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828화 (828/862)

28화. 세샤 (3)

신성찬이 세샤를 만나기 전.

방송은 딱히 재미있게 뽑히는 중은 아니었다.

“컷! 이 부분은 잠깐 잘랐다가 갈 게요.”

김 PD의 말에 따라 카메라맨과 스태프들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신성찬은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김 PD 옆으로 다가갔다.

“지금 방송 잘 안 나오고 있죠?”

“뭐, 자잘한 부분이야 다 잘라 내더라도 방송이 길지 않아서 분량은 어떻게든 나오겠지. 유튜브 쪽으로 나가는 거니까 오히려 날것처럼 나가면 되긴 한데. 너 오늘따라 많이 긴장하긴 했다?”

“그러게요. 오랜만에 학교 와서 그런가.”

김 PD 의 말마따나, 요즘 아이돌 리얼 버라이어티가 한 편당 보통 10〜15분, 길어도 30분을 넘지 않을 정도로 짧은 것을 감안한다면, 사실 분량은 크게 우려할 부분이 아니긴 했다.

게다가 매끄럽지 않은 진행도 걱정할 것이 없는 게, 연예인이 긴장하는 모습을 보이면, 팬덤에서는 오히려 더 좋아하는 경우도 많았다.

공중파 방송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날것’의 묘미가 사니까.

하지만 신성찬도, 김 PD도 만족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신성찬은 2년 넘게 아이돌 생활을 하면서 찬 ‘짬밥’으로 이번 촬영분에서 그다지 살릴 수 있는 부분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김 PD는 김 PD 나름대로 잘나가던 공중파 PD를 그만두고 프리랜서가 되면서 처음으로 맡게 된 방송인 터라 잘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조바심을 느끼는 중이었다.

결국 신성찬과 김 PD는 해결책을 강구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야만 했다.

미리 짜 뒀던 콘티를 뒤져 보면서 다른 아이템을 꺼내야 하나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딱히 매점이나 학교를 배경으로 괜찮게 뽑아 볼 만한 것이 없었다.

아니면 양해를 구하고 교실에서 반 친구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찍어야 하나.

어쩌면 그게 괜찮을 수 있겠다 싶기도 했다.

신성찬의 학교생활을 궁금해하는 팬들도 꽤 많은 편이었으니까.

방향을 어떻게 잡으면 좋을지 김 PD가 고민을 하는 그때, 작가 한 명이 조심히 와서 그에게 뭐라고 귀띔을 해 주었다.

“뭐? 진짜야?”

작가가 조금 전에 확인한 사실이라며 고개를 끄덕이자, 김 PD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러고는 왜 여태 이런 좋은 아이템을 숨기고 있었냐는 듯 음흉하게 웃으면서 신성찬을 바라봤다.

순간, 신성찬은 불길한 느낌을 맛봐야만 했다.

김 PD가 저렇게 웃을 때면 멤버들 모두가 고생이란 고생을 전부 겪곤 했기 때문이었다.

“너희 학교에 ‘아이돌’이 있다며? 거기다 같은 반이기까지 하고. 왜 이런 좋은 걸 숨긴 거야?”

‘아, 안 돼!’

신성찬은 목 언저리까지 올라온 비명을 가까스로 삼켰다.

자신도 아이돌 가수이긴 했지만…… 김 PD가 말하는 ‘아이돌’이 누구를 말하는 건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차소영. 던전과 게이트가 기승을 부리던 시절, 최연소 S급 플레이어로 명망을 떨쳤던 소녀.

전 세계적으로 아주 유명한 인지도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리면서도 차갑고 도도한 얼굴을 하고 있어 방대한 규모의 팬덤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던전과 게이트가 모두 닫히고 난 뒤.

그녀는 은퇴를 선언하면서 더 이상 외부 행사를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발생한 신비주의는 여러 사람들로 하여금 차소영의 근황을 궁금케 만들었다.

최근에는 그녀가 고등학교에 입학했다는 기사가 돌면서 다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었는데.

설마 그 고등학교가 신성찬이 다니는 D고등학교였을 줄이야!

거기다 같은 반, 클래스 메이트라고 한다.

김 PD로서는 눈에 불이 켜질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신성찬은 꼭 피하고 싶었던 이름이 거론되자 표정 관리를 하기가 어려웠다.

여기서 ‘저 개한테 보기 좋게 차여서 말 걸기가 좀 그런데요.’라고 말하기도 그렇지 않은가.

김 PD야 믿을 만했지만, 다른 스태프들의 귀에 들어가면…… 이튿날 스포츠 신문의 1면에 대문짝만하게 자신의 얼굴이 실릴지도 몰랐다.

〈‘배드 보이즈’의 성찬, ‘아이돌’한테 차이다?〉

〈성찬이 ‘배드 보이즈’에서 ‘새드 보이즈’가 된 사연은?〉

뭐, 이런 타이틀 따위나 걸리겠지.

신성찬.

나이 17세.

