깨어나자마자 다시 한판 붙자고 길길이 날뛸 게 분명하니까.
아마 자신이 원하는 승부가 나올 때까지 계속 겨루자고 하실 게 뻔했다.
그녀가 아는 아버지는 원래 그런 분이셨으니까.
결국 연우도 무왕이 기절한 동안 도망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아!
에도라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는 이럴 때마저도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이해를 하는 것과 서운한 건 다른 차원의 일인 법.
에도라는 입술을 삐죽이면서 투덜거렸다.
“진짜, 진짜 진짜로 금방 돌아오셔야 해요.”
“알았어.”
연우는 가볍게 웃으면서 에도라를 더 세게 끌어안아 주었고.
['굴레’를 빨리 감습니다!]
조용히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홀로 남은 자리에서.
에도라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 * *
그 시각.
침대에 누워 있던 무왕이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갔군.”
무왕은 연우가 자신이 잠든 사이에 떠날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붙잡지는 않았다.
연우의 말마따나 다시 승부를 겨뤄 보자며 그를 끈질기게 붙잡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지금 떠난 연우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잘 알기에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양손을 들어 보았다.
굳은살이 탄탄히 박혀 있는 손.
다른 부족원들과 비교해도 훨씬 큰 이 손은 그동안 그가 얼마나 많은 훈련을 해 왔고, 얼마나 강한 적들을 쓰러뜨려 왔는지를 말해 주는 증거였다.
별다른 무기를 다루지 않고 몸으로 부딪쳐서 싸우는 것을 선호하는 그에게 있어서는 이 양손이야말로 검이었고, 도였으며, 창이자 방패였다.
그리고 조금 전에는 마침내 스숭을 뛰어넘은 제자와 겨뤄 본 손이기도 했다.
그가 걸어온 삶이자 길이었다.
또 한 업이었다.
결과물이었다.
그래서 무왕은 항상 자신의 이 두 손을 지극히 사랑했다.
다른 천고의 보물을 준다고 해도 이 두 손과 맞바꿀 수는 없었다.
모든 추억이 이 속에 생생하게 담겨 있었다.
온전한 자신의 것.
〈별〉이 되었을 때.
연우가 보여 준 태극혜 반고검 속의 이치를 꿰뚫어 봤을 때에 느꼈던 황홀(tt愼)도 분명히 ‘진짜’였다.
하지만.
어쩌면 그 모든 것들이 착각에 불 과하며 ‘가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심란하게 만들었다.
모든 기억이 분명하고 생생히 남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전부 ‘조작’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모든 게 부정당하는 것만 같았다.
“이봐, 마누라.”
『…….』
“믿겨져?”
『……그만해.』
“내가 졌다니까? 흐, 흐흐흐!”
『그 말만 몇 번째인지 알아?』
“참 이상하단 말이지. 이렇게 이곳에 있는 난 아주 멀쩡하잖아.”
『누가 들으면 술 마셨냐고 할걸? 한 말 또 똑같이 한다고.』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허상 같은 거라니.”
『…….』
무왕은 천장을 보면서 길게 탄식을 내뱉었다.
그의 머릿속으로 이전에 연우가 했던 ‘진실’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스승님께서.
그 말을 하는 동안.
연우의 목소리는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저는 스승님께서…… 녹턴에게 하셨던 것과 비슷한 일을 했습니다.
이곳에 있는 무왕은 진짜 무왕이 아니었다.
그가 남긴 흔적. 혹은 그림자.
21층에서 연우가 끄집어 올린 환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