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세샤 (7)
분명히 잡아먹을 거라더니.
먹긴 먹었다.
무대를 먹어서 그렇지.
짝짝짝짝!
라플라스는 마치 대회에 나선 보디빌더처럼 이리저리 포징(Posing) 을 계속해 댔다.
구릿빛으로 빛나는 근육들이 아주 힘차게 꿈틀거리더니, 가슴 근육이 마치 피아노 건반처럼 크게 들썩였다.
그럴 때마다 인형들과 동상들은 모두 스타를 만난 팬처럼 요란하게 박수를 쳐 댔다.
성대가 없어 소리를 내지 못할 뿐이지, 환호성을 지르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는 녀석들도 있었다.
……저 관심종자 변태를 어떻게 하면 좋지?
세샤는 당장에라도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저 꼬락서니를 다른 사람들이 보기라도 하는 날에는……!
“……소영아?”
세샤는 생각을 잇다 말고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자다가 깬 고양이처럼 허리를 쭈뻣 세우고 말았다.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니, 박유민이 묘한 얼굴로 변태 토끼와 귀신들을 보고 있었다.
‘까, 깜빡 잊고 있었어…….'
변태 토끼 때문에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박유민은 평범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아주 겁이 없다는 것.
그리고 호기심이 많아서 여기저기를 잘 들쑤시고 다닌다는 것.
그 때문에 세샤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대부분 갑(甲)으로 통하는데도 불구하고, 박유민에게는 항상 을(Z)이 되는 편이었다.
그녀의 짓궂은 장난에 이리저리 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저분……!”
“난 모르는 사람이야!”
“응? 하지만 네 그림……."
“하, 하하하. 무, 무, 무슨 마, 말인지 모르겠네? 하, 하, 하. 자, 잘못 보, 본 거겠지. 하, 하하하하.”
박유민이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세샤는 황급히 말허리를 끊어 냈다.
그러면서 횡설수설. 어색하게 웃는 모습이…… 참 로봇 같았다.
이렇게까지 연기를 못할 수가 있나, 본인 스스로가 느낄 정도로.
'망했다. 내 현생은 저 변태 토끼 때문에 망한 거야.’
세샤는 박유민의 두 눈이 가늘게 떠지는 것을 보면서 낙담했다.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한 얼굴.
저런 표정을 지을 때의 박유민은 항상 무섭다.
여기서 어떤 핑계를 대 봤자 통하지 않을 테지.
『따흑흑흑.』
문제는 가뜩이나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다가 변태 토끼가 기름을 확 끼얹고 있다는 점이었다.
『너무하셔요, 서방님. 소녀에게 사랑을 말씀하실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소녀가 질렸다고 버리시는 거와요?』
라플라스는 양손을 뒤통수에 갖다 대고 복직근의 왕(王)자를 드러내 보이면서 되도 않는 헛소리를 투척했다.
굵직한 중저음으로 간드러지는 목소리를 내는 꼬락서니를 보고 있으려니…… 정말이지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닥쳐!”
『흑흑흑. 이제는 욕까지 하시는 것인가요? 소녀, 가녀린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입었사와요.』
등에 성난 혈관을 보이며 상완이두근을 잔뜩 뽐내면서 그딴 말을 해 봤자 귀에 제대로 들어올 턱이 없었다.
“닥치라고! 그리고 누가 소녀라는 거야! 생긴 건 뻑다구도 물어뜯게 생겨 놓고서는! 너 성별도 없잖아!”
『어맛. 그것이야말로 외모지상주의의 폐해이와요. 소녀는 슬프답니다. 소녀는 서방님을 그렇게 키우지 않았사와요.』
“아아아악! 서방 소리 그만하라고!”
세샤가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소리를 지르는 와중이었다.
“저, 저게……?”
“히이이익! 귀, 귀신들!”
“귀신이 너무 많아!”
“저, 저, 저건 변태 아냐?”
뒤늦게 복도로 나온 신성찬과 스태프들은 모두 놀란 얼굴이 되어 있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신성찬은 침을 꼴깍 삼키면서 다급하게 앞으로 나섰다.