이제 막 사춘기가 시작된 청소년으로서 그런 식으로 전 국민적 쪽팔림을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막아야 해!’

그래서 신성찬은 차소영-세샤만큼은 절대 안 된다고 말하려 했다.

그런데.

“친하지?”

김 PD가 먼저 히죽 웃으면서 선수를 쳤다.

“그게……."

“에이, PD님도 참. 그걸 질문이라고 하세요?”

아니라는 말을 조금 돌려서 대답하려는데, 작가가 도중에 끼어들었다.

“그렇지?”

“그럼요. 아무리 아이돌, 아이돌, 그러지만 성찬이도 유명인이잖아요. 당연히 유명인끼리 통하는 뭔가 있겠죠. 그렇지 않아, 성찬아?”

“그, 그러니까……."

“오. 그거 좋은데. 아이돌은 성격 어때? 정말 알려진 것처림 깐깐해? 그 나이답지 않게 생각 깊다는 말도 많이 들었는데.”

“어머. 그럼 성찬이랑 더 친할 수밖에 없겠네요. 성찬이도 좀 그런 부분이 있잖아요. 둘 다 어렸을 때부터 사회 활동을 해서 그런가.”

“그것도 그렇겠네.”

"……."

“그래서 어때? 친하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뭐라고 말하기가 참 어려웠다.

기대 가득한 업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PD와 작가를 보고 있으려니 입이 쉽사리 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거기다 다른 스태프들까지 ‘와! 우리도 그럼 아이돌 보는 거야?’라면서 저들끼리 수군덕대기까지 하니, 안 친하다고 대답하기가 힘들었다.

애당초 그는 마음이 여린 편이라 거절을 잘 못 하는 데다가, 여자아이와 친하지 않나는 질문에 아니라고 대답하기 힘든 사춘기 소년 특유의 자존심도 불쑥 치솟은 상태였다.

결국.

신성찬은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 그럼요……!”

신성찬은 어쩐지 자신이 스스로 무덤을 판 것 같다는 느낌을 받고 말았다.

* * *

불길한 느낌은 보통 잘 들어맞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세샤가 매점 근처에 있다는 스태프의 증언에 떠밀리듯이 나와서는 인사를 건넸는데…… 세샤의 표정이 딱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너, 뭐 하냐?

세샤가 친하지 않은 친구나 선배들이 말을 걸 때면 지어 보이는 특유의 표정.

별 관심 없어 보이는 저 무심한 눈빛에 쓰러진 남학생들이 어디 한둘이었던가.

'뭐, 나도 그중 한 명이었지만.’

예쁘긴 엄청 예쁘니까.

여태껏 신성찬이 활동하면서 만난 여러 여자 연예인들을 갖다 대도 절대 뒤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진짜 어쩌지…….'

한편으로는 세샤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아서 가슴이 가쁘게 뛰었다.

쿵광쿵광쿵광-

이제 자존심 때문에 던진 거짓말이 들키겠다는 생각에 등골도 쭈뻣 섰다.

김 PD와 스태프들도 뭔가 이상한 기류를 느낀 눈치였다.

200미터 전력 달리기를 한 것처럼 심장이 너무 세게 뛰고 있었다.

그런데.

“어. 안녕.”

세샤는 짧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뒤돌아 계단을 올라갔다.

절친인 박유민이 어설프게 웃으면서 이쪽으로 손을 흔들다가 세샤를 뒤따르는 것이 보였다.

“역시…… 어른들도 쉽게 말을 걸기 힘들 정도로 말이 없는 편이라더니. 진짜였어! 윤후야, 조금 전 거 찍었지?”

“예. 잘 담겼습니다. 역시 다르긴 다르네요.”

다행히 김 PD는 크게 이상하다는 생각을 안 했던지, 카메라에 녹화된 세샤의 영상에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하아!

신성찬은 그제야 안도에 찬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두근두근두근.

조금 전보다 심장 박동이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가쁘게 뛰고 있긴 했다.

다만, 지금 두근거리는 것은 조금 전과는 그 이유가 다른 것 같았다.

"……."

신성찬은 조금 전까지 세샤가 있던 계단 쪽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 * *

“너 그거 알아?”

“월?”

“아무리 봐도 넌 쿨한 게 아니라 시니컬함의 끝을 달리는 것 같아.”

“뭐래.”

세샤는 박유민과 돌아오면서 잡담을 나눴다.

“그렇잖아. 세상에 성찬이를 그렇게 매몰차게 대할 수 있는 건 세상에 너밖에 없을걸?”

“관심 없어.”

“거봐. 그런데 너 진짜 남자한테는 아예 관심도 없는 거야?”

“딱히.”

“신기하단 말이야.”

보통 이 나이 대에 가장 꿈꾸는 게 무엇인가?

연애다.

꿈도 많고 좋아하는 것도 많은 나이.

친구들끼리 이야기를 나눌 때 나오는 화젯거리도 누가 잘생겼니, 누가 괜찮니, 누가 내 취향이니 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지 않던가.

