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835화 (835/862)

35화. 별의 조각 (1)

“별의 조각……?”

세샤는 마른침을 삼켰다.

남자가 말하는 그게 무슨 뜻인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남자가 바로 민채영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

문제는 남자에게서 풍기는 기운이 만만치 않다는 점이었다.

‘저 사람은…… 대체 누구지?’

연우가 시스템을 모두 거둬들이고 난 뒤.

지구에는 더 이상 시스템이 작동하지 못하고 있었고, 시스템이 주는 초능만을 다뤄 왔던 플레이어들은 모두 능력을 잃고 평범한 생활로 되돌아가야만 했다.

여전히 지구에 칠흑왕의 본체라 할 수 있는 르’뤼에가 잠들어 있어 신적인 존재들이 호시탐탐 지구를 노리고는 있다지만.

그렇다고 해도 연우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상황에서 이곳을 침범할 만한 간 큰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그런 것을 떠나서, 지구에는 크로노스와 레아가 있었다.

그것도 소싯적 신왕 시절의 힘을 모두 되찾았다고 알려진 두 사람이.

그리고 그들이 원한다면 올림포스까지 전면적으로 나서리라는 것을 다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현재 지구는 좋게 포장하자면 중립 지대, 냉정하게 표현하자면 마경(廢境)쯤으로 취급받고 있었다.

발을 들이는 것은 쉬울지 모르지만, 자칫 잘못했다간 주신이고 창조신이고 간에 모조리 뜯어먹히고 말 마경.

그런데 그만한 존재가 나타났다.

흑발의 남자.

그가 풍기는 격은 분명히 대단한 것이었다.

아직 탈각조차 이루지 못한 세샤로서는 숨이 턱 막힐 만큼.

만약 라플라스가 나서서 그녀를 보호해 주지 않았다면 위험하지 않았을까?

문제는 그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아주 은밀하게 접근했다는 점이었다.

눈치채지 못한 건 라플라스도 마찬가지였고, 크로노스도 마찬가지였다-학교에서 집까지 거리가 제법 된다지만, 크로노스에게 그 정도는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을 테니.

그래서 세샤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저 남자야. 학교에 있던 사념을 지우던 게.’

라플라스의 감각을 속이던 놈이 분명했다.

오들오들…….

그리고 민채영은 세샤의 품에 안겨 추위에 떠는 아기 새처럼 계속 떨기만 했다.

대체 천둥 번개가 치던 날에 무슨 일을 겪었기에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걸까.

하지만 남자는 민채영의 그러한 반응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것처럼 이쪽으로 손을 뻗어 왔다.

그 앞을 가로막은 라플라스와 세샤 쯤은 개의치 않는 듯한 태도였다.

타악!

남자의 손끝에서 빛이 발하기 직전.

라플라스의 굵직한 손이 남자의 손목을 잡아챘다.

남자의 시선이 조용히 라플라스 쪽으로 돌아갔다.

그는 자신의 손목과 라플라스를 번갈아 보다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넌 뭐지?”

『오홍홍. 도리어 제가 묻고 싶은 걸 물어보시는군용.』

파아아아-

라플라스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하지만 세샤는 그가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림자.

라플라스의 토끼 그림자가 주둥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활짝 벌리고 있었다.

그 사이로 흉측한 톱니 이빨이 자글자글하게 나타났다.

『그러는 네놈 새끼는 뭔데 우리 귀엽고 상큼한 세샤 님을 건드리려고 하시는 거죵? 이 먹다 만 노가리 같이 생긴 새끼 님?』

“나는 수거자.”

남자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조각을 모으는 사람이다.”

『헹! 별의별 미친놈을 다 보겠네용!』

그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콰르르릉!

라플라스의 그림자가 검은 촉수를 마구잡이로 뽑아냈고, 남자에게서 불어닥친 강풍이 그 위를 휩쓸었다.

그것은 마치 저 깊은 우주, 별과 별 사이에 불어닥친다는 성간풍(星間風)을 떠올리게 했다.

그 속에 담긴 불빛도 마치 밤하늘에 박힌 별빛(星光)을 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러한 아름다운 모습과 다르게, 충돌의 결과는 그리 아름답지 못했다.

막강한 충격파가 교실을 삽시간에 날려 버린 것이다.

“채영아, 뛰어!”

세샤는 여기서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민채영의 손을 잡고 강제로 이끌어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콰콰콰광!

퍼퍼퍼펑-

라플라스와 남자의 격돌은 학교를 당장에라도 무너뜨릴 듯이 크게 뒤흔들었다.

