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833화 (833/862)

33화. 세샤 (8)

“어디로 가야 볼 수 있는데?”

세샤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시작의 날’ 이후, 지구에는 온갖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넘쳐흘렀고, 세샤는 항상 최전선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살아왔다.

그러면서 깨달은 사실이 있다면, 귀찮다고 여기고 그런 사람들을 모른 척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하물며 이 모든 기현상의 원인이 자신과 비숫한 또래였던 사람이라고 한다.

당연히 더욱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씨익!

라플라스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면서 웃었다.

아주 기특하다는 듯이.

“……뭔데. 또 왜 그딴 변태 같은 웃음을 짓는 건데?”

『변태라니용. 지금 저의 웃음은 어디까지나 세샤 님의 측은지심이 아주, 아아아주우우우 기특해서 나온 것일 뿐이랍니당.』

“너한테 칭찬 들어 봤자 하나도 안 기쁘거든?”

『오홍홍! 부끄러움도 많으셔라.』

“아니라고!”

『홍홍홍홍홍!』

“야!”

저 변태 토끼의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계속 듣고 있으려니 화만 끓어 올랐다.

그래 봤자 라플라스에게는 전혀 전해지지 않는 듯했지만.

『이 친구들이 안내해 줄 거랍니당. 잠시만 기다리세용.』

라플라스는 가볍게 웃더니 대기 중이던 해골과 인형들에게 뭐라고 숙덕대기 시작했다.

세샤로서는 무슨 말인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언어였다.

하지만 해골과 인형들은 제대로 알아들었던지 하나같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해골은 표정 변화라고 할 만한 게 없는 대신에 턱뼈를 크게 벌렸다-세샤를 보면서 손을 크게 흔들었다.

덜그럭덜그럭!

『다들 이런 호의는 처음이라고, 마음씨가 너무 착하다고 친구가 되어 줘서 고맙다고 그러네용. 홍홍홍.』

“……알았으니까 안내나 하라고.”

『역시 부끄러움이 많으시다니깡.』

“하아.”

『그럼 친구분들, 안내 부탁할게용.』

덜그럭덜그럭!

해골 모형이 대표로 고개를 크게 끄덕이더니 앞장서기 시작했다.

그 뒤를 세종대왕 석상과 이순신 동상 등이 뒤따랐다.

‘뭐야, 다 따라가는 거야?’

친구들이 대거 생겼어도 밖으로 잘 나오지 않으려 한다며?

부담스럽다거나 그래서 그러는 거 아냐?

이렇게 떼를 지어서 가도 되는 걸까?

그랬다가 오히려 더 숨는 게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세샤는 자신의 손을 잡아당기는 손길에 아무 말 없이 그들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다리 주변으로 모여든 인형들이 똘망똘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어서 같이 가자고 부추기고 있었다.

세샤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디 미스터리물처럼 동상이나 해골 모형만 움직인다면 단순한 괴담일 테지만, 이렇게 어서 가자고 하니 《토이 스토리》가 생각났다.

이런  인형들이 걱정하는 친구라면, 학폭 피해자라는 아이가 마음씨만큼은 착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이러면 《토이 스토리》가 아니라 《박물관이 살아 있다》쪽이 맞으려나……?’

세샤가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하는 동안, 해골 모형은 아주 당당하게 길을 개척했다.

계단을 몇 번이나 오르고, 복도를 가로질러서 도착한 곳은 주로 2학년들이 머무는 3층이었다.

'친구라는 유령이 2학년이었나?’

세샤는 걸음을 옮기는 동안 라플라스를 통해 유령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 친구들의 말에 따르면 유령은 아주 선한 영혼을 가진 친구라고 하네용.』

『이름은 민채영.』

『자신들의 미적 기준은 인간과 달라서 어떻게 말하기 힘들지만, 다른 인간들의 말로는 아주 예쁜 친구였다고 하구용.』

『물론, 마음씨는 그런 것과 비교도 할 수 없구 말이죵.』

자정 12시를 알리는 학교 종이 울리고 나면, 유령은 언제나 같은 곳에서 홀연히 나타나 어느 반으로 이동한다.

그러고는 교실에서 거의 나오는 일이 없이 새벽 6시까지 가만히 앉아 있다가 밖으로 나온다고.

그런 루틴을 보인 게 벌써 몇 달 째.

그 때문에 목격자도 아주 많았던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그동안 괴담이 제대로 퍼지지 않았던 건, 도중에 방학이 껴 있었고 신학기가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라나?

아마 제대로 소문이 퍼지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을 거라는 게 동상과 인형들의 의견이었다.

