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829화 (829/862)

29화. 세샤 (4)

“미스테리? 그런 게 있어?”

세샤는 처음 들어 보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우가 깨어나면서 모든 시스템이 수거된 상황.

던전과 게이트도 완전히 닫히면서 이 지구에는 신비니 비의니 하는 것들이 많이 사라진 상태였다.

있다고 하더라도 자잘한 마법의 잔재라 할 수 있는 것들뿐.

그런 것들은 현재 각 과학 기술에 융합되어 쓰이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다 보니 흔히 '미스테리’라고 할 만한 것들은 그러한 잔재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런 건 없었어.’

학교에 잔재가 있다면 여태 세샤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세샤는 용의 피를 타고났고, 마법에 관한 한 남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시스템이 수거된 지금도, 세샤는 마법을 사용할 줄 알았다.

시스템에 근거한 스킬만 다루는 게 고작이던 다른 플레이어들과 다르게, 그녀는 애당초 아난타로부터 그 근간을 다루는 방식을 배웠기 때문이었다.

박유민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슬쩍 세샤에게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그러면서 마치 남들에게는 비밀이라는 듯이 작게 소곤거렸다.

“그렇다니까. 운동장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 알지?”

“중앙에 있는 거?”

“응. 밤 12시가 되잖아? 그럼 그게 움직인다더라?”

“……뭐?”

세샤는 두 눈을 끔뻑거렸다.

세종대왕 동상은 그녀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순신 동상과 마찬가지로 다른 학교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석상.

옥좌에 근엄하게 앉은 세종대왕 아래에 훈민정음 해례본이 활짝 펼쳐져 있는 석상이었다.

하지만 단언컨대, 그 동상은 그냥 공장에서 찍어 낸 평범한 것에 불과했다.

마법의 흔적은 절대 찾아볼 수 없었다.

“게다가 그 시간쯤 되면 음악실에서는 피아노 소리가 잔잔하게 들리고, 3층에 있는 고3 교실들에 불이 살짝 켜지면서 이상한 그림자들이 지나다니는……!”

“야.”

세샤가 말을 끊으며 인상을 팍 찡그렸다.

“애냐? 애야?”

누가 봐도 어렸을 때 TV에서 보던 만화 영화의 내용들이었다.

당시 애들 사이에서도 학교 공포담이 유행이어서 세샤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박유민이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 셨다.

“이걸 안 속네……."

“그걸 속으면 그냥 지능이 모자란 거 같은데?”

“그렇겠지? 근데 나도 웃긴 건 아는데, 이거 거짓말 아니야.”

“장난치지 말고.”

“아, 진짜라니까 그러네.”

박유민은 검지를 좌우로 까닥거리면서 말했다.

“실제로 목격자도 있어. 우리 반에도 있구.”

세샤는 뚱한 표정을 짓다 말고 조금 혹한 얼굴이 되었다.

“목격자……?”

“응. 반장이 저번에 야자(‘야간자율 학습’의 준말, 은어) 끝나고 하교하다가 집에서 공부할 책을 두고 간 게 기억나서 돌아왔었대.”

“윽.”

세샤는 순간 질린다는 얼굴이 되어 슬쩍 옆을 보았다.

1분단의 한쪽 구석에 안경을 쓴 여학생이 문제집을 열심히 풀고 있었다.

재는 남들 다 떠들고 노는 휴식 시간에도 저렇게 책을 놓지 않는구나…… 정말이지 대단하다 싶은 아이였다.

자신더러 저렇게 하라고 하면 절대 못 할 게 분명했다.

물론, 그녀가 공부에 들이는 시간 치고는 성적이 아주 좋은 편이니 그런 거겠지만.

“근데 그때가 자정이 다 되었을 때였고, 학교에 불도 다 꺼져 있었다나 봐.”

“겁도 없나……."

“그러니까. 하여간 그렇게 몰래 반으로 가려는데, 피아노 소리가 들리더래. 엘리제를 위하여? 그런 거였다던데.”

“누가 두고 간 휴대폰에서 난 소리 아냐?”

“그것까지야 모르지. 그리고 다른 반에 불이 탁! 하고 켜지더니 그림자가 일렁이는 것도 봤대. 그래서 무서워서 바로 도망쳤었고.”

“그건 그냥 도둑인 것 같은데?”

“반장이 좀 칼 같잖아. 반장도 처음에 그렇게 생각해서 이튿날에 경찰 불러서 확인해 봤었대.”

“언제?”

“너 촬영 있다고 하루 비웠던 날.”

“아, 그날? 그럼 결과는?”

“아무것도 도둑맞은 게 없었대. 심지어 불이 켜졌던 그 반은 아예 자물쇠로 잠겨 있어서 열린 흔적도 없었다던데.”

“……그건 좀 이상하긴 하네. 변태는 아니겠지?”