복도에 쭉 나열된 창문이 잇달아 깨지고, 문이 강풍에 휩쓸려 반대쪽 복도 창문을 부수고 바깥으로 튀어 나갔다.

그로 인해 부서진 책걸상 조각 따위는 언제든 눈 달리지 않은 흉기가 되어 날아들 수 있었다.

벽이 무너지고, 천장 판이 우수수 떨어졌다.

마치 격진이라도 찾아온 듯한 모양새.

거기다 강풍까지 쉴 새 없이 휘몰아치니 균형을 잡고 달리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였다.

하지만 세사는 이마저도 라플라스가 자신들을 배려하여 조절하고 있는 것임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원래 그들쯤 되는 존재들은 단순히 격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이까짓 학교는 물론, 지구의 상당수를 초토화시킬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물론, 그랬다간 세샤나 민채영은 혼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지고 말겠지만.

그러니 라플라스가 힘을 분배하고 있는 것이다.

일부는 남자를 상대하는 것으로.

또 다른 일부는 세샤 등을 보호하는 것으로.

애당초 라플라스의 임무가 세샤를 보호하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거기서 또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생긴다.

아무리 라플라스가 힘을 분배해서 전력을 다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혼세팔신이라는 이름은 절대 도박장에서 딴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라플라스는 손쉽게 남자를 처치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체 남자의 정체가 뭐기에……?

하지만 세샤의 생각은 얼마 가지 못했다.

덜그럭덜그럭!

복도에 있던 해골 모형이 다급하게 손을 흔들면서 뭐라고 소리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몇몇 동상들은 다급하게 이쪽으로 달려오는 중이었다.

‘무슨……!’

세샤는 자기도 모르게 드는 불안감 에 고개를 뒤로 돌렸다.

키키키키-

박살 나 흩어지는 잔해 사이로.

두 개의 그림자가 빠르게 미끄러지면서 달려오고 있었다.

세샤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것이 절대 라플라스의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남자와는 다른…… 별개의 존재들이었다.

이대로는 따라잡힐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손목에 감긴 연검을 풀려는데, 이순신 동상과 세종대왕 석상이 세샤의 옆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아주 잠깐 동안.

두 녀석과 세샤의 눈이 마주쳤다.

“너희들……!”

거기서 세샤는 둘의 목소리를 읽을 수 있었다.

‘도망쳐.’

‘우리가 막아 볼 테니.’

세샤는 너희들로는 절대 막을 수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아무리 미스터리로 이뤄진 녀석들이라고는 하나, 신격조차 갖추지 못한 놈들이 아닌가.

후하게 쳐줘 봐야 요괴에 불과한 녀석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순신 동상은 괜찮다는 듯, 싱긋 웃으면서 칼집에서 칼을 뽑고 있었다.

돌로 된 칼집에서 뽑힌 칼이라고 해 봤자 여전히 돌일 뿐이다.

하지만 세샤는 어째서인지 그 칼이 빛무리에 젖어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삼척서천(三尺誓天) 산하동색(山河動色)

-일휘소탕(一揮婦蕩) 혈염산하(血染山河)

검면에 적힌 글자들이 이상하게 눈에 박혀 들어왔다.

-석 자 칼에 맹세하니, 산과 강이 떨리고, 한 번 휘둘러 모두를 물리 치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도다!

이순신 동상이 그 긴 검으로 바닥을 세게 내리쳤다.

콰아아앙!

쿠릉, 쿠릉, 쿠르릉-

폭발이 다시 한 번 더 학교 건물을 흔들었다.

그사이.

세종대왕 석상도 걱정 말라면서 한쪽 눈을 찡긋거리다가 이순신 동상의 뒤를 받쳤고, 뒤이어 해골 모형이나 작은 인형들이 겹겹이 쌓여 장막을 만들었다.

‘……제길!’

세샤는 이를 악물었다.

후끈한 열기가 매캐한 연기를 동반한 채 코끝을 찔렀다.

어떻게든 막아 보겠다면서 나섰지만, 결국 얼마 버티지 못한 모양이었다.

「안 돼……!」

민채영은 그들의 모습을 보다가 이를 악물었다.

늘 혼자 있는 자신과 같이 놀아 주겠다며 복도를 배회하던 친구들의 죽음은, 트라우마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그녀의 정신을 깨우기에 충분했다.

아직 저들과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못했는데.

고맙다는 말도 하지 못했는데……

저들은 늘 교실에만 틀어박혀 있던 자신도 친구랍시고 저렇게 몸을 사리지 않으며 나서고 있었다.

