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세샤 (5)
깜깜한 밤.
학생들이 모두 하교한 학교는 한적하기만 했다.
스태프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가운데, 신성찬은 저 멀리서 차소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스태프가 마시라며 건네준 따뜻한 차를 받아 들고 있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하얀 김 사이로 보이는 얼굴이 예뻐도 너무 예뻤다.
덕분에 신성찬은 다시 몸이 빳빳하게 굳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스스로가 한심했던 걸까?
언제나 신성찬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곤 하던 마음속 작은 악마가 귓가에 나타나 소리쳤다.
소영이는 너를 보러 온 거라고, 인마! 그러니까 신성찬, 정신 차려!
어깨에 힘 빡 주고! 걸음걸이도 당 당하게!
'그래! 소영이는 날 보러 온 거야! 그러니까 남자답게! 당당하게! 대쉬를……!’
용기 있는 자만이 미인을 얻는다잖아!
신성찬은 세샤가 들었으면 보는 눈빛이 더 싸늘해졌을 생각을 하면서-당연하게도, 세샤는 마음에 전혀 없는 상대가 무턱대고 들이대는 걸 제일 싫어했다-양손으로 제 뺨을 세게 두들겼다.
짝! 짝!
이를 보고 있던 매니저가 ‘이 녀석은 또 왜 지랄이야?’하는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신성찬은 다른 건 다 좋은데 이따금 혼자서 착각에 빠져 김칫국을 잔뜩 드링킹하고는 제 무덤을 파려고 삽질할 때가 많아 또 그런 건가 잘 살펴봐야만 했다.
매니저의 그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성찬은 당당하게 세샤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면서 속으로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라는 말을 계속 되뇌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다가가서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걸 참이었다.
물론, 의도와 다르게 이미 그는 티나게 바짝 긴장하고 있었지만.
꼭 고장 난 로봇이 움직이는 것처럼 삐거덕대고 있었다.
그를 먼저 발견한 것은 세샤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박유민이었다.
누가 봐도 긴장으로 얼굴에 식은땀이 가득한 신성찬을 보면서 박유민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여기는 왜 왔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너무 쉽게 읽혔기 때문이었다.
‘역시 소영이 옆에 있으면 재미있는 일이 많이 벌어진단 말이지!’
박유민은 평소 세샤 앞에서 기를 펴긴커녕 말도 제대로 못 붙이는 짝사랑남들을 구경하는 걸 아주 좋아했다.
그런 아이들을 볼 때마다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는 세샤의 반응도 즐기는 편이었고.
당사자인 세샤는 친구의 그런 취미를 두고 악취미라며 혀를 차 댔지만.
“오, 성찬이네. 안녕?”
“으, 으응…… 아, 안녕?”
신성찬은 쭈뻣대면서 손을 흔들었다.
물론, 그의 시선은 인사를 나눈 박유민이 아닌 다른 쪽을 흘깃흘깃 쳐다보고 있었다.
세샤는 신성찬이 와도 뚱한 얼굴로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간만에 마시는 거라 그런지 따뜻한 온기가 꽤 좋았다.
“소, 소영아.”
“어?”
“아, 안녕?”
“응. 안녕.”
"……."
"……."
세샤는 간단한 인사 후 다시 차를 마시기 시작했고, 신성찬의 얼굴은 우울함에 젖었다.
분명히 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꺼내야겠다고 생각했던 이런저런 화젯거리들이 지금 이 순간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냥 세샤 앞에 있으니 거짓말처럼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한 것이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라고는 ‘차 마시는 것도 참 예쁘구나’하는 쓸데없는 감상뿐.
"……."
신성찬은 얼음이 되어 버렸고, 세샤는 무관심이고.
쯧쯧.
박유민은 속으로 혀를 찼다.
저래서야 아무것도 못 하고 그냥 시간만 잡아먹겠다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재미(?)를 위해 친히 신성찬에게 조금 도움을 주기로 했다.
“야, 내가 저번에 부탁한 건?”
“응……? 부탁?”
박유민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뭐야? 잊은 거 아니지? 진호 오빠 싸인 좀 받아 달라고 그랬잖아!”
“아, 그거? 당연하지. 몇 장이나 필요해?”
“양산품 찍듯이 쓴 거 말고. 내 이름도 적혀 있지?”
“다, 당연하지……."
신성찬은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의 부탁인데 그걸 들어주지 않겠나.
무려 짝사랑녀의 가장 절친한 친구다.
직진이 안 된다면 주변 사람들의 마음부터 얻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덕분에 신성찬은 그룹 멤버를 두고 겨우 화제를 삼을 수 있었고.
박유민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자, 아주 조금씩이지만 세샤도 대화에 참여해 몇 마디를 나눌 수 있었다.
신성찬은 주먹을 꽉 쥐었다.
오늘 밤, 아주 멋진 모습을 보여서 점수를 따자!