그리고 그건 박유민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이번 봄에는 기필코 잘생긴 남자 친구를 만들어서 벚꽃 축제를 같이 가고 말겠다는 의욕에 불타 있었다.

그게 안 된다면 6월 전에 만들어서 여의도 축제라도 가지 않으면 고등학교 생활이 너무 슬퍼질 것 같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박유민은 그동안 세샤가 남자 이야기를 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하굣길에 친구들과 같이 수다를 떨 때에도 가만히 듣고만 있을 뿐.

말을 꺼내는 것은 이따금 상담을 해 주는 게 전부였다.

그래서 궁금했다.

세샤가 정말 아예 관심이 없는 건지.

저렇게 남자들이 좋다고 졸래졸래 따라다니는데도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조금 전만 봐도 알 수 있잖나.

그래도 배드 보이즈라고 하면 현재 남자 아이돌 그룹 중에서는 세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고, 신성찬은 그중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막내 포지션이었다.

아마 개인 팬덤도 엄청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신성찬이 세샤를 볼 때의 눈빛은…… 제삼자의 객관적인 입장에서 봤을 때 여전히 미련이 여실히 남은 눈이었다.

“별게 다 신기하네.”

그럼에도 세샤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꾸할 뿐이었다.

사실 대답해 주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너도 탑에서 그런 일들 겪고 나면 별로 눈에 안 찰걸.’

그녀는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다른 사람들로서는 전혀 짐작하기도 힘들 유년 시절을 보내야만 했고, 그러는 동안 뜻하지 않게 정신적 성숙을 겪어야 했다.

당연히 또래의 남자아이들은 눈에 안 찰 수밖에.

세샤에게는 전부 철없는 어린아이들로만 보일 뿐이었다.

주변 환경도 마찬가지.

크로노스, 차정우, 연우.

주변에 있는 남자들이 전부 각기 한 분야에서 정점을 찍어 본 사람들이 아닌가.

게다가 다들 한 인물 하기도 하니 외적 기준도 덩달아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뭐, 우리 소영이 많이 컸던데? 카메라 돌아가니까 적당히 맞장구도 쳐 줄 줄 알고?”

“엉겨 붙지 마. 더워.”

“그럼 더 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야!”

* * *

수업이 시작되고, 맞은 두 번째 휴식 시간.

꼬르르륵.

세샤는 주린 배를 끌어안았다.

‘배고파…….'

이럴 줄 알았으면 엄마가 아침밥 챙겨 줄 때 먹고 나올 걸.

이상하게 오늘따라 더 배가 고픈 것 같았다.

딱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서 책상에다 얼굴을 붙이고 있는데.

털썩!

갑자기 책상에 뭔가가 떨어져 내렸다.

뭔가 싶어 눈을 떴더니 빵이 한가득 든 비닐봉지가 놓여 있었다.

박유민이 한심하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배가 고프면 매점을 가든가. 그렇게 엎어져서 뭐 하냐?”

“가기 귀찮아.”

“사는 건 안 귀찮고?”

“그것도 귀찮아. 근데 지금은 안 귀찮아졌어!”

세샤는 벌떡 상체를 일으키면서 비닐봉지를 이리저리 헤집었다.

이것저것 사 온 게 꽤 많았다.

세샤가 좋아하는 단팥빵도 있었다.

“어휴. 이걸 어딜 봐서 아이돌이라고 하는 건지.”

박유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단지 귀찮다는 이유만으로 배고픔을 무릅쓰다니.

배고픈 걸 딱 질색하는 그녀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또 이렇게 사다 주면 잘 먹는다.

포장지를 조심히 뜯어서 냠냠 먹는 모습이 옆에서 보고 있으면 꼭 도토리를 까먹는 다람쥐를 보는 것 같았다.

“제발 뭐 먹을 때 입에 좀 묻히지 말고 먹어라.”

박유민은 물휴지를 꺼내서 세샤의 입가에 묻은 단팥 앙금과 밀가루를 훔쳐 주었다.

세샤는 눈을 질끈 감고 있다가 손길이 떼진 뒤에야 다시 빵을 먹기 시작했다.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데 어떻게 아이돌이 됐지?”

“흥. 나도 내 앞가림 잘하거든?”

“어이구. 잘도 그러시겠네요.”

박유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자신도 빵 하나를 집어 봉지를 뜯고는 뭔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아, 맞다. 오늘 아침에 찍었던 방송 있잖아.”

“찬성이었나? 개가 찍던 그거?”

“……성찬이거든.”

“그거나 이거나.”

“팬들 보는 앞에서는 절대 그런 말 하지 마라. 뚝배기 깨진다.”

“하여간. 그건 왜? 아직도 촬영해?”

“어. 아마 야자 때까지 찍으려나 봐.”

“뭘 그렇게 찍을 게 있다고?”

“우리 학교 미스테리를 촬영할 거라던데.”

학교 미스테리?

이상하게 뭔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세샤는 그게 뭐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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