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825화 (825/862)

25화. 외뿔 (10)

-나와 비슷한…… 일?

무왕은 당시에 한참 동안이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연우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뒤늦게 이해를 했기 때문이다.

영매도 전혀 생각지 못했던 답변이었는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

무왕은 처음으로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태껏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그 역시 결국 어쩔 수 없이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사실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동요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녹턴.

그가 받았을 상처 때문이었다.

자신이 그토록 숨기고 싶었고, 절대 들키고 싶지 않았던 치부. 혹은 과오.

올포원에 대한 원망으로 인해 반쯤 미쳐 있을 시절에 저지른 잘못을 제자에게 들키고 말았다는 사실이 가슴을 욱신거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연우에게 부끄러웠고, 녹턴에게는 미안했다.

녹턴이 결국 자신의 정체에 대해 알게 되며, 그 과정에서 생긴 원망과 비난이 얼마나 거셌을지.

도무지 짐작도 가질 않았다.

-예. 21층 그림자 도장에서 스승님께서 남기셨던 그림자를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이데아에 새겨져 있던 기록을 백업해서 데이터를 덧씌웠습니다.

연우는 이제 세계의 섭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바.

이 우주를 이루고 있는 모든 근간이 칠흑왕의 ‘꿈’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데아를 다루는 것쯤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연우는 무왕이 남겼던 기록들을 모두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소멸을 맞으면서 창공 도서관에서도 삭제되고 없었으나, 이데아에 남겼던 흔적들까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마저도 존재의 소멸로 인해 하나로 뭉쳐져 있지 못하고 모두 파편화되어 곳곳에 흩어져 있었지만.

그래도 연우는 전지(全知)의 권능을 발동해 모든 정보들을 끌어모으고, 데이터화하여 무왕의 그림자에다 심어 둘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게 된 것이 바로 이 시간대에 존재하는 무왕이었다.

무왕‘처럼’ 사고하고, 무왕‘처럼’ 행동하는 존재.

심지어 그는 스스로를 무왕‘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백(魏). 혹은 사념(思念)의 재탄생 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아이디어는 무왕이 올포원-비바스바트가 21층에 남겼던 기록을 끄집어내던 것에서 착안하였고, 차정우가 회중시계에다 자신의 의식을 남겼던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차정우의 사념체는 회중시계에서만 존재하고, 외부로 나와서 활동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던데 반해 무왕은 보다 더 자유롭다는 정도?

물론, 그마저도 언제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에 탈각과 초월을 유도한 것이긴 했다.

그렇게 된다면 보다 존재가 확실해질 수 있을 테니까.

설마 〈별〉이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초월자가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지만.

-사념이라……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그렇게 완벽하지도 않겠구나. 진짜였던 내가 남긴 의식이 아니라, 이런저런 데이터들을 끌어모아서 겨우겨우 기운 것이나 마찬가지니.

무왕은 초월을 이룬다고 해도 자신의 존재가 아주 불안할 거라고 내다봤다.

결국 ‘존재’라는 것은 그 근간이 영혼에 있다.

그런데 지금의 그는 내실은 없이 껍데기만 가진 인형에 가깝지 않은가.

더욱 냉철하게 보자면, 가지고 있는 자아나 사고 체계도 결국 연우가 만들어 낸 기계 장치라고 봐야 할지 몰랐다.

아무리 단단하게 한다고 해도, 결국 어딘가 이상이 생겨서 언제 무너질지 모를 모래성.

그런 상태인 것이다.

여기에 연우는 말했다.

-그래서 스승님의 영혼을 다시 만들 생각입니다.

-내 영혼을? 사라진 것을 어떻게 만든다는 거냐. 창조라도 하려고?

-그럴 수도 있을 겁니다. 최대한 비슷한 영혼을 만들어 지금의 거죽을 씌운다면…… 똑같으실 테니까요.

-하지만 그건 내가 아니지.

-예. 비숫하지만 다른 존재이실 뿐이죠.

-그럼?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방법이라고 해야 할지…… 스승님의 영혼은 완전히 소멸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는 의문에 연우는 진지하게 말을 덧붙였다.

-완전히 소멸한 게 아니었습니다. 일부에 불과하지만, 부서진 조각이 있었습니다.

-그게 그거일……!