『유령 친구는 이 학교를 다니던 재학생이었던 모양이에용. 하지만 항상 어두운 모습을 보여서 주변에 친구들이 잘 생기지 않았고, 그나마 있다고 해도 음험한 속내를 가진 양아치가 대부분이었다네용. 본격적인 괴롭힘 이후엔 아예 주변에 사람이 없었고용.』

『선생들은 그런 걸 알면서도 누구 하나 나서지 않았었대용. 심지어 부모들도 쓰레기였고 말이종. 재혼했던 엄마가 도망치면서 의붓아빠와 같이 살았다고…….』

『그러다 보니 여러모로 많이 막막했던 모양이에용.』

라플라스의 말을 들을수복 세샤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대체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웬만한 일에는 거의 화를 내지 않고, 세상사에는 무관심한 그녀로서도 울화가 터지는 것들투성이였다.

누구 하나 제 편이 되어 주지 않아, 기댈 곳이라곤 없었으니, 세상이 온통 창살로만 보였을 테니까.

세샤는 그 상처가 어떤 것인지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최소한 그녀에게는 가족이 있었다.

고마운 엄마가 있었고, 감사한 외할아버지가 있었으며, 듬직한 아버지와 삼촌이 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모두 이제는 그녀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었다.

세샤가 그토록 많은 상처를 입으면서도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데에는 든든한 버팀목인 ‘가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족이란, 애당초 그런 것이어야만 했다.

거친 풍파에 잔뜩 상처를 입더라도, 언제나 돌아와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

하지만.

그런 가족이 오히려 상처를 입히기만 한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민채영이란 이름을 가진 유령이 딱 그러했다.

의지할 곳 하나 없이, 세상에 홀로 버려진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누구 하나 도와주는 손길 없이 방치된 채 심리적으로도 절벽까지 내몰렸을 테지.

그리고 겨우겨우 버티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끝내…….

사실 세샤는 이러한 사연을 계속 이렇게 듣고 있어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쩌면 본인에게는 절대 들춰내고 싶지 않은 과거일지도 모르니까.

아니, 분명히 그러할 것이다.

세샤 역시 자신의 과거는 박유민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언젠가…… 정말 언제가 박유민과 허심탄회하게 모든 걸 공유할 수 있는 시간이 온다면 털어놓을 수 있을지 몰라도, 아직은 그럴 만한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자신의 속내를 보이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이런 의문에 라플라스는 그답지 않게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아뇨. 알아야 해용. 바로 잊으시더라도 어느 정도는 알고 계셔야 해용.』

“왜?”

『그래야 조금이라도 ‘이해’라는 걸 할 수 있으니까용.』

“이해……?”

『제가 했던 말 기억하시나용? 괴담이 생기는 이유용.』

“사람들의 사념(邪念)이 응어리져서 만들어진다며.”

『사념은 악독한 독, 그 자체예용.

미리 해독해 두지 않는다면 애꿎은 피해자만 만들 수도 있어용. 그러니 이해를 해야 한다는 것이에용. 사념 의 뿌리가 되는 원(怨)과 한(恨)이라는 것은 원래 어디에도 털어놓지 못하고 홀로 심중에 담아 두던 게 쌓이고 쌓이다 만들어지는 것이니까용.』

"……."

『그것을 두고 위선이라고 할 수도 있어용. 하지만 그래도 상대가 바라는 것은 따스한 말과 손길이 아닐까용? 진심에서 우러러나오는 말 말이에용.』

“……그것도 그러네.”

『물론, 지금 세샤 님이 나선다고 해도 그 유령 친구가 품고 있을 한을 풀어 주지 못할 수도 있어용. 어쩌면 세샤 님의 걱정대로 자신의 치부를 들켰다고 생각해 화를 낼 수도 있구용. 그래도 정면에서 안아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에용. 저들은 누군가가 도와주기를 바라지만, 처한 여건상 차마 도와 달라고 말할 용기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용.』

많은 생각이 들게 만드는 말이었다.

세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묘한 얼굴로 라플라스를 바라봤다.

『홍홍홍. 왜 그렇게 보시나용?』

“아니. 네가 처음으로 지극히 정상적인 말을 했다 싶어서.”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용? 저처럼 아주 착하고 깜찍하면서 정상적인 토끼가 어딨다구?』

“변태 토끼겠지.”

『하악하악하악.』

"……."

말을 하지 말든가 해야지.

세샤는 라플라스에게 줬던 플러스 점수를 도로 거둬들였다.

『아 참, 그리고 그 유령 친구를 만나면 주의하셔야 할 게 있어용.』

“어떤 거?”

『두 개가 있다네용. 하나는 천둥 번개를 아주 무서워한대용.』

세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이유를 묻지 않았다.

아마 천둥 번개와 관련된 어떤 트라우마가 있는 거겠지.

“다른 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고 해용」

‘‘누구를?”

『그건 이 친구들도 모른다고 하네용. 그냥 혼자서 조명도 꺼진 교실 의자에 앉아 창밖만 계속 보는데, 그 모습이 뭔가를 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게 설명해용.』

세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 기다리고 있다는 사람이 ‘친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를 갖고 싶다는 소망이 학교를 놀이터로 만들었듯이, 그 기다린다는 친구가 인젠가 이곳으로 와서 같이 놀기를 바라는 것일지도.

