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838화 (838/862)

38화.. 별의 조각 (4)

암흑의 구가 허공에 흩어졌다.

라플라스가 모습을 드러낸 건 바로 그때였다.

『이게 누구신가용! 주인님의 아버님 어머님이 아니신가용! 이 라플라스, 두 분께 인사를 드리겠……!』

라플라스는 몸을 던지다시피 하면서 큰절을 올리려다 말고, 갑자기 ‘작은 굴레’가 감기면서 몸이 제자리에 착 달라붙자 두 눈을 끔뻑거렸다.

크로노스가 질린다는 얼굴로 스퀴테를 겨누었다.

“그 짓거리 좀 그만해! 오늘 아침에도 봤으면서 뭔 인사야!”

『오홍홍홍. 역시 우리 크로노스 님. 부끄러움도 많으셔라.』

“아니거든!”

라플라스의 저런 괴이한 행색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을 꼽으라고 한다면 크로노스를 말할 수 있었다.

연우와 함께 다닐 때부터 느꼈던 것이었지만, 대체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는 것이 늘 그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었다.

아니, 오히려 요즘 들어 더 심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저걸 유일하게 통제해 줄 만한 연우가 없으니, 딱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된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정말이지 연우만 돌아오면 저놈부터 안 보이는 곳으로 치워 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하악하악하악. 역시 우리 크로노스 사마도 세샤 짱과 똑같이 카와이한 것이와용.』

그러면서 한쪽 눈을 찡긋거리기까지 하는데…….

“여보! 그러지 마! 참아!”

“놔! 나 오늘 저 새끼 죽여 버리고 만다아앗!”

크로노스가 스퀴테를 들고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처럼 굴자, 다급하게 레아가 허리를 붙잡으며 그를 뜯어말렸다.

그럴수록 라플라스는 양쪽 눈을 번갈아 찡긋거리면서 혀 짧은 소리를 낼 뿐이었지만.

『어머. 나는 이렇게 박력 넘치는 상남자가 좋더랑. 제 포근한 품에 안기시려는 것인가용? 레아 님도 보고 계신데?』

“죽여 버리고 말겠어어어어!”

크로노스는 악을 쓰면서 스퀴테를 이리저리 붕붕 휘둘러 댔다.

‘……개판이야.’

세샤는 검지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크로노스와 레아를 만나 긴장감은 다 풀렸으나, 저놈 때문에 이제는 짜증이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항상 이랬다.

라플라스만 나타나면 뭔가 꼬이는 기분이었다.

“하아……! 너 어떻게 온 거야? 네가 상대하던 놈은?”

라플라스는 분명히 다른 놈과 대치하고 있었다.

자칫 지구에도 악영향이 갈까 봐 섣불리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크로노스와 레아에게 당장 녀석을 도와 달라고 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도리어 녀석이 와 버렸으니 의문이 들 수밖에.

라플라스는 가슴 근육에 힘을 바짝 주면서 우쭐거렸다.

『엣햄! 그야 제가 오죽 잘났어야 말이죵!』

“……아닌 거 알거든?”

『헤헤. 들켰나용?』

“징그러우니까 그렇게 웃지 말지?”

『데헷?』

라플라스는 검지와 중지만 편 V자를 눈가에 갖다 대면서 또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세샤의 두 눈이 썩은 동태 눈처럼 착 가라앉았다.

“……할아버지.”

“왜 그러느냐?”

“얘 참살 가능하죠?”

“가능하지!”

크로노스는 당장 스퀴테를 높이 쳐들었다가 라플라스의 정수리 위로 내려찍었다.

하지만 그전에 라플라스가 세샤의 그림자로 쏙 들어가 버린 탓에 칼날은 허망하게 애꿎은 허공만 가로질러야 했다.

그들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레아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레아는 뒤늦게 민채영이 멍하니 세샤와 크로노스 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부러움이 가득한 시선.

그러면서도 그 속에 담긴 감정들은 다양했다.

안도, 불안, 초조, 걱정…….

적들이 떠난 것에 다행스러움을 느끼면서도, 혹시 크로노스와 레아가 자신을 다그치는 게 아닐까 불안한 모양이었다.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구나.

-다행이야…….

-그런데…… 이거 전부 다 나 때문에 벌어진 일 맞지?

-나한테 뭐라고 하지는 않을까?

-뭐라고 할 것 같아.

-분명히 괴물이 그랬어. 나를 찾으러 온 거라고.

-이 사람들은 나 때문에 다칠 뻔 했어. 그러니 나를 싫어하겠지…….

-싫어하는 정도가 아닐 거야. 원망할 거야.

-이제 날 피하려 하지 않을까?

-아니면 혼내던가.

-이제야 겨우 친구가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친구가 다시 사라져 버렸어.

-그래도.

-그래도 보기가 좋다.

-저게 가족이란 거겠지?

-나한테도 저런 가족이 있었으 …….