-아뇨. 다릅니다. ‘황’이 되었던 영혼의 조각들이 흩어졌다는 뜻이니까요.

무왕은 그 말뜻이 무엇인지 와닿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평생 무공에만 집중했던 그로서는 형이상학과 관련된 지식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기까지 쫓아올 수 있었던 것도 깨달음이 깊은 덕분이지, 그 이상은 그에게도 아주 낯선 영역이었다.

하지만 영매는 달랐다.

그녀는 한평생 형이상학을 다뤄 왔고, 세계가 품고 있는 가장 깊은 비밀을 들여다 보던 현인(賢人)이었다.

-세계선의 분화를 말하는 거구나……!

-예. 정우가 이걸 노린 건 아니겠지만, 세계선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분화되고 있습니다. 평행우주, 다중우주…… 어떻게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요.

-……?

-그 세계선에는 아마 지금 스승님과 비슷한 모습을 한 존재들이 아주 많을 겁니다.

-……!

무왕은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갸웃거리다, ‘분화’가 가진 뜻을 뒤늦게 이해할 수 있었다.

‘황’이 되었던 무왕에게서 떨어져 나간 영혼의 조각.

그것은 세계선의 분화와 함께 무수히 많이 복사될 수 있었다.

각 세계선마다 조각이 하나씩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걸 전부 하나로 끌어모으는 겁니다.

-허……!

-그런다면 ‘황’이 되었던 스승님의 영혼만큼은 되지 않더라도, 얼추 지금에 맞는 영혼은 만들어 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무왕은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발칙한 것.

그런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참 용케도 잔머리를 이만큼 잘 굴렸다 싶었던 것이다.

지금은 아주 간단한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이 해답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

그리고 그 가능성을 확인해 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까.

무왕은 연우의 마음이 너무나 고마웠고, 또한 미안했다.

자신이 대체 무엇이건대 이렇게까지 고생을 하는 것인지.

조각이라…….

무왕은 긴장을 풀고 의자에 반쯤 몸을 누이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영매가 조금 다급한 어조로 연우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 조각들도 각 세계선의 변화만큼 변했을 것 아니니? 그것들을 모은다고 해서 완전히 이이가 될 수 있을까? 아니, 그것들이 과연 협조를 할 것 같니?

물론, 연우의 계획이 무조건 확실하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황’이 남긴 영혼의 조각.

말이 조각일 뿐이지, 그건 아마도 웬만한 필멸자의 영혼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클 것이다.

그것들이 어떤 형태로 존재할지는 미지수였다.

어떤 것은 환생을 겪었을 수도 있다.

하늘이 내린 천재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재능과 잠재력을 타고나 활발히 활동할 수도 있다.

어쩌면 탈각과 초월을 이뤄서 그 세계선에서는 신으로 군림할지도 모른다.

또 어떤 것은 재해로 변질되어 문명을 통째로 먹어 치우는 중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변질을 거듭하다 보면 우주의 종말을 부르는 짐승이 될 수도 있다.

무기 따위에 스며들어 신물(神物)이 될 수도 있고, 존재를 갖추지 못하고 흩어져서 영맥(靈脈)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다른 어떤 초월적인 존재와 뒤섞여서 새로운 ‘황’이 되기를 시도할 수도 있고, 어쩌면 아주 깊은 곳에 묻혀 아무런 작동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게 어떤 형태를 띠고 있을지.

어떤 성향을 갖고 있을지.

어떤 특징 을 갖고 있을지.

전혀 짐작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영혼의 조각이라는 것은 결국 자아가 없는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에 가까울 테니.

영매는 바로 이점을 지적한 거였다.

그렇게 변이에 변이를 거듭한 조각들은 지금의 무왕과는 전혀 다른 모습과 정체성을 갖고 있을 터.

그런데 그런 그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다시 무왕의 일부로 만들어 버린다?

과연 그게 가능할까?

사실 어떻게든 가능은 할 것이다.

연우는 이미 전능(全能)의 힘을 지니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변이해 버린 조각을 잘 쓸 수 있는가가 관건이었다.

무왕에게 다시 불어 넣는다고 한들, 이미 다른 사념이 잔뜩 묻었을 조각이 도리어 무왕의 존재에 해를 끼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건……!

연우가 무슨 말을 하려던 그때였다.