‘소영이를 구해야 해!’
저 정체 모를 귀신들이 세샤를 해칠지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지배했다.
특히 저 토끼 머리띠를 한 빡빡이 외국 아저씨(?)는 위험해도 너무 위험해 보였다.
타닥!
신성찬이 마른침을 삼키면서 세샤 앞을 가로막았다.
"……?"
"……?"
세샤와 박유민이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릴 때.
“소, 소영아! 여, 여, 여기는…… 내, 내가 마, 마, 막을 테니까, 도, 도, 도망쳐!”
신성찬이 한껏 비장한 얼굴로 소리쳤다.
후들후들!
저대로 뒀다가 와르르 무너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떨리는 다리만 뺀다면 꽤 그럴듯했다.
얘 혼자서 무슨 영화라도 찍는 걸까.
문제는 김 PD를 비롯한 스태프들이 이런 장면을 찍기 위해 열심히 카메라를 돌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카메라, 어서 카메라 돌려! 저것들 분명히 몬스터일 게 분명해! 아이돌의 싸움을 볼 수 있는 귀한 순간이라고! 그런 아이돌을 지키려는 신성찬! 꽤 괜찮은 컷이 나올 거야!”
보통 이런 광경을 보고 이렇게 말 하지 않던가?
개판이라고.
'울고 싶다, 정말.’
세샤는 양손으로 얼굴을 덮고 말았다.
더 이상 얼굴을 들고 다닐 자신이 없었다.
쪽팔려 죽을 것 같았다.
저 망할 놈의 변태 토끼 때문에 일상이며 사회생활까지 모두 한순간에 박살 나고 만 것이다.
저딴 변태 소환수를 기르는 플레이어 ‘아이돌’이라…….
그동안 나이가 어리다고 함부로 해대는 사람들을 차단하기 위해서 차갑고 도도한 이미지를 계속 유지해 왔던 것인데.
아무래도 뜻하지 않게 태도를 바꿔야 할 모양이었다.
“다들 위험하니까 너무 가까이 붙지 마시고 일단 물러나세요.”
그때, 짓궂게 세샤를 보고 있던 박 유민이 스태프들을 반대쪽으로 몰기 시작했다.
“어? 어어? 하지만 지금 몬스터 레이드를 찍어야……!”
“그러다 다치고 싶어서 그러세요? 일반인들은 레이드 현장 근처에 가 면 안 된다는 법도 있잖아요. 그거 어겼다간 잘못하면 징계 드실 텐데 괜찮으세요?”
“그, 그건……!”
“야! 신성찬! 너도 위험하니까 어 서 와!”
“하지만 소영이가……!”
“너 한 트럭 갖다 놔도 소영이 하나 감당 못 할 거거든! 방해만 되니까 와! 안 그러면 진짜 앞으로 국물도 없을 줄 알아!”
신성찬은 섣불리 발을 떼지 못하고 세샤와 석상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박유민이 도끼눈을 뜬 채로 ‘씁!’하는 표정을 짓자, 어쩔 수 없이 물러나야만 했다.
스태프들도 그제야 몬스터들에게 당할 수 있다는 게 떠올랐는지, 얼결에 박유민에게 떠밀려 자리를 옮겼다.
그러면서 박유민은 세샤에게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유, 유민아……!’
감동에 젖은 세샤의 눈시울이 살짝 붉어지려는데.
박유민의 입술이 들썩였다.
-아. 이. 스. 크. 림. 한. 달.
공짜가 아니란 뜻이었다.
세샤는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 박유민이 뭘 사 달라고 한들 질릴 때까지 사 줄 용의가 있었다.
결국 사람들이 박유민에 의해 음악실로 다시 돌아간 그때.
세샤는 앙칼지게 눈을 뜨면서 홱 하고 라플라스 쪽을 노려보았다.
‘진짜 뒈졌어, 변태 토끼.’
휘리리릭!
세샤는 언젠가 아버지한테서 받았던 무기를 꺼냈다.
