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827화 (827/862)

27화. 세샤 (2)

크로노스는 운전하는 동안 도저히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으하하핫!”

“웃을 일이 아니라니까요, 할아버지!”

“하하하하핫!”

“할아버지!”

“하하, 알았다. 알았어. 흠흠.”

크로노스는 나름대로 웃음을 참아 보겠다며 입술을 꾹 깨물었지만,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것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제 딴에는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들이 너무 억울하다며 이리저리 하소연을 해 대는데…… 그 모습이 정말이지 귀여워 죽을 것 같았다.

최근 들어 크로노스에게 사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즐거움을 꼽으라고 한다면, 이제 막 무럭무럭 자라기 시작한 막내딸과 사춘기에 접어든 손녀의 성장이었다.

늘 삭막하게 살아오면서 자식들에게 이렇다 할 사랑을 나눠 주지 못한 그가 아니던가.

그렇다 보니 이전에 제대로 주지 못했던 사랑을 이 아이들에게 한창 쏟아붓는 중이었다.

물론, 육아라는 게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었다.

아이와 놀아 주는 것은 생각보다 상당한 심력을 소모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가 질풍노도의 시기에 접어들었다면?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도 이들이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지.

그 쪼그마하던 대여섯 살짜리 아이가 어느덧 성인을 목전에 두고 있다고 하니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칫.”

지금도 봐라.

대놓고 삐쳤다면서 토라져서는 얼굴을 홱 옆으로 돌리는 모습이 귀엽지 않은가.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할아버지, 할아버지’ 하면서 맨날 웃으며 따라다녔던 것 같은데.

아이는 이렇게 훌쩍 커 버린다.

“우리 공주님이 또 토라지셨구만.”

“그런 거 아니거든요!”

말과 다르게 목소리는 상당히 뾰족했다.

“어떻게 해야 마음을 다시 돌리시려나?”

“흥.”

“어디 보자…… 크로노스는 신호등에 빨간불이 들어오자, 브레이크를 꾹 밟으면서 뒷좌석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전혀 관심 없는 척하지만, 세샤의 시선이 힐끔힐끔 뒤로 향하는 것을 눈치첸 그의 입가에 웃음이 살짝 걸렸다.

“이번에 태블릿 피시 신모델이 나 온 것 같던데……."

쫑긋.

“요즘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분명히 누가 이걸 갖고 싶다고 해서 사 놨는데, 누가 그랬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단 말이지.”

쫑긋쫑긋!

“그냥 예은이에게 주는 게 나으려나? 요즘 이걸로 어린이 방송도 많이들 보는 것 같던데……."

“헤헤헤헤. 할아버지. 파란불 됐어요. 출발 안 하세요?”

세샤는 넙죽 크로노스의 오른팔에 팔짱을 끼면서 활짝 웃었다.

삐쳤다가 단번에 웃기까지.

그야말로 폭풍같은 태세 변환이었다.

뻔히 보이는 그 모습에, 크로노스도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출발해야지.”

차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근데 진짜 이걸 누구에게 준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그래.”

“저 이번에 학기 시작했잖아요. 그런데 과목별로 노트를 따로 두고 필기를 하려니까, 한 번씩 깜빡 두고 올 때도 있고, 또 어떨 때는 헷갈려서 다른 데다 필기하고 다시 정리해야 할 때도 있고…… 막 그런 거 있죠?”

“이런. 우리 공주님이 공부하는 데 불편함이 있으면 안 되지! 그럼 녹음기라도 하나 사 주랴? 아니면 노트 묶음이라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지금 지구는 21세기고, 또 전기 문명이 발달된 시대니까, 거기에 맞춰서 필기에 필요한 도구도 진화해야 하지 않을까요? 필요할 때는 그걸로 인터넷 강의도 듣고요. 네?”

“아, 그럼 학원 수강이 필요한 거구나. 다니고 싶은 학원이라도 있느냐? 전에 지나가면서 듣기로는 대치동이 꽤 괜찮다고 들었……!”

“할아버지!”

자꾸 뱅글뱅글 돌려서 말하는 크로노스가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어이쿠. 깜짝이야. 그러다 이 할애비 심장 떨어진다. 가뜩이나 심장도 약하구만.”

“신격까지 갖고 계신 분이 그렇게 말씀하셔 봐야 별 믿음 안 가거든요!”

“흐흐흐. 들켰냐?”

“칫. 이럴 때는 아빠랑 똑같다니까!”

그러면서도 세샤는 생글생글 웃었다.

“아무튼 예? 저거 저한테 입학 선물로 주시면 안 돼요?”

“저번에 이 할애비가 이미 입학 선물로 게임기를 사 줬던 것 같다만.”

“에이, 그건 생일 선물이구요. 그리고 저건 공부할 때 필요하잖아요. 네?”

크로노스는 ‘네 생일 때는 옷을 사 줬던 것 같은데’라고 대꾸하려다, 반짝반짝 눈을 빛내는 세샤를 보면서 양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사실 세샤를 위해 준비했던 게 맞기도 하고.

“그래, 네가 가져라.”

“야호! 역시 할아버지밖에 없어요. 고마워요, 할아버지.”

