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세샤 (1)
지금 이 순간.
가장 묘한 기분이 든 사람을 꼽으라면 녹턴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스승님이…… 환영이라.’
그도 이제 자신의 정체를 잘 알고 있었다.
21층의 환영이 아닌, 환영으로 넘겨졌던 진짜의 몸.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자신의 정체성을 손재원-비바스바트가 아닌 ‘녹턴’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아직 원래의 진실을 받아들이기에는 지난 시간 동안 겪으며 쌓인 기억과 감정들이 너무 강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금쯤 무왕이 겪고 있을 심정이 어떨지, 어떤 내적 갈등을 겪고 있을지 눈앞에 그려지는 것만 같았다.
좌절하고 싶겠지.
절망하고 싶고, 모든 걸 때려치우고 싶겠지.
어쩌면 모든 걸 뒤엎어 버리고 싶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겪어 온 모든 감정이나 기억 따위가 거짓이라는 사실에 화가 날지도 모른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고, 화를 내고 싶어도 화를 내지 못하는 상황.
그래서 분풀이 대상을 필요로 하지만, 그 분풀이가 끝나고 나면 허망함만 찾아오는 그 공허함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저만큼 태연하게 버텨 내는 것은 그것이 바로 다름 아닌 스승님이기 때문이리라.
애당초 자신과는 그릇부터 다른 분이신 것이다.
"……."
녹턴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저곳에 내려가고 싶었다.
괜찮으시냐고 한마디 말이라도 걸어 보고 싶었다.
한때는 존경했고, 또 한때는 원망하고 증오했지만, 이제는 그 모든 것을 벗어나 옆을 지켜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것은.
‘내가 아직 용기가 부족해서겠지.’
아버지, 천마는 말씀하셨다.
그동안 쌓인 오해나 감정 따위를 계속 쌓아 두기만 하면 안 된다고.
그냥 언젠가는 잊혀지겠지, 시간이 약이겠지 하는 생각 따위는 멍청한 바람일 뿐이라고 말이다.
그런 건 오히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마음 한편에 차곡차곡 쌓였다가, 어느 순간 불현듯 폭발할 수가 있었다.
그러니 그 전에 말끔히 씻어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의 생각을 들여다봐야 했다.
그렇게 앙금을 털어놔야만 미련이 남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니 녹턴도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선뜻 나설 수가 없었다.
지금 자신의 존재가 얼굴을 내비치는 것이, 도리어 스승님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드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오랜 고민이 머릿속을 잔뜩 헝클어 놓았다.
‘……그래도 가 봐야겠지.’
이야기를 해 보자.
자꾸 미루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런 생각에 녹턴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고,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백지 이후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응하면 좋을까 고민하던 이들로서는 갑자기 녹턴이 왜 저러는지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그저 천마만이 왜 그러는지 알겠다는 듯, 묘한 미소를 지을 뿐.
“마음을 정한 거냐?”
“예.”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그새 컸구나.”
장하다.
천마는 그렇게 말해 주고 싶어 하는 듯했다.
녹턴은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이고 훌쩍 자리를 떠났다.
발을 뗀 순간 포탈이 열리면서 그를 집어삼켰다.
차정우와 샤논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어색하기만 하던 두 부자 사이가 조금은 가까워졌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절대 마주칠 리 없는 평행선을 달리던 두 사람이 드디어 방향을 꺾어 만나게 된 셈이었다.
차정우는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묻지 않았다.
그저 대화가 두 사람 사이의 불신을 사라지게 만들고, 무왕의 일이 그들의 화해를 끌어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두 부자에게도 두 부자의 인생이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서 신경을 끈 차정우는 다시 연우의 인생을 쫓고자 했다.
〈별〉의 조각이라는 것을 모으러 가는 것이라면.
굳이 자신과 친마 등에게 말을 하지 않고 이렇게 조용히 사라질 필요가 있었을까?
그런 의문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오히려 내게 부탁했으면 조각을 모으기 더 쉬웠을 것 아냐?’
차정우는 모든 세계선에 걸쳐서 ‘섭리의 지배자’라는 이칭(異稱)으로 불렸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모든 것을 관장하고 관조하여 제어하는 기계신이며 인과율의 화신으로 통하는 자였다.
그렇기에 그가 단순히 의지를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각지에 흩어진 무왕의 파편들을 한데 끌어모으는 일 따위는 그리 어렵지 않을 터였다.
그런데도 연우가 숨겼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디서부터 찾아야 하지?’
칠흑왕의 의지이자 의념체인 연우를 기록하는 책자는 더 이상 아무런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연우 스스로 기록이 남지 않기를 바라며 본체와의 고리를 도중에 끊었다는 뜻이었다.