“그것도 아닌가 봐.”

“음.”

“그리고……."

“또 있어?”

박유민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신이 들었다는 목격담을 이것저것 늘어놓았다.

전국 대회가 얼마 남지 않아 늦게까지 운동을 하다가 귀가하던 운동부원의 목격담, 강아지 산책을 위해 운동장까지 왔던 동네 주민의 목격담, 심지어 당직을 서던 교사의 목격담도 있었다.

이쯤 되니 크게 소문이 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귀신같은 거라도 씌었나.’

세샤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감각을 날카롭게 벼렸다.

하지만 여전히 걸리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유령, 귀신, 정령…… 그와 비슷한 것들은 아무것도 감지되지 않았다.

그냥 이 학교 자체가 마나와는 연관성이 전혀 없었다.

“……너는 그런 걸 대체 어떻게 다 아는 거야?”

“히히. 재밌잖아.”

“공부를 그렇게 재미있어해 보지 그랬니.”

“조용히 해. 난 내 인생 살 거야.”

세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잠깐 고민에 잠겼다.

'진짜 따로 확인이라도 해 봐야 하나.’

만약 자신이 감지하지 못한 무언가가 이 학교에 남아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연우가 미처 회수하지 못한 던전의 잔재이기라도 한 것이라면.

그렇다면 나중에 정말 위험한 일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어떡한다?’

세샤는 따로 저녁에 혼자서 와 볼까 하고 생각했다.

뭔가 심상찮다 싶으면 가족들을 불러도 되었다.

웬만한 것이야 그녀의 선에서 충분히 정리가 가능할 테지만, 만약 미스테리라는 것이 정말 존재한다면 그녀의 감각을 속일 정도인 만큼 아주 위험할지도 몰랐다.

물론, 그게 얼마나 위험하든 간에 크로노스라면 충분히 한 손으로도 제압할 수 있을 거다.

‘그렇다고 아직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가지고 엄마나 할아버지한테 부탁하기도 그렇고.’

입단은 미스테리의 정체가 뭔지부터 알아야겠지.

‘아, 정말 귀찮아.’

세샤는 그 늦은 시간에 다시 학교를 와야 한다는 사실에 몸서리를 치다가, 문득 이야기 흐름이 여기에 닿게 된 이유를 떠올렸다.

“아, 그럼 그 미스테리인지 뭔지를 체험하는 걸 방송으로 내보낸다는 거지?”

“응. 성찬이 팬인 애들 몇몇은 그때까지 남을 모양이던데?”

“……엄마한테 등짝 스매시나 안 당하면 다행일 거 같은데, 그건.”

박유민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세샤를 보면서 짓궂게 웃었다.

“왜? 관심 생겼어?”

“몬스터 같은 게 남아 있는 거면 위험하니까.”

“오! 아이돌.”

“……제발 그 이상한 별칭으로 안 불러 주면 안 될까?”

“오! 정의의 사도.”

“내가 말을 말아야지……."

“만약에 미스테리가 몬스터인 거면 우리 소영이 오른팔에 잠들어 있는 흑염룡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거지?”

“……그런 거 없거든?”

“왜. 너 팬카페에서는 ‘우리 여신님은 옷 속에 날개를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말하던……!”

“좀 그만하라고!”

세샤는 박유민과 더 말을 나눴다간 계속 이상한 소리만 듣게 될 것 같아 빽 소리를 질렀다.

그렇다고 해서 박유민의 놀림이 끝나는 건 아니었지만.

* * *

작가가 전달한 소식에 김 PD의 얼굴에 모처럼 화색으로 돌았다.

“뭐? 그게 정말이야?”

“그렇다니까요!”

“크으! 역시 뭔가 되려니까 일이 술술 풀리는구만.”

김 PD의 격한 반응에 모든 스태프의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저 양반이 또 왜 저렇게 오버하나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때, 갑자기 김 PD가 벌떡 일어나서는 스타일리스트에게 한창 화장을 받고 있던 신성찬에게 다가갔다.

신성찬이 거울을 통해 멀뚱멀뚱하게 김 PD를 보는데, 갑자기 그가 신성찬의 양손을 덥석 붙잡았다.

“이봐, 신 군. 이따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요즘 활동기 다 되어 간다고 뭐 제대로 먹지도 못하지? 말만 해. 매니저 몰래 뭐든 시켜 줄게.”

“……그런 말씀은 매니저 누나가 안 계실 때 해 주셔야……."

매니저 김형은이 저 먼 곳에서 팔짱을 낀 채로 신성찬을 가만히 노려보고 있는 게 보였다.

“그런데 무슨 좋은 소식이라도 있으세요?”

“캬! 나는 우리 신 군이 이렇게 이 방송에 적극적인 줄 몰랐다니까? 내가 진심을 못 알아봐서 미안해.”