‘누구일까?’

그렇게 생각을 하던 그때, 해골 모형이 도중에 걸음을 멈췄다.

2학년 6반이었다.

덜그럭덜그럭!

녀석이 뭔가를 말하고 싶은지 크게 손짓 발짓을 해 댔다.

다행히 라플라스가 옆에서 해석을 해 주었다.

『여기서부터는 자신도 들어가기 힘들다고 말하네용.』

“어째서?”

『근처에 얼씬거리는 건 신경 쓰지 않는데, 억지로 만나려고 하면 숨어 버린대용. 오홍홍. 세샤 님처럼 부끄러움이 많은 친구이신가 봐용.』

세샤는 더 이상 라플라스의 말에 대꾸를 해 봤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 무시했다.

대신에 교실로 다가가 까치발을 살짝 들어 복도 창문을 통해 교실 내부를 엿보았다.

‘있다.’

정말 그곳에는 교복을 입은 한 학생이 앉아 있었다.

키도 작고 체구도 왜소한 아이.

단발머리라기보다는 관리가 안 된 덥수룩한 머리를 하고 있어 얼굴을 살피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그녀는 라플라스가 말했던 것처럼 홀로 창가에 앉아 창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오기를 바라기라도 하는 듯.

말처럼 뭔가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평범하게 생겼네. 이렇다 할 기운도 안 느껴지고.’

라플라스의 이목을 속일 정도이니 분명히 특별한 뭔가를 갖추고 있는 유령일 거라고 생각했건만.

유령은 겉보기에는 일반인과 크게 다를 게 없는 평범한 외양을 갖고 있었다.

풍기는 귀기도 마찬가지였고.

오히려 후, 하고 불면 날아갈 것처럼 위태롭게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살펴보는데, 유령이 시선을 느꼈는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세샤는 움찔 놀랐지만, 숨지는 않았다.

그녀를 더 살펴보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유령은 그런 세샤가 부담스러웠던지 자리에서 일어나 사라지려고 했다.

놓쳐서는 안 된다.

세샤는 그런 생각에 재빨리 문을 활짝 열면서 소리쳤다.

“잠깐만!”

움찔.

유령은 화들짝 놀라 몸을 떨다가 불안한 눈으로 세샤를 바라봤다.

그러면서 슬쩍 책상 뒤편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무서워하고 있어…….'

세샤는 유령이 왜 여태 동상이나 인형들이 다가오면 사라졌는지를 알 것 같았다.

겁을 먹은 것이다.

혹시 친구라고 다가온 아이들이 자신에게 해코지를 할까 봐.

세샤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자신보다 한 학년 더 높은데도, 체구는 너무 왜소하기만 저 아이가 겪은 일이 어떤 것인지 좀처럼 짐작 가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해코지할 생각은 없어. 정말이야.”

…….

“그냥 묻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

세샤는 조금씩 앞으로 다가가 볼까 하다가, 약간의 전진에도 유령이 몸을 뒤로 내빼려는 것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대신에 그녀를 어떻게든 설득시키고자 했다.

“밤마다 여길 온다며. 이유를 물어 볼 수 있을까?”

…….

“물론, 처음 보는 나한테 그런 걸 털어놓는 건 어렵겠지만, 그래도 도와주고 싶어.”

…….

유령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세샤를 바라보기만 할 뿐.

여차하면 도망칠 준비도 하고 있었다.

세샤는 그녀가 도망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처음 만난 사이.

그렇다면 무턱대고 들이대는 것보다는 차근차근히 거리를 좁혀 나가는 게 중요했다.

털썩!

세샤는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유령이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세샤는 씩 웃었다.

“일단 나는 여기 가만히 있을 테니까, 없는 사람처럼 여기고 하던 거 계속하고 있어. 마음 생기면 그때 말해 주고. 알겠지?”

…….

“그럼 허락하는 걸로 생각할게. 땡큐.”

어차피 시간은 많았다.

세샤는 유령이 마음을 열 때까지 밤새 여기 있을 생각이었다.

오늘이 안 된다면 내일.

내일이 안 된다면 모레.

한 달.

일 년.

매일 같이 찾아 와서 이야기를 나눈다면, 언젠가는 마음을 열어 주지 않을까.

아직 저 유령에게 타인의 선의라는 것은 아주 낯설기만 할 테니까.

귀여운 인형 친구들에게도 다 열리지 않았을 만큼 꽁꽁 얼어붙은 마음이니, 그것이 조금이라도 녹으려면, 긴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다행히 저번에 할아버지한테 배운 술식이 있으니까, 그거나 연구하고 있으면 시간은 대충 때우겠다.’

세샤는 허공에다 마법진을 띄워 놓은 채로 이것저것을 매만지기 시작했고.

유령…… 민채영은 그런 세샤를 빤히 바라봤다.

저 모습이.

마치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매일 새벽 6시만 되면 제일 먼저 학교로 찾아와 ‘안녕?’하고 인사를 건네던 누군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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