-그럼 좋았을 텐데.

그녀의 온갖 사념들이 느껴졌다.

그렇게 민채영은 슬프게 세샤와 가족들을 바라보다가, 뒤늦게 레아의 시선을 깨닫고는 화들짝 놀라면서 황급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무슨 큰 실수라도 한 것처럼, 오들오들 떨면서 레아의 눈치까지 살폈다.

‘……이 아이.’

이 아이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얼핏 알 것 같았다.

레아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다가 조용히 손을 뻗어 민채영을 안아 주었다.

민채영은 갑작스러운 손길에 화들짝 놀랐지만.

“괜찮단다.”

「……!」

“괜찮으니까 걱정 마렴.”

「…….」

곧 따스한 손길에 놀랄 정도로 빨리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다 한참 뒤.

민채영이 입술을 벙긋거렸다.

조심스레 레아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혼내지…… 않을 건가요?」

“어머. 내가? 왜 그렇게 생각하니?”

「그야 저 괴물들이 저 때문에 왔으니까……!」

“왜 너 때문이니? 애초에 저 괴물들이 전부 잘못한 건데. 너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단다. 나쁜 건 전부 저것들이지.”

「……!」

민채영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답변이었으니까.

항상 가족들로부터 원망만 들어 오고, 나쁜 일은 전부 네 탓이라는 말만 들어왔던 그녀로서는 이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어여쁜데 내가 어떻게 혼내겠어? 우리 손녀를 지켜 줘서 고맙다고 인사는 못할망정.”

레아는 그렇게 화사하게 웃으면서 장하다는 듯이 민채영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고.

뚝.

뚝.

민채영의 눈가에서는 눈물이 홀러내렸다.

마치 겨울철에 잔뜩 얼어붙었던 눈이 모두 녹으며 물이 흐르듯이.

그녀의 눈에서도 그렇게 물방울이 떨어졌다.

* * *

세샤 일행이 모두 떠난 뒤.

그늘이 진 학교로 음습한 그림자 하나가 조용히 다가왔다.

원래대로라면 세 별의 습격으로 반파되다시피 했던 곳이지만.

크로노스가 ‘작은 굴레’를 되감아 원상 복귀를 해 놨기 때문에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멀쩡했다.

그림자가 나타난 곳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격전이 벌어졌던 장소였다.

스르르…….

그림자가 불쑥 올라오면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티그리스.

라플라스와 다투던 그가, 크로노스와 레아가 나타나면서 부리나케 줄행랑을 쳤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멍청한 놈들.”

쯧!

티그리스는 세게 혀를 찼다.

그의 조롱은 죽은 남쪽 화살과 해시계를 향한 거였다.

“이 세계선은 위험하다고 몇 번이나 설명했을 텐데. 하긴 그딴 지능을 갖고 있으니 여태 88궁에도 들지 못하고 있었겠지만.”

다중 우주니 평행 우주니 해도, 다 같은 우주가 아니었다.

모름지기 세계선에도 등급이 있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각 세계선이 분화하거나 탄생한 순서에 따라 번호를 매겼고, 보통 그 번호가 뒤로 갈수록 등급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물론, 뒷번호라고 해도 그 우주에 특별한 변이가 생겨 앞번호를 앞지르는 경우도 많이 있었지만, 그래도 대개 번호는 서열을 의미했다.

그렇기에 ‘#0’이라고 명명된, 모든 세계선의 원류(源流)가 되는 곳은 별들도 쉬이 범접하기 힘든 곳일 수밖에 없었다.

달리 ‘오리지널’이라고도 불리는 이 세계선은 원래 우주가 ‘굴레’라는 형태로 존재할 적에 있었다던 곳.

탑이 있었고, 천마와 칠흑왕이 우주의 소유권을 두고 다툼을 벌였던 주 무대이기도 했다.

칠흑왕이 오늘날의 정체성을 가지고,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말도 안 되는 존재가 탄생한 곳.

크로노스와 레아는 바로 그런 두 쌍둥이의 부모였다.

“아직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게 우리의 정체를 들킬 때가 아니라고 그렇게 설명을 했는데도 말이지…… 그냥 단순하게 둘을 제거하기만 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나? 대체 별은 어떻게 된 거지?”

멍청하기도 이렇게 멍청할 수가 없었다.

칠흑왕과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탄생시킨 부모라면, 당연히 그만큼 뛰어난 존재일 거란 생각은 상식으로 갖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니냔 말이다.

아니, 분명히 생각하긴 했을 것이다.

다만, ‘별’이라는 신분이 주는 자신감에 취해 두 사람을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거란 자만심이 눈을 가렸을 뿐이지.

애당초 별이란 존재들은 그런 것들이었다.

용감함과 만용, 자부심과 자존심을 구별하지 못하는 존재들.

필멸자로 있을 때부터 승승장구해 오며 그 자리에 올랐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자신감인 것이다.