"……?"

신성찬은 여전히 김 PD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

그쯤 되자 김 PD도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응? 아이돌 방송 참여, 신 군이 설득한 거 아녔어?”

“소영이가요……?”

신성찬은 전혀 예상치도 못한 소식에 순진한 반응을 보였다가, 거울 속 매니저가 ‘대답 제대로 해!’하고 도끼눈을 해 보이자 순간 아차 하며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큼, 그게 저는 혹시 방송 도와줄 수 있는지 묻기만 했었거든요. 근데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아서 괜찮다고 그랬었는데…… 하하. 아무래도 소영이가 저 모르게 부탁을 들어줬나 보네요. 문자라도 한 통 주지.”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었던 거겠지. 아주 좋아, 좋아! 아이돌을 데려 오다니……! 크으! 우리 신 군. 능력자야, 능력자?”

김 PD는 신성찬의 어깨를 연거푸 두들기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때마다 화장이 엇나가서 스타일리스트가 노려봤지만, 정작 본인은 그런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상태였다.

그만큼 기쁜 것일 테지.

섭외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처럼 어렵다는 아이돌을 신성찬이 떠억 하니 데려온 것이니.

덕분에 스태프들은 바빠지기 시작했다.

인지도만 따진다면 세샤는 신성찬과 비교할 게 아니었다.

세계가 알아주는 톱스타 중의 톱스타.

그런 사람이 출연하는 만큼 소홀히 대접할 수는 없었다.

작가들은 필요한 대본을 급하게 재수정하는 한편, 카메라맨들은 본부에 전화를 넣어서 더 많은 스태프를 요청했다.

신성찬의 매니지먼트에서도 소식을 듣고 당장 인력 충원을 해 주겠다며 연락해 왔다.

이번 방송만 잘 뽑아낼 수 있다면,  신성찬과 그룹의 인지도와 이미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올라갈 게 분명했다.

이번 방송을 주도한 김 PD와 스태프진도 괜찮은 커리어를 추가할 수 있을 테고.

하지만.

정작 그 주인공이라 할 수 있을 신성찬은 그러한 기대감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있었다.

‘소영이가…….'

그의 머릿속에는 그저 한 가지 사실만 뱅글뱅글 맴돌 뿐이었다.

‘소영이가 온다……! 나를 보러!’

아기 천사들이 나팔을 불어 대고 있었다.

상상 속에서 신성찬은 이미 세샤와 결혼하고 자식은 둘이나 낳은 채로, 처가에서 가까운 곳에 집을 구해 살고 있었다.

물론.

착각은 그 혼자만의 자유였다.

착각이 큰 만큼, 그것이 깨졌을 때의 충격도 아주 클 테지만.

* * *

-엄마, 밥 먼저 먹어. 학교에 아무래도 던전 비슷한 게 나타난 것 같아.

세샤는 아난타에게 문자 한 통을 쓰고 있었다.

오늘 늦게 갈 거라고 소식은 전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마지막 전송 버튼은 누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엄마, 밥 먼저 먹어. 학교에 아무래도 던전 비슷한 게 나타난 것 같아.

그리고 그러다 입력한 세 글자.

‘그리고’. 세샤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한참 고민하다가 몇 자를 더 꾹꾹 두들겼다.

-그리고 오늘 아침 일은 미

미안해요.

죄송해요.

그 말만 쓰면 되는 건데.

왜 이렇게 어려운 건지.

아직 자존심만 강한 17세 사춘기 소녀는 부모에게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데 많이 서툴렀다.

결국 세샤는 ‘그리고’부터 시작된 문장을 모두 지운 후에 전송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그러고도 한참 동안.

세샤의 눈동자는 휴대전화를 계속 노려봤다.

잠시 뒤.

띠링!

세샤 쪽 문자의 숫자 1이 사라지면서 아난타의 답장이 도착했다.

-엄마가 안 가도 되겠니?

세샤는 잠깐 고민하다가, 재차 문자를 입력했다.

-괜찮아요.

-그래. 알겠어. 엄마는 신경 쓰지 말구. 무리하지 마. 끼니도 꼭 챙겨 먹고. 몸조심, 또 몸조심해야 하는 거, 알지? 사랑해, 우리 딸.

“하아……."

메시지를 통한 대화가 끝난 뒤. 세샤는 휴대폰을 내리면서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다른 말보다도 마지막 말이 계속 눈가를 맴돌았다.

사랑해, 우리 딸.

엄마는 아침에 그런 일이 있고도 혼내시기는커녕 딸 걱정부터 하시는데, 나는 왜 제대로 된 말 하나, 사과 하나 하지 못하는 건지.

"……난 바보야.”

세샤는 발끝으로 애꿎은 땅만 툭툭 걷어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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