항상 오른쪽 손목에 착용하고 다니던 팔찌가 마치 비단처럼 한 올 한 올 풀리면서 흐느적대며 바닥에 떨어졌다.
장장 2미터에 달하는 크기의 연검.
다루기가 아주 까다롭기로 유명한 이것은, 탄성 때문에 마구잡이로 휘어져 궤도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기병이었다.
하지만 세샤는 이미 아난타에게서 병장기를 다루는 기술을 배운 데다가, 이 연검은 아버지를 상징하는 드래곤 슬레이어와 같은 재질로 되어 있어 소유자의 인식을 아주 잘 파악해 주었다.
즉, 남들은 사용에 애를 먹을 수 있겠지만, 그녀에게는 원하는 대로 다룰 수 있는 무기에 불과했다.
오늘 이 검으로 저 변태 토끼를 토막 치고 말 것이다.
세샤는 두 눈에 불을 켜면서 힘차게 라플라스 쪽으로 연검을 휘둘렀다.
“뒈져 버렷!”
휘리리릭-
촤촤촤촤!
『끼요오옷!』
새된 비명 소리가 울렸다.
* * *
『하악하악하악. 저를 그렇게 더 채찍질해 주세용. 저를, 저를, 저를……!』
“꺄아악! 저리 가! 제발 저리 좀 가라고!”
당연한 말이지만, 세샤가 아무리 날뛰어 봤자 라플라스를 어떻게 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오히려 라플라스가 더 자신을 학대해 달라면서 매달리는 통에 강제로 떼어 내느라 힘들어 죽을 지경이었다.
그 때문에 잔뜩 겁을 먹고 도망친 쪽은 동상들과 인형들이었다.
각자 원래 있던 교실로 도망치면서도 힐끔힐끔 문밖으로 이쪽을 훔쳐 보는 시선이……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사이에 라플라스와 많이 친해진 모양이었다.
『꺄하핫! 다들 그렇게 겁먹으실 필요 없어용! 우리 세샤 님이 얼마나 좋은 분이신데용?』
라플라스가 던진 말에 동상과 인형들은 한쪽 눈이 아닌 양쪽 눈 전부를 밖으로 꺼내긴 했지만, 그래도 섣불리 이쪽으로 다가올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헉, 헉, 헉……! 제기랄!”
세샤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여전히 분통이 풀리지 않는 얼굴로 씩씩거렸다.
『세샤 님도 참. 그렇게 체력이 약하셔서야 어쩌시나용?』
으드드득!
저 뻔뻔한 낯짝을 한 번만 후려갈기고 싶다!
진짜 제대로!
이를 바득바득 가는 세샤를 보면서 라플라스가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하여간 세샤 님도 저분들께 말씀해 주세용. 세샤 님은 저분들을 해칠 생각이 없지 않나용?』
세샤는 인상을 팍 찡그렸다.
대체 라플라스가 또 무슨 짓거리를 하려는 건지 좀처럼 감이 잡히질 않았던 것이다.
『여러분들도 다시 이쪽으로 오세용. 세샤 님이 겉으로는 저렇게 무섭게 보이셔도 속은 참 따뜻한 분이시랍니당. 저랑 같이 놀아 주실 거예용.』
‘논다’는 말에 동상과 인형들의 귀가 쫑긋거렸다.
이제 문밖으로 나온 건 얼굴 전부였다.
세샤는 그제야 라플라스가 말하려는 내용을 알 것 같았다.
‘논다…… 그냥 놀고 싶은 거였다고?’
그러고 보니 미스터리에 대한 괴담이 퍼지는 동안에도 피해자가 있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다.
보통 귀신이라면 산 사람에 대한 원한을 품고 있어서 해코지를 하려 할 텐데도 불구하고.
‘세종대왕 동상도 처음에는 반가워하다가 우리가 놀라니까 시무룩한 눈치였고…….'
동상과 인형들은 저들끼리 놀기 바빠 보였었다.
