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834화 (834/862)

34화. 세샤 (9)

힐끔.

민채영의 시선이 창밖을 보다 말고 뒤쪽으로 슬쩍슬쩍 움직였다.

자신은 전혀 신경 쓰지 말라던 말처럼, 세샤는 무언가에 엄청나게 집중하고 있었다.

화르륵!

손끝에서부터 마법진이 살짝 떠오른다 싶더니 불길이 맺혔다.

민채영은 그것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움찔거리고 말았다.

혹시 불길이 이쪽으로 쏟아질까 봐.

하지만 붉은 불씨는 여전히 세샤의 손끝에서 푸른색으로, 하얀색으로, 노란색으로, 검은색으로 변하는 등, 조금씩 다른 색을 띠면서 변화를 시도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이 너무 예뻐서 민채영은 자기도 모르게 그쪽으로 쏠려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 말았다.

그러다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고개를 세게 좌우로 혼들면서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불편해.’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원래 이 교실은 밤이 되면 오롯이 자신만이 쓰는 자신만의 공간이었는데.

타인이 허락 없이 불쑥 들어와서는 한쪽을 차지하고 있다.

당연히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조용히 보내던 혼자만의 시간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정말 불편해.’

민채영은 생전에 사람들과 어울리고 대화를 나누는 게 여러모로 불편했다.

그리고 어려웠다.

친모는 자신의 처지가 궁핍한 것을 두고 '너만 아니었으면!’이라며 딸을 원망하기 바빴고.

계부는 더러운 눈길로 자신을 쳐다보다가, 밤만 되면 술에 잔뜩 취해 들어와서는 손찌검을 멈추지 않는 작자였다.

그런 가정환경에서 자라다 보니, 민채영은 항상 어딘가 다쳐 있었고, 상처 난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아 머리로 매번 얼굴을 가리며 사람들과 대화조차 꺼리게 되었다.

뒤늦게 자신도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친구를 어떻게 만들고 싶어도 자신이 먼저 다가가는 법을 모르니 그럴 수도 없었고.

학교에서도 줄곧 따돌림을 당하거나, 심하면 폭력 피해를 받기도 해서 언제나 움츠러들어 있어야만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민채영은 언제부턴가 누군가가 같은 공간에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겁을 먹곤 했다.

저들 중에 어느 누가 갑자기 돌변해서 자신에게 해코지를 할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녀에게 있어서 세상은 온통 두려워할 것들, 그리고 피해야 할 것들 투성이였다.

그렇다 보니, 알 수 없는 이유로 유령이 된 채 눈을 떴을 때.

민채영은 더 이상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기뻤다.

친구들도.

계부도.

친모도.

분명히 이 세상에는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자신의 존재를 알아보지 못했고, 간섭조차 할 수 없었다.

세상에서 홀로 분리된 것이다.

외딴 섬처럼.

다른 누군가는 그로 인해 외롭지 않냐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민채영에게는 오히려 자유로의 해방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폴짝폴짝 뛰어다녔고, 밤에 조용히 학교를 거닐기도 했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언제나 아침 일찍 등교하여 인사를 해 주었던 남자아이.

매번 대꾸를 해 주지 않아도 꿋꿋이 인사를 건네주었고, 나중에는 말까지 걸어 주었던…….

‘친구.’

그래. 친구였다.

최소한 그녀에게만큼은.

'날 기억해 줄까?’

그로부터 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른다.

유령인 민채영의 시간 감각이란 살아 있는 사람들의 것과 다를 수밖에 없었으니까.

심지어 이미 눈을 떴을 때도 자신 이 죽은 후로부터 꽤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사실 시작의 날이니 뭐니 하는 것도, 마법이니 스킬이니 하는 것도 그녀에게는 온통 신기하고 낯설기만 한 것들이었으니.

그러니 그 친구도 아마 지금쯤 자신을 잊지 않았을까?

자신과 다르게 성실했던 친구였으니, 제대로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진학하고, 취업을 하여, 어쩌면 결혼을 해서 아이까지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할아버지가 되었을지도……?'