갑자기 무왕이 손을 뻗어 연우의 대답을 도중에 끊었다.

-그만해, 마누라.

-하지만……!

-여기까지 들었으면 궁금한 건 다 풀렸다. 이 이상 묻는 건 따지고 드는 것밖에 안 돼.

-……!

-제자가 한다잖아? 스승을 위해서. 그렇다면 그걸 믿고 지켜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

-이미 우리의 도움 없이도 이만큼 장성한 제자야. 그럼 어련히 알아서 잘하려고.

연우는 가만히 무왕을 보면서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이곳에 있는 존재가 ‘진짜’가 아닐지라도, 연우에게는 진짜처럼 느껴졌다.

말투도. 품위도.

무왕은 여전히 무왕이었던 것이다.

『남편.』

당시의 상황들을 떠올리는 무왕에게 영매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그래, 마누라?”

『또 우는소리 하면 죽여 버린다?』

움찔!

무왕은 순간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영매의 말투가 너무 차가웠던 것이다.

『너는 내 남편이야.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내 남자라고 인정한 내 남편이라고. 네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도, 어떤 형태로 있다고 해도, 내 옆에서 같이 웃고, 떠들고,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면 내 남편이라고. 알겠어?

“어, 어……."

『하여간 판트도 아니고 사람이 매번 달래 주기만 해야 해? 네가 애냐? 애야? 하여간.』

“아무리 그래도……."

판트는 좀.

『조용히 해.』

“……냅.”

『지난번에도 그랬어. 내가 아니라고 몇 번씩이나 말했었는데, 죽어도 말 안 듣더니 기어코 사고를 쳐서는…….』

무왕은 아주 오랜만에 잔뜩 쏟아지는 영매의 잔소리 앞에서 꿀 먹은 벙어리 신세가 되고 말았다.

침대에서 일어나 무릎 꿇고 벌이라도 서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무왕.

그는 탑의 세계에서 최강자라 손꼽히며 연우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한 자였지만.

화난 아내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는 이 시대의 전형적인 남편이었다.

* * *

“그럼 다른 거 하나만 묻자. 이 세계선에 있을 나의 조각은?”

연우의 설명이 끝났을 때.

무왕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그렇게 물었고.

연우는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 여기 계시지 않습니까?”

대답은 그것이면 족했다.

다행히 그래도 여기 있는 내가 완전히 허상은 아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는.

나유는.

바로 이곳에서 숨 쉬고 있었다.

* * *

책 속 하나의 챕터는 그렇게 끝났다.

“……이렇게 된 거였군.”

“어쩐지 최근에 세계선의 분화가 더 빨라진다 싶더니…… 이런 건 생각도 못 했네요.”

천마가 한 차례 숨을 고르면서 꺼낸 말에 차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선의 분화.

그리고 무수히 탄생하는 ‘황’의 조각들.

이런 건 천마로서도, 세계선의 분화를 주도했던 차정우로서도 전혀 고려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그들이 아무리 전지를 품고 있다고 해도, 이런 분야를 집중해 탐구하지 않는 이상에야 ‘알아채는’ 것이 늦을 수밖에 없었으니.

오히려 오랫동안 심연 속을 유영하며 영혼의 비밀을 엿본 연우였기에 떠올릴 수 있는 방취일지도 몰랐다.

『그럼 뭐야, 우리 인성황께서는 인성 스승님의 인성 가득한 조각들을 찾기 위해서 새로운 인성이 가득할 게 분명한 인성길을 걸으러 갔다는 거야?』

세상이 대체 어떻게 되려고……!

샤논은 그렇게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연우가 또 마음먹고 나선다면 얼마나 많은 피해자가 더 양산될지 불에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지금 이 시대에는 연우를 당적할 만한 사람도 없다는 것 아닌가?

샤논은 재앙신이라도 강림한 것처럼 두려운 마음으로 몸을 떨었다.

차정우는 그런 샤논의 과장된 몸짓에 헛웃음을 홀리다가 말했다.

“일단 부모님부터 모시러 갔다고 하니까 거기로 가지 않았을까 싶은데. 요즘 통 아래쪽에 안 내려가서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네.”

차정우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이다 다음 챕터로 이어지는 장을 넘겼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새하얀 백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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