신성찬은 그렇게 다짐했다.
그 다짐이 얼마나 잘 먹힐지는 알 수 없었지만.
* * *
“아, 이 시간까지 학교에 남아 있는 건 정말 오랜만이네요.”
“처음 아니세요?”
“그렇게 말하면 제가 너무 농땡이로 보이지 않을까요?”
김 PD가 던진 큐 사인과 함께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주 조금이지만, 세샤와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실 때문인지 신성찬의 얼굴에는 행복과 기대감이 잔뜩 묻어났다.
덕분에 촬영 내내 그가 펼치는 화술은 기름칠을 한 것처럼 매끄러웠다.
자연스럽기까지 했고.
“재는 참 단순해서 좋단 말이지.”
“뭐가?”
박유민이 그 모습을 보면서 던진 말에 세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있어. 그런 거. 어린애는 모르는.”
"……?"
세샤는 이 악마 같은 친구가 또 무슨 사악한(?) 일을 꾸미는지 몰라 미간을 살짝 좁혔지만, 박유민은 대답 없이 싱글싱글 웃기만 할 뿐이었다.
얘한테서 뭘 알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문제 있는 거지.
세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슬쩍 그림자 쪽 으로 시선을 돌렸다.
‘야, 변태 토끼.’
「하악하악! 절 더 그렇게 매도해 주세용! 너무 좋아용! 주인님에 이어서 세샤 님까지……! 차씨 집안 분들의 매도는 저를 엔돌핀과 아드레날린의 세계로 초대하는 거 있죵? 하악하악하악.」
세샤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럴 때는 재빨리 화제를 돌리는 게 좋았다.
‘년 아니지?’
「홍홍홍홍! 제가 변태인 건 사실이고, 한번 해 볼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생각 뿐이었어용. 단 한 시도 세샤 님의 그림자에 서 벗어난 적은 없답니당. 그랬다가 주인님한테 걸리면 그냥 삭제되거든용.」
연우의 명령이 있어 절대 호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그럼 뭐, 따로 느껴지는 건 없어?’
「사실 세샤 님이 그 얘기를 듣고 난 뒤부터 저도 정말 구석구석 돌아다녔는데 말이종.」
‘그랬는데?’
「없어용. 깨끗해용. 아〜주.」
‘……그래?’
역시.
그냥 단순한 소문에 불과했던 걸까.
라플라스가 그렇게 찾아다녔는데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는 건 미스테리라는 건 없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었다.
자신 앞에서야 늘 저런 식으로 헤픈 모습만 보여 준다지만.
라플라스는 명색이 ‘밤’을 지배한다는 여덟 명의 존재 중 하나에 당당히 그 이름을 올리고 있었으니까.
타계의 신들이 모두 연우에게 복속한 이상, 이 세상에 녀석의 감지를 피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이상해용.」
이어지는 말에 세샤는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깨끗하다면서?’
「오홍홍홍. 세샤 님도 참, 순진하셔라. 말 그대로 깨끗하다고요. 마치 누가 말끔하게 치우기라도 한 것처럼용.』
"……!"
「세상에 그렇게 깨끗한 게 어디 있어용? 던전이 열리지 않은 곳이라고 해도, 마나는 어디든 흐르기 마련이고, 사람들의 사념도 혼적처럼 묻어나용. 하물며 수백 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하루에 절반 이상을 머무는 곳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게 말이나 될까용?」
'…….'
「인간이 내뿜은 사념은 서로 뭉치는 성질이 있어용. 행복과 사랑 같은 플러스 감정들은 플러스 감정들끼리, 분노나 우울함 같은 마이너스 감정들은 마이너스 감정들끼리 뭉쳐서 하나의 ‘씨앗’이 되어용.」
우리는 그중에서 바로 그 마이너스 감정들을 먹어 치우고 말이종.
라플라스는 그렇게 덧붙였다.
「‘시작의 날’이 되기 전부터 지구에는 각 학교마다 비슷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괴담들이 기승을 부렸다고 했지용?」
‘……맞아.’
「그건 아마 진짜일 거예용. 원래 어린 학생들의 사념은 아주 강렬한 편이니까용. 게다가 한국 학교를 생각해 보면…… 더 그렇지 않아용?」
공부를 거의 안 하다시피 하는 세샤가 그렇다고 긍정하기 뭣하긴 하지만.
확실히 대한민국의 교육 시스템은 비판할 구석이 많은 편이었다.
회색 콘크리트 건물.
강제성을 주는 교복과 각종 규율.
자율성을 찾기 힘든 교육 편제.
밤까지 강제로 붙들어 놓는 야자.
입시. 수시. 수능. 공부. 스트레스.
때로는 학교 폭력 논란이 일어날 정도로, 학생들 사이에 서열화도 이뤄지고 있다.
힘이나 성적. 혹은 집안 환경.