어쩌면 그는 자신을 친구라고 생각지 않아서 졸업과 동시에 완전히 지난 사람으로 여기고 있을지도.

그러니.

뭐가 어떻게 되었든 간에 그 친구가 자신을 찾을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설사 추억에 젖어 옛 모교에 방문한다고 해도, 그런 경우는 보통 낮에 찾아올 테니 밤에만 깨어나는 그녀와 마주할 가능성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설사 운이 좋아 마주한다고 하더라도, 유령인 그녀를 못 알아볼 수도 있었다.

‘아마 영원히 못 볼 가능성이 가장 크겠지.’

민채영은 애당초 그 친구와의 만남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곳에 계속 남아 그 친구를 기다리는 이유는 단 하나.

‘내게 유일하게 남은…… 좋은 추억이니까.’

언젠가 세월이 지나 유령 상태를 더 이상 유지하지 못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민채영은 이 추억을 계속 간직하면서 살고 싶었다.

‘그리고 언젠가 가능하다면.’

한편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작은 희망을 품으면서 이런 소망을 품기도 했다.

‘꼭 전하고 싶어.’

그에게 꼭 전달해 주고 싶었지만, 전달해 주지 못했던 말을.

그래서.

민채영은 그 친구를 떠올리게 하는 세샤의 간섭이 불편하면서도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 * *

‘와…… 이거 정말 어렵네.’

세샤는 크로노스가 가르쳐 준 술식을 연구하는 내내 진땀을 빼야만 했다.

용의 피를 타고나 마나를 감지하고 다루는 데에 있어서는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그녀라지만, 이번 술식은 생각만큼 그리 쉽지 않았던 것이다.

‘황금의 시대…… 네피림(נְּפִלִ֞ים)이 사용하던 신대 마법이라고 하시더니. 이건 정말 상상 이상이잖아?’

네피림은 현재 자취를 감췄다고 알려진 고대 종족으로, 말라흐와 르 인페르날의 초창기 멤버들이 인간과의 사이에서 낳았다고 알려진 이들이었다.

거인과 비슷할 정도로 큰 덩치를 자랑하지만, 등에 날개를 갖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던가.

그들이 부리는 마법은 용종의 것과도 그 궤를 완전히 달리해서 입문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고 했다.

그래도 계속 이리저리 만지다 보니, 기본 술식인 ‘네피림의 불꽃’을 피울 정도는 된 것 같았다.

‘그야 뭐 보름 동안 밤새 이것만 계속 만졌으니.’

세샤가 밤마다 민채영을 찾아온 지도 벌써 2주가 넘었다.

처음에는 세샤가 금방 질려 떠날 줄 알았던지 별반 신경 쓰지 않던 민채영도, 조금씩 그녀를 신경 쓰기 시작한 눈치였다.

'어제는 평소보다 조금 늦은 걸 두고 서운해하는 티가 나기도 했었고.’

제 딴에는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 포커페이스를 유지한답시고 유지하는 것이겠지만, 사실 세샤에게는 민채영의 속내가 전부 들통나고 있었다.

행동 하나하나, 표정 하나하나.

옆에서 가만히 구경하고 있으면 얼마나 재미난지.

속이 너무 투명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맑은 아이였다.

어떻게 저런 친구가 그런 말 못할 끔찍한 피해를 입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

‘그것들 나한테 걸렸으면 죄다 가만 안 뒀을 텐데.’

처음 민채영을 만났을 때에 진행되고 있었던 방송은 다행히 모두 잘 마무리된 상태였다.

도중에 기절한 것을 두고 김 PD와 스태프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겪었나 의아해했지만, 라플라스가 미리 손을 써 놨던지 큰 이상을 느끼지는 못하는눈치였다.

'저 변태 토끼는 여전히 그대로고.’

라플라스는 이미 동상이나 인형들과 거의 베스트 프랜드를 맺고 있는 수준이었다.

매일 밤마다 그들과 같이 춤을 추고 파티를 즐기기 바쁘니, 이따금 집에 돌아가야 할 때면 아쉬워하는 투를 보이기도 했다.