피아노 소리가 들렸던 것도 사실 사람들에게 겁을 주려던 게 아니라, 놀기 위한 연주곡이었다고 가정해 본다면 상황이 어느 정도 맞아떨어졌다.
라플라스 역시 어울리려 드니 바로 무리 속에 섞일 수 있지 않았던가.
동상과 인형들이 빤히 이쪽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기대에 찬 시선들.
특히 인형들은 눈이 반짝반짝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놀아 줄 거냐고 묻는 것 같았다.
저런 시선을 받고 있자니 여기서 세샤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하아.”
분명히 자신은 미스터리를 해결하러 온 것일 텐데.
세샤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 * *
‘그러니까 얘들은 그냥 놀고 싶었던 것뿐이라고?’
『오홍홍홍. 맞아용. 저는 그냥 같이 어울려서 놀아 준 것일 뿐이구용.』
‘그러기엔 너무 즐기는 것 같던데?’
『에이, 세샤 님도 참. 이왕에 한 번 시작했으면 제대로 해야지용.』
‘하아! 하여간 알았으니까 닥치고 네가 저지른 거나 제대로 수습해 놔.’
『홍홍홍. 이미 친구분들은 모두 안전하게 주무시고 계실 거예용.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여기서 있었던 일들은 모두 잊으실 테니 걱정 마세용.』
세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검지로 꾹꾹 눌렀다.
저 능글맞은 변태 토끼 때문에 오늘 하루에만 십 년은 족히 넘게 나이를 먹은 것 같았다.
『진짜 나이 많은 저 앞에서 나이 타령 하면 안 되는 거 아시죵?』
너무 지쳐서 이제는 닥치라는 짧은 말도 하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톡톡.
세샤는 또 무슨 일로 자신을 괴롭히나 싶어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옆으로 핵 돌렸다.
그러자 그녀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올라타 있던 곰 인형이 화들짝 놀라 균형을 잃고는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세샤는 다급히 손을 뻗어 가까스로 곰 인형을 구해 안아 주었다.
그런데.
스륵-
곰 인형이 고맙다는 듯 씩 웃더니 무언가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노란 손수건이었다.
“……이거 나 쓰라고?”
끄덕끄덕.
곰 인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이걸로 땀을 닦으라는 의미인 것 같았다.
“고마워.”
도리도리.
곰 인형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폴짝 바닥으로 내려갔다.
세샤는 인형이 건네준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확실히 다들 순하긴 다 순해.’
라플라스가 ‘같이 놀자’고 말하긴 했지만, 사실 세샤가 해 준 건 크게 없었다.
그냥 인형들이 손을 잡고 이끌면 이끄는 대로 끌려갔을 뿐이고, 춤을 추는 동상들 앞에서 쭈뻣대면서 상체를 이리저리 움직이기만 했다.
그런데도 녀석들은 아주 즐거워했다.
늘 보던 얼굴이 아닌 낯선 사람이 함께하니 그만큼 더 재미있었던 모 양이었다.
그 덕분에 세사는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귀신 들린 것처럼 보여도 이들은 모두 아주 순하고 착하다는 것.
그리고.
‘이 녀석들을 움직이게 한 녀석이 따로 있다는 것.’
라플라스가 말했다.
『아무래도 이 학교에 한 많은 귀신이 한 명 있었던 모양이에용.』
어쩐지 여태까지 보이던 장난기 섞인 말투와 다르게 조금 진지했다.
“귀신……?”
『넹. 이 친구들의 말로는 학폭 피해자인가 봐용. 교내에서 왕따를 당하고, 그게 심해지면서 그나마 있던 친구들도 모두 피하고…… 그래서 학교에서 제대로 놀지 못했던 게 한으로 남아 이 아이들이 모두 친구가 되어 줬다고 하네용.』
"……."
세샤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왠지 쉽게 넘겨서는 안 될 말을 들은 것만 같았다.
『문제는 이렇게 많은 친구가 생겼는데도, 정작 본인은 계속 트라우마에 시달려서 밖으로 잘 나오질 못한다고 하네용. 어떠세용? 한 번 만나 보시겠어용?』
세샤는 별다른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