“뭐, 덕분에 나는 이렇게 포식할 수 있게 되었지만 말이야.”

하지만 그러한 자신감을 버리고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다면, 별은 계속 더 큰 빛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지금도 보라.

뜻하지 않게 이렇게 맛있는 별미를 탐식할 수 있게 되었으니.

츠츠츠……!

티그리스가 허공에다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자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오면서 학교 전체를 휩쓸었고, 땅에 가라앉았던 갖가지 사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티그리스……! 너!

-살아 있었구나! 어서! 어서 우리를 살려 줘!

자고로 별이란 것은 그리 쉽게 저물지 않는다.

별빛이 떨어진 곳.

별빛의 불씨가 남아 있는 곳.

그곳에서 얼마든지 다시 소생할 수 있었다.

그들의 근간이 ‘별의 조각’에 있는 탓이었다.

스스로 빛나는 자들.

그래서 별(星)이었다.

신앙에 기반을 두어 신도가 없어지면 사라지고 마는 운명인 신격과는 궤를 달리 하는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빛날 줄을 몰랐으니까.

별들이 신과 악마들을 가리켜 하찮은 것들에 기생하여 살아가는 기생충이라고 말하는 게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는 달리 말한다면, 근간을 먹어 치운다면 별도 같이 사라지게 된다는 의미였다.

티그리스는 어서 자신들을 살려 달라고 비는 남쪽 화살과 해시계를 보면서도 대답을 주지 않았다.

그저 입만 쩍 벌릴 뿐이었다.

입꼬리가 귓가까지 길쭉하게 찢어지면서 턱이 벌어졌다.

그 속에 든 이빨들이 마치 톱니처럼 뾰족해졌다.

-너, 너……!

-아, 아, 안 돼……!

남쪽 화살과 해시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뒤늦게 티그리스가 뭘 하려는 건지 눈치랜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도망치려 했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크로노스와 레아에 의해 별빛이 거의 꺼지다시피 한 상태였기에, 당장 행동에 있어 제약이 큰 탓이었다.

냠!

티그리스는 찢어지는 비명을 배경음처럼 들으면서 두 사람을 한꺼번에 집어삼켰다.

아가리 속에서 꿈틀대는 게 느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티그리스를 기분 좋게 해 주는 것은 그 둘 속에 담긴 조각의 잔재였다.

꿀꺽-

정말이지 삼키는 게 너무 아까울 정도로 뛰어난 극미(極味)였다.

맛이면 맛, 포만감이면 포만감, 충족감이면 충족감.

모든 욕구를 충족해 주었다.

왜 그렇게 88궁의 놈들이 기회만 되면 다른 별들을 먹어 치우려 하는지를 알 것 같았다.

‘중독될 것 같군…… 으하하하하!’

별의 조각만 먹어 치운다면 단순히 별빛만 밝아질 뿐이나, 이렇게 별자리였던 것들을 먹는다면 놈들이 그동안 쌓았던 신화까지 송두리째 먹어 치우는 것이니 급이 훨씬 높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순간.

티그리스는 남쪽 화살과 해시계가 그동안 살아온 생애를 모두 짧게나마 체험할 수 있었고, 그들이 겹겹이 쌓아 올린 모든 권능을 가질 수 있었다.

영혼이 하나로 동화되면서…… 그는 남쪽 화살이 되고, 해시계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티그리스가 되었다가, 더 높은 격을 지닌 또 다른 티그리스가 될 수 있었다.

지금의 티그리스는 조금 전의 티그리스와는 전혀 다른 별개의 존재였다.

큰 별.

위대한 별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나, 다른 88궁과 충분히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실력은 되었다.

무한한 전능감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연합체에서 우리를 이곳에 보낸 것은 별의 조각도 조각이지만, 세계선의 상태를 꼼꼼히 살펴보라는 의미도 있었으니…… 정찰병으로서의 소임은 다해야겠지.”

티그리스는 전능감에 도취되지는 않았다.

대신에 최대한 숨기고자 했다.

크로노스와 레아가 또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데다가, 아직까지는 다른 별들에게 실력을 숨길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이 세계선에 있는 별의 조각도 어떻게든 차지하고 싶었다.

오리지널에 있는 조각이라?

저것만 차지할 수 있다면 위대한 별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정말 운이 좋아 크로노스와 레아를 삼킬 수 있다면, 더 높은 자리까지도 노려볼 수 있을지 몰랐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희망에 불과할 뿐, 만용을 부려서 좀 전에 뒈진 두 놈을 따라갈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만약’이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그런 면에서 보자면, 티그리스는 다른 어느 누구보다 기다림의 미학을 잘 아는 사냥꾼이었다.

츠츠츠츠…….

티그리스는 다시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었다.

마치 먹이를 낚아채기 위해 조용히 수면 깊숙한 곳에서 움직이는 상어처럼.

그는 그림자 아래에서 아주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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