세샤는 태블릿 피시를 꼭 끌어안으며 신나서는 크로노스의 볼에다 가볍게 뽀뽀까지 해 주었다.

전에는 자기도 나이를 먹었다면서 더 이상 이런 애교는 절대 안 하겠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아무래도 선물이 주는 효과가 생각보다 큰 것 같아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 * *

세샤는 의자에 엉덩이를 반쯤 걸치고 앉아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태블릿 피시의 설정을 모두 정리하고 난 뒤에 필요한 어플을 받는 게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오! 새삥. 누가 준 거야? 남자 친구?”

그때, 태블릿 피시 위로 다른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입학한 뒤로 우연히 짝끙이 되어 절친이 된 박유민이었다.

“남자 친구는 무슨.”

“그럼?”

“할아버지.”

세샤의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와! 할아버지가 이런 것도 사 주셔?”

“내가 저번에 지나가듯이 갖고 싶다고 말했었는데, 그걸 기억하셨나 봐.”

“꼼꼼하기까지 하시네. 보통 할아버지가 그러기 쉽지 않은데. 역시 젊게 사셔서 그런가.”

박유민은 세샤를 교문까지 데려다 주는 크로노스를 우연히 본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크로노스가 너무 젊어 보여서 나이 차가 나는 오빠나 삼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세샤에게 할아버지라는 걸 들었을 때 크게 놀랐던 기억이 있었다.

학부모 상담 때에 오셨던 세샤의 어머니, 아난타도 마찬가지.

세샤가 플레이어로 한창 유명세를 떨칠 때 아난타도 방송을 몇 번씩 탄 적이 있어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봤을 때는 언니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화면으로 본 것보다 젊어 보이고 아름다우셨다.

세샤가 두고 간 도시락을 챙겨 왔다면서 교문 근처까지 왔던 아버지는 또 어떠신가?

부모님이 그렇게 선남선녀일 수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학교에도 이미 소문이 파다했다.

세샤가 ‘아이돌’이 된 이유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이래서 유전자의 힘이 무서운가 보다 싶었다.

“그냥 우리 할아버지가 센스가 좋으신 거야.”

세샤는 할아버지 자랑이 즐거운 눈치였다.

“우리 할아버지는 성적 어떠냐고 다그치기만 하시는데……."

박유민은 투덜거리다가 벽시계를 보면서 남은 시간을 대강 계산해 보았다.

“매점 갈 건데 같이 가실?”

세샤는 생각이 없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꼬르륵-

뱃속의 거지는 그러면 안 된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박유민이 히죽 웃었다.

“가실?”

세샤가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아주 잠깐 아난타가 먹고 가라던 밥과 국이 떠올랐다.

자신보다 더 일찍 일어나셔서 준비하셨던 걸, 제대로 먹지도 않고 투덜거리면서 나왔었는데.

어떻게 하셨으려나?

그냥 버렸을까?

아니면 아깝다며 어머니가 그냥 드셨을까.

‘……그런 건 싫은데.’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뒤죽박죽 섞어 놨다.

“응?”

“그…… 러지, 뭐.”

세샤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 * *

매점은 학교 건물 뒤쪽에 위치해 있었다.

오늘은 무슨 과자를 먹을까, 박유민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내려가던 중에 매점 앞이 평상시보다 훨씬 많이 북적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윽! 오늘따라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거야?”

“그러게. 뭐 다른 메뉴라도 파나?”

매점 가까이 왔음에도 몰린 사람은 줄어 있지 않았다.

조금 있다가 다시 와야 하는 걸까.

어렸을 때부터 워낙에 이런저런 험난한 일을 많이 겪고, 지구에 와서도 주목받는 삶만 살아서 그런지, 세샤는 사람이 북적대는 곳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박유민에게 돌아가자고 말하려는데, 박유민이 뒤꿈치를 들며 매점 안쪽을 힐끔힐끔 보다가 왜 그러는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성찬이가 저기 있네.”

“성찬? 그게 누군데?”

“어? 몰라?”

“그러니까 그게 누구냐고.”

“……와. 무신경녀. 이래서 인기가 많은 것들이란. 성찬이 앞에서는 그런 말 하지 마. 상처받을걸?”

“그게 누구냐니까?”

“정말 몰라?”

“몰라.”

“지난달에 너한테 고백했던 애, 기억 안 나?”

“한두 명이어야지.”

“……눼이눼이. 그렇겠지요.”

박유민은 순간 질린다는 표정이 되고 말았다.

분명히 박유민에게 세샤는 아주 좋은 친구였다.

겉보기에는 인형처럼 예쁜 데다가 차가워 보이는 구석이 있고, 실제로도 깐깐한 면모가 적잖게 있었다.

하지만 자신과 가까운 사람에게는 굉장히 다정해 한없이 잘 챙겨 주고, 때로는 오지랖이 너무 넓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세심한 구석도 강했다.

그러나 자신과 별 관계가 없거나, 무관하다고 생각되는 이들에게 있어서는 철저하게 무관심했다.