『꺄하하하! 맞아용! 이두박근은 바로 여기 이 지점에서 힘을 빡 하고 줘야 더 도드라지고, 태가 아주 귀엽게 나온다구용. 한번 해 보세용! 자, 헛둘, 헛둘! 조명 팀은 광도를 더 올려 주시고, 음악 팀은 피아노를 더 빠르게 쳐 주세용! 자, 콜라 세례!』

……그 파티라는 게 좀 이상한 것 같다는 게 문제이긴 했지만.

그리고 당연하게도 세샤는 저기에 참여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나저나 좀 이상하단 말이지.’

세샤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라플라스가 여태 기현상을 발견하지 못했던 이유…… 정말 채영이 때문일까?’

라플라스는 분명히 무언가가 사념들을 말끔하게 지운 흔적이 있다고 했다.

라플라스의 이목마저 숨길 정도로 은밀한 움직임이 있었다는 뜻인데…… 문제는 그만한 일을 할 수 있는 존재라면 격이 상당해야 했다.

하지만 여태 살핀 바로 민채영은 절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나지 못했다.

못해도 단순한 부유령이 아닌 귀신(鬼神)은 되어야 한다는 뜻인데…… 민채영은 그 흔한 폴터가이스트조차도 제대로 시전하지 못할 정도였다.

‘채영에게 본인도 모르는 다른 뭔가가 있는 걸까, 아니면……!’

세샤가 깊은 생각에 잠기려는 그때였다.

「이게, 마법이라는 거야?」

옆에서 불쑥 들린 목소리에 세샤가 화들짝 놀라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민채영이 자세를 살짝 숙인 채 옆에서 자신의 손끝에 걸린 ‘네피림의 불꽃’을 빤히 보고 있었다.

불빛 때문인지는 몰라도, 세샤는 어쩐지 그녀의 얼굴이 붉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태 모른 척하고 있다가 말을 걸려니 어려웠던 걸까.

뚱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힐끔 세샤 쪽을 곁눈질하는 게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것 같기도 했다.

'귀, 귀여워!’

세샤는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던 웃음을 억지로 삼켜야 했다.

어쩐지 이제 막 갓 돌이 지난 막내 고모 예은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물론, 그런 말을 당사자 앞에서 했다간 겨우 열린 문이 도로 닫히고 말겠지만.

“응. 맞아.”

세샤는 민채영이 부담스러워하지 않게 되도록 눈을 마주 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너 마법사야?」

“비슷해.”

정확하게는 마범사가 아니라, 마법 종족이지만.

「잘하는 편이야?」

“아마도?”

「얼마나?」

“세계에서 손꼽힐 만큼?”

「……거짓말하지 마. 그러면 안 돼.」

민채영은 세샤를 나무라는 투였다.

사실 그녀는 거짓말을 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했다.

친모도, 계부도.

모두 그녀에게는 거짓말만 일삼았으니까.

하지만 세샤는 ‘엣햄!’하고 가슴에 잔뜩 힘을 주며 뻐겼다.

“정말인데?”

「뭐?」

“플레이어에 대해서는 알아?”

「……몰라.」

“플레이어라는 게 있어.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거기서 나 항상 열 손가락 안에 꼽혔었는데?”

「……정말?」

못 믿겠다는 투.

“진짜야.”

다른 가족들은 ‘플레이어’가 아니라 신적인 존재들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세샤는 자신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두 사람을 둘러싼 세계가 여러 차례 바뀌었다.

뜨거운 사막에 놓였다가, 추운 빙하에 있다가, 은하수가 흐르는 바다 위에 있기도 했다.

「와……!』

민채영은 탄성을 터뜨렸다.

언제나 TV 너머에서나 보던 아름다운 광경들이 순식간에 눈앞을 스쳐 지나갔으니까.

자신이 겪고 있는 게 현실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니, 설사 환각이라도 좋았다.

이런 경험을 해 보는 것 자체가 너무나 신기하고 황홀했다.

“이제 믿어?”

「어……!』

민채영은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고 개를 주억거리다가, 세샤가 그녀를 빤히 보면서 웃고 있는 걸 깨닫고는 고개를 옆으로 홱 돌렸다.