『귀찮게 자꾸 도망치는군.』

그때, 세샤는 민채영과 같이 계단 쪽으로 달리다 말고, 발끝에서 불쑥 올라온 그림자 때문에 도중에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쫓아오던 두 그림자 중 하나가 그새 그들을 따라잡은 것이다.

그림자가 걷히면서 붉은 머리칼을 한 중년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호호호. 어차피 갈 곳은 없는데 말이지.』

뒤쪽.

역시나 다른 그림자가 걷히면서 고혹적인 미소를 자랑하는 여자로 변했다.

“아이야.”

중년인은 인간의 육성을 내면서 사람 좋은 눈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세샤는 녀석의 눈웃음 아래에 숨겨진 동공이 싸늘하다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네 손에 있는 것을 내놓아라. 그런다면 순순히 보내 주마. 애당초 우리의 목적은 네가 아니니.”

“그럼. 우리는 딱히 소란을 피울 생각은 없다구. 너도 그렇게 거추장스럽고 방해만 되는 아이는 필요 없잖니? 산 사람도 아니고.”

중년인의 말에 여인이 옳다고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민채영의 눈동자가 떨렸다.

그녀라고 이 상황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할까.

세샤가 자신을 버린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여길 참이었다.

자신이 세샤의 입장이라도 그렇게 할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차라라랑!

세샤는 손목에 감긴 연검을 풀었다.

2미터 30센티미터 정도 되는 길이의 연검이 흐느적거리면서 바닥에 깔리고, 손잡이가 오른손에 잡혔다.

민채영의 손을 잡고 있는 왼손에 힘이 바짝 실렸다.

“딴생각하지 마. 너는 어떻게든 내가 지킬 테니까.”

「하지만……!」

“내가 이미 그러겠다고 마음먹었어. 다른 말 하지 마 ”

화르르륵!

세샤의 발밑으로 마법진이 깔린다 싶더니, 그 위로 하얀 불꽃이 피어나면서 그녀를 휘감고 연검에 달라 붙었다.

최근에 그녀가 크로노스로부터 배우기 시작했던 ‘네피림의 불꽃’이었다.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실전에서 써먹는 것은 처음이라 과연 제대로 쓸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하지만 당장 이 신적인 존재들과 다투기 위해서는 그녀가 알고 있는 마법 중에 가장 효과적인 걸 써야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건 이것밖에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할아버지가 더 많이 가르쳐 주려고 하실 때 제대로 익혀 놓을걸……!’

이제 더 이상 지구에서 위험에 처할 일은 없을 거란 생각에 최근 일 여 년 동안 마법 익히기를 게을리했던 것이 이렇게 후회될 줄이야.

물론, 제대로 단련했다고 해도, 탈각까지는 무리였을 테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세샤는 지금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싸움을 하겠다는 거로군.”

중년인은 차갑게 웃었다.

“그게 소원이라면 들어줘야지, 어리석은 아이야.”

순간, 중년인을 둘러싼 세계가 변했다.

세샤와 민채영이 있는 공간도 그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화아악!

그곳은 오로지 어둠만이 가득한 세계였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세샤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곳이 중년인이 일으킨 심상 세계-성역(聖域)이라는 사실을 눈치챈 것이다.

“또 이거야? 칙칙하게. 지겹지도 않나. 좀 다른 걸로 바꾸면 안 돼?”

여인은 이곳이 아주 익숙하다는 듯, 지겨워 죽겠다는 투로 투덜거렸다.

그러면서도 미소 짓고 있는 입가에서는.

잔혹함이 잔뜩 묻어 나왔다.

* * *

암흑의 구(球).

이곳은 외부와 철저히 격리되어 내부에서 벌어진 일은 절대 외부에서 관측되지 않는다.

세샤는 이곳을 성역(聖域)으로 알고 있었지만, 사실 진짜 성역과는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성역(星域).

혹은 스타 필드(Star Field).

이곳에서 그들의 별빛은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화려하게 빛날 수 있다.

그러니 스타 필드 밖에서 싸우는 것은 그들로서도 많이 부담되었다.

지구?

그깟 자그마한 행성에서 드러냈다간 송두리째 녹아 버리고 말겠지.

항성 중에서도 그리 큰 크기가 아닌 태양이지만, 그 옆에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갔다간 모든 생명체들이 소멸할 뿐만 아니라, 행성 자체가 녹아 버릴 수 있듯이.

하지만 스타 필드 내에서는 그럴 염려가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이 지구 어딘가에 있을지 모를 신왕 부부의 관측도 피할 수 있을 테고.

중년인-‘남쪽 화살(Sagitta)’의 입꼬리가 크게 말려 올라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