그런 것들에 따라 계급이 나뉘는 것이다.
분명히 또래의 친구들과 어울리는 건 재미있다.
하지만 그것은 억압에서 겨우 찾는 일말의 유희일 뿐.
나머지는 모두 딱딱하고 칙칙하다.
그런 분위기에서 나오는 사념(思念)들이 긍정적일 수는 없다.
불안. 혼란. 우울. 분노. 격노. 슬픔…… 부정적인 것들은 서로 뭉치고 뭉쳐 결국 사념(邪念)이 되고 만다.
그리고 무게를 가지게 된 사념은 올라가지 못하고 아래로 가라앉는다.
바닥에 차곡차곡 쌓이다가, 결국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학교 전체를 뒤덮어 버리고 만다.
괴담은 그래서 탄생하게 된다.
학생들이 미처 발산하지 못한 원한과 분노가 모두 학교에 투영되기 때문이었다.
「흔히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을 떠올리면 무슨 생각이 드시나용? 아주 즐겁고 행복한 장소라는 이미지가 있지용. 하지만 학교는 어떻종?」
‘반대지.’
「맞아용. 괴담이 괜히 생기는 게 아니라니까용? 문제는 괴담이 그냥 괴담으로 끝나지 않고, 학생들이 장난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럴듯하다’ 혹은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 게 되면…….』
‘신앙이 된다?’
「맞아용! 바로 그거예용. 신앙은 그렇게 아주, 아아아아주우우우 자그마한 곳에서부터 시작되는 법이랍니당. 물론 그냥 그저 그런 신앙은 언젠가 사라져 버리겠지만, 만약 그 신앙이 계속 커지다 결국 신성을 깨우게 되면.」
라플라스는 말을 잠시 끊었다가, 히죽 웃음소리를 냈다.
세샤는 어쩐지 그것이 조금 무섭게 다가왔다.
마치 라플라스가 품고 있는 어떤 마성을 엿보는 기분이었다.
세샤의 그림자가.
토끼의 형태가 되었다가, 곧 입술 사이로 잔혹한 톱니 이빨을 훤히 드러냈다.
「괴담의 주인공은 자아를 갖게 되지용. 그때부터 활동을 시작하게 되는 거예용.」
다행히 세샤를 두렵게 만들었던 토끼 그림자는 원래대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너를 속일 수 있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
「맞아용. 그게 바로 문제예용.」
흐으으음.
라플라스는 앓는 소리를 냈다.
「갓 태어난 괴담…… 그러니까 요괴쯤이야 제대로 된 사고도 못 할 테니 본능에 미쳐 있거든용. 저를 먼저 발견해서 도망친다고 해도 제가 모를 수가 없어용. 감쪽같이 흔적을 지우고 다닌다는 건 더 말이 안 되고 말이종.」
‘그럼 여기 있는 게 괴담이 아닐 수도 있다?’
「일단 두 가지로 가정하고 있어용. 외부에서 만들어진 요괴 같은 게 사념이 탐나서 홀러들어온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여기서 만들어진 어린 요괴가 어떤 ‘기연’을 만나.」
라플라스의 목소리에 살짝 날이 섰다.
「진화했을 수도 있구용.』
‘기연? 가령 어떤 거?’
「글쎄용. 저야 모르종. 그걸 확인하러 온 거잖아용?」
세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라플라스의 말이 맞았다.
확인하러 왔으니 직접 확인을 해 봐야겠지.
한편으로는 이 시간에 여기로 온 게 헛된 발걸음이 아니었다는 생각에 다행이다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대체 그 요괴라는 것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활동하는지를 알 수가 없어 추측이 어려웠다.
어떤 흔적이라도 남아야 정체 추론이 가능할 텐데.
그런 것이 전혀 없으니 아무것도 알 수가 없어 대비를 하기도 어려웠다.
「홍홍홍홍. 그래도 너무 걱정 마세용. 아무리 특이한 놈이라고 해도 어떻게 세샤 님을 해코지할 수는 없을 테니까용. 이 귀엽고, 깜찍한 토끼만 믿어 주시면 된답니당.」
‘괴상하고 변태인 토끼겠지.’
「하악하악하악!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그 싸늘한 목소리로 똑같은 말을 해 주세용!」
‘……싫어.’
「제발요오오오오옹! 넹? 넹? 네에에에엥?」
세샤는 귓가에서 쉬지 않고 ‘하악하악’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도저히 학교 쪽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진짜 이번 일만 끝나면 할아버지나 아버지에게 부탁해서 이놈을 떼어 달라고 하든가 해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바로 그때.
댕, 댕, 댕-
12시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탁!
음악실 쪽에 불이 켜졌다.
세샤는 물론, 방송을 찍던 신성찬과 스태프들의 시선도 똑같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 ♪ ♪ ♬
아주 작지만, 피아노 연주 소리가 잔잔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엘리제를 위하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