독립(獨立).
그렇게 표현하는 게 옳았다.
물론, 연우가 원한다면 칠혹왕 본체와의 연결은 언제든 수복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본체와의 연결이 끊어지면 전지와 전능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도중에 무슨 일이 발생했을 때 위험에 닥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무슨 이유가 있는 걸까?
아니면 무슨 일이라도 벌어진 걸까?
조바심이 날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부모님을 뵈러 간다고 했으니까.’
차정우는 크로노스와 레아에 대한 기록을 엿볼까 하다가, 그들의 시선에서는 연우가 월 하려는 건지 정확하게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을 바라보는 부모님의 시선이야 한없이 사랑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을 테니.
제삼자의 시선이 필요했다.
연우와 아주 가까우면서도 그를 쫓을 수 있을 만한 시선이.
……그렇게 생각하니 딱 한 명이 있긴 했다.
‘세샤.’
그런데 자신이 세샤의 기록을 엿봐도 되는 걸까?
마치 딸이 꼭꼭 숨겨 둔 일기장을 엿보는 듯한 느낌이라, 기분이 묘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딸의 개인사를 천마나 샤논과 같이 볼 수도 없는 노릇.
‘어쩔 수 없군.’
그래.
이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연우에 대한 게 있는지만 빠르게 훑어보고 덮어 버리자.
그리고 뭘 봤다는 말은 절대 하지 말고, 그냥 모른 척 있자.
만약 딸에게 남자 친구가 있다면?
‘그건 죽여 버려야지.’
차정우의 두 눈이 스산하게 빛나는 가운데.
[새로운 검색을 시도하시겠습니까?]
꿀꺽!
차정우는 마른침을 삼키면서 허공에다 손을 뻗었다.
* * *
뻑, 삐비빅! 삐비빅!
휴대폰에 설정해 뒀던 알람이 어서 일어나라면서 요란하게 비명을 질러 댔다.
귀여운 곰돌이가 그려진 파자마와 분홍색 토끼 안대를 찬 채로 숙면을 취하고 있던 세샤는 앓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일어나기 너무 싫다.
그런 생각뿐이었다.
매일 아침마다 겪는 행사였지만, 왜 이렇게 적응이 되지 않는 건지.
학교는 자유로워야 할 학생들을 강제로 가둬 두는 감옥이야, 이런 곳에 가야 하다니.
천편일률적인 사회인(이라고 쓰고 노예라고 부르는)으로 만들려는 이 사회의 음모가 분명해!
그렇게 소리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오홍홍! 그런 괴상한 항의를 하는 상상을 하실 시간에 그냥 일어나서 기지개라도 켜는 게 좋지 않을까용? 바로 저처럼 말이종.」
넌 원래 잠이라는 걸 안 자잖아!
「에이. 그럴 리가 있나용? 저는 일부러라도 하루 여덟 시간씩 꼬박꼬박 숙면을 취하려고 노력한답니당. 제 매끈매끈하고 티 한 점 없는 피부의 비결이 바로 숙면이거든용.」
바니걸 모자 좋아하는 스킨헤드 변태 피부 따왼 안 궁금하거든!
「에이. 우리 세샤 님, 또 부끄러워하신당.」
아니라고!
세샤는 언제나 자신의 그림자 속에 숨어 헛소리만 지껄여 대는 라플라스에게 제발 좀 닥치라는 말을 꺼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라플라스는 그녀의 말 따위는 전혀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쫑알쫑알 계속 시끄럽게 떠들어 대기만 할 뿐.
그 때문에 세샤는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었다.
5분만이라도 더 자고 싶은데 자꾸만 깨워 대니!
“차소영!”
그때, 큰 목소리와 함께 문이 활짝 열렸다.
아난타가 앞치마 차림을 한 채로 오른손에 국자를 들고 있었다.
“어서 안 일어나? 밥 먹고 학교 가야지!”
세샤는 덮고 있던 이불을 머리끝까지 홱 끌어 올렸다.
“나 밥 안 먹어…… 그러니까 10분만…… 아니, 5분만 좀 더……."
“무슨 소리야? 아침 안 먹으면 기력 달릴 텐데, 그 꼴로 어떻게 공부하겠다는 거니?”
“괜찮아, 그러니까……."
“국 다 식어! 어서 일어나!”
“아아앙! 싫다구우우!”
세샤는 절대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올해 열일곱.
한창 부모의 말을 안 들을 사춘기였다.
문제는 아난타도 세샤 못지않게 한 성격 한다는 점이었지만.
탐탁지 않다는 듯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진짜 안 일어날 거야?”
“아, 몰라! 몰라, 몰라.”
“그렇다, 이거지? 라플라스!”