뭘 하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않았고, 그런 일이 있었지 않았냐고 물으면 ‘그랬었나?’하고 짧게 대꾸하기 일쑤였다.

그러고는 뒤돌아서면 금세 잊어먹었다.

호불호가 강하고, 자신이 싫은 건 죽어도 하기 싫어했다.

누가 부탁하는 것이 있으면 얼결에 해 주겠다고 할 수 있는 부분도, 딱 잘라서 거절하거나 거리를 두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다 보니 처음에는 세샤가 유명인이어서 관심을 갖고 다가왔던 아이들 중 상당수가 나가떨어지고, 지금은 친하다고 할 수 있는 무리가 박유민을 포함해서 대여섯 명을 넘지 않았다.

이런 판국이니 그녀에게 고백한 남학생들이라고 이야기가 다를까.

이미 세샤의 무신경함에 격침당한 이들이 한 반에 한 명꼴로 있었고, 혼자서 짝사랑을 하다가 제풀에 먼저 나가떨어진 녀석들까지 합친다면 트럭 한 대 분량은 나올 게 분명했다.

“하여간 성찬? 찬성? 개가 뭔데 저렇게 사람이 많은 거냐고.”

“아이돌이잖아.”

“뭐?”

“너 말고, 멍청아. 아이돌 가수라고.”

“아.”

“네가 몰라서 그렇지 재 엄청 유명해. 이번에 남미 투어 돌기 전에 학교 배경으로 방송 찍는다던데. 그거 때문에 저러나?”

세샤는 매점 안쪽을 살짝 감지해 봤다.

정말로 학생들이 둘러싼 곳에 웬 남학생이 방송 카메라를 앞에다 두고 이런저런 잡담을 떠들고 있었다.

“너는 왜 그렇게 잘 알아?”

“히히. 내 최애가 거기 멤버거든. 저번에 싸인 부탁했었는데 안 잊었겠지?”

“최애는 또 뭐야?”

“……너 할머니지?”

박유민은 ‘최애’의 뜻이 ‘최고로 애정하는 캐릭터’라는 것을 예시까지 들어가며 설명해 댔다.

“무슨 놈의 신조어가 왜 그렇게 많아? 저번에는 야민정음이니 하는 이상한 것도 말해서 사람 헷갈리게 하더니.”

“그건 네가 문찐이라 그런 거고.”

“그건 또 뭔데?”

“문화 찐따. 야. 이 말은 나온 지 한참 됐거든? 이제는 쓰지도 않아요.”

그러다 박유민이 히죽 웃으면서 휴대폰을 꺼냈다.

“내 최애 영접해 볼래?”

“됐어. 야! 됐다고!”

“그러지 말고 한 번만 봐.”

세샤는 귀찮아서 옆으로 치우려 했지만, 박유민은 이미 영상을 재생하고 있었다.

덕후에게 있어 최애를 전파하는 것만큼 전투력이 활활 불타오르게 만드는 것도 없으니까.

결국 세샤는 별 궁금하지도 않은 영상을 봐야만 했다.

팬들과 실시간으로 소통을 주고받는 라이브 방송의 녹화본이었다.

“어……? 얘?”

“어때? 귀엽지, 귀엽지? 흐! 우리 진호 오빠가 겉보기에만 이렇지, 성격은 순둥순둥한 게 아주……!”

“이진호 아냐?”

“오, 역시! 너도 아는구나! 그럼 그렇지. 우리 진호 오빠를 모를 수가……."

“작년에 방송 나갔을 때 만나서 알아.”

이 사실을 몰랐던 박유민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치, 치, 친해?"

“아니. 번호도 몰라. 그래도 보니까 수술은 잘됐나 보네.”

“……뭐?”

“수술 잘됐다고. 전에 코 한다더니 진짜 했네. 눈도 집은 거 같고. 이전이 훨씬 나은 거 같은데. 왜 이렇게 됐냐?”

“무슨 소리야! 우리 오빠는 자연인 그대론데!”

“자연인은 무슨. 인조인간이지. 또 어디 했는지 말해 줄까? 얘 작년에도 수술했었는데……."

박유민은 진혀 생각지도 못한 최애의 약점을 듣고, 동공이 더 크게 흔들리고 말았다.

와장창창.

그녀의 머릿속에 있던 어떤 환상이 마구 깨지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그러든지 말든지.

세샤는 자신에게 고백했다던 사람-기억에도 없지만-과 작년에 방송을 같이 찍었던 사람이 한 그룹이라는 사실이 신기하게 다가왔다.

세상 좁다더니 딱 그런 것 같았다.

“뭐 사 먹긴 그른 것 같으니까 다시 올라가……!”

세샤가 박유민의 팔을 잡고 다시 반으로 돌아가려는데, 갑자기 인파가 홍해 갈라지듯이 확 갈라지면서 기감으로 감지했던 남학생, 신성찬과 카메라맨이 이쪽으로 달려왔다.

신성찬이 정확하게 세샤를 보면서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와! 여기 있었구나. 소영아, 안녕? 혹시 나 보러 온 거야?”

카메라가 그의 말과 함께 세샤를 향해 돌아갔다.

세샤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

이건 또 뭐 하는 개수작이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