살짝 붉어진 얼굴이,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격한 반응을 보였는지를 뒤늦게 깨달은 눈치였다.

부끄러움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모양이었다.

그러다 민채영은 뭔가를 떠올렸는지, 세샤를 홀깃 몰래 보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까?」

“응?”

「이거…… 나도 쓸 수 있을까?」

세샤가 배시시 웃었다.

“그럼. 내가 가르쳐 줄게.”

「정…… 말?」

"응."

「왜……?』

민채영은 묻고 싶었다.

자신과는 일면식도 없던 세샤가 왜 이렇게 자신을 보살펴 주려 하는지.

“응? 왜라니?”

「날 도와줄 이유가 없…… 잖 아…….」

“왜 없어? 친구한테 뭘 가르쳐 주는 게 이상해?”

민채영이 화들짝 놀랐다.

「친구……?」

“응. 우리 친구 아니었어? 보름이나 계속 같이 붙어 다녔는데?”

순간, 민채영의 눈동자가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뭐라고 했지?

친구?

그랬었나?

근데 붙어 다녔었다고?

언제?

보름 동안 계속 같이 있었던 걸 두고 말하는 걸까?

여러 혼란한 정보 때문인지 민채영은 머릿속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이 또 너무 순진하고 귀여워 보여서, 세샤는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정말 나보다 한 살 많은 언니 맞아? 왜 이렇게 순해?’

민채영이 들었다면 얼굴이 더 빨갛 게 달아올랐을 생각을 하면서 세샤 는 씩 웃었다.

「그, 그럼……!」

“응. 물어봐.”

「나, 나도 이걸 배, 배우면…… 까?」

“잘 못 들어서. 다시 말해 줄래?”

「나, 나도 이걸 배우면…… 찾을 수 있을까?」

드디어 민채영이 마음을 열었다.

세샤는 그런 생각에 흐뭇하게 웃으면서 물었다.

“뭘 찾고 싶은데? 혹시 사람이야? 첫사랑?”

「……그, 그런 거 아냐!」

민채영의 얼굴은 이제 붉어지다 못해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럼?”

「치, 친구…….」

손가락 끝이 꼼지락대고 있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이제는 애처롭기까지 했다.

세샤는 어쩐지 자신이 박유민의 성격을 닮아 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말았다.

“이름은?”

「손……!」

민채영이 머뭇거리다가 뭐라고 말하려던 그때.

「세샤 님, 피하세용!」

갑자기 라플라스가 소리를 지르면서 다급히 문을 부수고 들어왔다.

세샤가 반사적으로 민채영의 손을 잡아 그녀를 안쪽으로 잡아당기면서 시선을 밖으로 돌렸다.

창밖.

어둡던 하늘이 갑자기 샛노랗게 빛나면서 벼락이 떨어지고 있었다.

정확하게 이쪽을 노리고.

절대 우연적인 자연현상이 아니었다.

우르르르, 콰콰쾅!

「까아아아악!」

-유령 친구를 만나면 주의하셔야 할 게 있어용.

-어떤 거?

-두 개가 있다네용. 하나는 천둥 번개를 아주 무서워한대용.

민채영이 두 눈을 질끈 감으면서 비명을 질렀다.

그녀에게 있어 어떤 트라우마를 심어 줬던 벼락이 학교 건물을 세게 때리면서 유리창과 외벽이 박살 났고, 후폭풍으로 인해 정렬되어 있던 책걸상이 모조리 날아갔다.

건물이 반파될 정도로 엄청난 충격이었지만, 세샤와 민채영은 라플라스가 세운 결계로 다친 곳 없이 멀 쩡했다.

하지만 민채영은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세샤는 걱정 안 해도 된다며 그녀를 달래면서 날카로운 눈으로 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라플라스가 대치하고 있는 곳.

혹발을 길게 늘어뜨린 남자가 서 있었다.

창백하게 보일 정도로 유달리 하얀 피부가 인상적이었다.

새치름하게 뜬 두 눈이 마치 전갈을 연상케 했다.

“드디어 찾았다.”

남자의 시선은 민채영에게 고정되 어 있었다.

“별의 조각.”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