「예이, 마님! 그 말만 기다렸습죠!」
순간, 세샤의 그림자가 커진다 싶더니 위로 불쑥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2미터에 달하는 건장한 체구에 구릿빛 근육이 아주 부담스러운 라플라스였다.
웃통은 어디로 갔는지 가슴 근육이 요란하게 들썩이고 있었고, 매끈한 스킨헤드에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라 할 수 있을 토끼 귀가 뱅글뱅글 춤을 췄다.
「귀엽고 깜찍한 토끼님 등!장!」
라플라스는 아주 익숙하다는 듯 세샤를 이불째로 번쩍 들었다.
“꺄아아악! 놓으라고오! 이 변태 토끼야!”
「오! 아주 좋아용. 절 그렇게 계속 매도해 주세용. 하악하악.」
세샤가 이리저리 발버둥 쳐 대더라도, 라플라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 집안에서의 서열은 아난타가 차정우보다도 훨씬 높다.
그렇다면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지는 불에 보듯 뻔한 게 아닌가?
라플라스는 세샤에게서 이불보를 강제로 빼앗아 버리고, 잠옷 차림 그대로 화장실에다 밀어 넣었다.
이렇게 되면 제아무리 끈질긴 잠귀신이라고 해도 확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싫어!”
그래서 세샤는 라플라스를 한껏 째려봤지만.
「오홍홍. 좋아용. 아주 좋아용. 계속 그렇게 저를 경멸해 주세용.」
"……!"
라플라스는 이미 그녀보다 한 수 위였다.
* * *
연우가 모든 던전을 거둬들이고 난 뒤.
사회는 다시 '시작의 날’ 이전으로 원상 복귀되었다.
물론, 완전한 복귀는 이뤄지지 않았다.
그동안 발전한 사회상을 하루아침에 되돌리기는 힘들었으니까.
하지만 사회는 다시 사회대로 움직였다.
그리고 세샤는 열일곱 살이 되어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지난 시간 동안에는 손꼽히는 플레이어로서 ‘아이돌’이라는 별칭도 지닐 정도로 유명했지만, 이제는 다른 또래의 친구들처럼 평범한 일상을 보내 보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그런 바람은…… 입학하고 단 한 달도 되지 않은 사이에 후회로 변하고 말았다.
‘학교에 간다고 말하는 게 아니었어.’
깨작깨작.
세샤는 심통 가득한 얼굴로 밥을 씹으면서 생각했다.
‘이렇게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걸 누가 생각이나 했겠냐구!’
플레이어 생활을 할 때에는 일찍 일어나도 크게 문제가 없었던 것 같은데.
나이를 먹어서(?) 그런 건지 체력이 몇 년 전 같지 않기도 하고, 학교가 주는 갑갑한 규칙도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학교생활은 분명히 재미있었다.
모르는 지식을 공부하는 것도 괜찮았고, 친구들이 잔뜩 생겨서 수다를 떠는 것도 재미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아침마다 사투를 벌이는 것만큼은 도저히 적응이 되질 않았다.
좀만 더 자면 좋을 것 같은데, 꾸역꾸역 아침 식사를 하고 학교를 가라는 임마도 너무했고.
탁!
“잘 먹었습니다.”
세샤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책가방을 어깨에 걸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난타는 식탁을 힐긋 쳐다보고는 설거지를 하다 말고, 황급히 세샤의 뒤를 쫓았다.
밥은 몇 술 뜨지도 않고 국은 거의 남아 있었던 것이다.
“왜 벌써 일어나? 더 먹지 않고.”
“몰라. 입맛 없어.”
쿵!
세샤가 현관문을 세게 닫고 나갔다.
강제로 깨운 것에 대한 소극적 항의였다.
아난타는 홀로 남은 현관에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대체 누굴 닮아서 저러는 건지 원.”
원체 몸이 약하던 딸이 이제 건강하게 자라는 것은 참 고맙고 좋은 일이긴 하다만.
날이 갈수록 점점 성격이 뾰족해져 가는 것이 참 서운했다.
* * *
“할아버지이이!”
“에구! 우리 공주님이 또 왜 이렇게 뿔이 단단히 나셨을까?”
세샤의 등굣길은 항상 크로노스가 직접 운전으로 학교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들 대가족이 머무는 집이 서울에서도 조금 거리가 떨어진 한적한 교외 지역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크로노스는 차에 올라타며 아양을 떠는 손녀를 반갑게 맞아 주면서도, 그녀의 볼에 바람이 잔뜩 들어가 있는 것을 보고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이 귀여운 손녀가 또 제 엄마와 아웅다웅하고는 자기한테 한풀이를 하려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딱 말투만 들어 봐도 쉽게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