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839화 (839/862)

39화. 별의 조각 (5)

“많이 좁지? 누추하긴 하지만, 그래도 내 집이다 생각하고 편하게 지내렴.”

크로노스가 현관문을 활짝 열고, 레아가 자상하게 웃으면서 어서 들어오라며 손짓을 했다.

민채영은 현관 앞에 서서 선뜻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두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이게 좁…… 다고……?’

민채영은 자신이 세상에 나오지 않은 동안 ‘좁다’는 개념이 상당히 많이 변한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세샤의 집은 아주 컸다.

넓은 마당에는 잔디밭을 따라 화단이 아름답게 조성되어 있었고, 3층으로 이뤄진 전원주택은 보통 드라마에서나 보던 모습이었다.

10평 남짓한 좁은 단칸방에서 계부, 친모와 살을 맞대고 겨우겨우 살았던 민채영으로서는 어색할 수밖에 없는 광경.

현관과 거실로 이어지는 복도만 합쳐도 그 단칸방보다 훨씬 큰 것 같았다.

‘하긴…… 저렇게 대단한 분들이시니까, 당연히 부자시겠지. 그만큼 여유로우실 테고.’

하지만 민채영은 곧 레아의 말을 납득하고 말았다.

자신이야 ‘시작의 날’이니 뭐니 하는 것을 겪어 보지 못해 그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크로노스와 레아가 일반인의 범주를 훨씬 뛰어넘을 거란 사실만큼은 쉽게 알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강하기 때문에 저리도 여유롭고 긍정적인 걸까?

아니면 여유롭고 긍정적이기 때문에 강한 걸까?

선후 관계가 어떻게 되는 건지는 알 수 없어도, 민채영은 이곳에 오는 내내 화목한 분위기만 풍기던 세샤의 가족들이 너무 부럽기만 했다.

민채영이 기억하는 부모님들은 항상 빚에 쪼들리고, 삶이 팍팍하기만 했었다.

그렇다 보니 두 분은 매일같이 얼굴에 피로가 잔뜩 묻어났고, 여유가 없어서 조금만 신경에 거슬리는 일이 발생해도 언성을 높이기 바빴다.

가정 폭력은 다반사였고, 집안에는 항상 술병들이 뒹굴었다.

친모가 자신을 버리고 도망친 것도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분을 용서했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해는 하고 있었다.

자신이 친모의 입장이라고 해도, 모든 게 막막하기만 했을 테니까.

매번 술에 절어 툭하면 폭력을 쓰기 일쑤인 남편에 엄마만 바라보며 대학 진학까지 돈이 계속 깨져 나갈 딸.

모든 게 절망스럽기만 한 상황에서 이 모든 걸 떨쳐 버리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건 결국 도망밖에는 없지 않았을까.

그렇기에 이따금 민채영은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만약 친모도 다른 일반적인 사람들처럼 좀 더 여유로웠다면.

그랬다면 자신의 삶도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었을까?

그래서 민채영은 섣불리 현관을 건널 수가 없었다.

여기에 발을 들이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내가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나는 과연 다른 삶을 살아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리고 그때.

“채영아.”

「……?」

한발 먼저 들어가 있던 세샤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냥 친구 집에 놀러 온 거뿐이잖아. 어렵게 생각하지 마.”

「……!」

민채영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화사하게 웃는 그녀의 모습에.

민채영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고마워.」

처음으로.

민채영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 * *

“다친 데는? 정말 없는 거지? 괜찮은 거지?”

“그렇다니까, 엄마. 친구도 보고 있으니까 그만해.”

아난타는 세샤의 소식을 듣자마자 부리나케 크로노스의 집으로 달려왔다.

딸이 위험할 뻔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크게 놀랄 수밖에.

사색이 된 채로 혹시 세샤가 다친 곳이 없나 싶어 이리저리 몸을 살피는 모습은 안타깝기까지 했다.

세샤는 괜히 엄마의 걱정을 산 것에 미안함이 앞서면서도, 민채영과 할아버지 할머니가 보고 있는 상황이 부끄럽기도 했다.

하지만 아난타는 한참 동안 세샤를 확인하고 난 뒤에야 겨우 안도에 찬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뒤, 살짝 날카로운 눈을 하고서는.

짜아아악!

손바닥으로 세샤의 등을 거세게 후려쳤다.

움찔!

보고 있던 민채영이 화들짝 놀랄 정도로 소리가 컸다.

“아악! 엄마! 아파!”

“아프라고 때렸지, 그럼 안 아프라고 때린 줄 알아?”

짜악! 짜아악!

“악! 그만하라니까!”

세샤는 어떻게든 아난타에게서 벗어나고자 했지만, 탑에서부터 이미 유명한 하이 랭커였던 아난타의 손길(?)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하여간 위험한 짓만 골라서 하지, 응? 무슨 일 벌어지면 재깍재깍 텔레포트 스크롤 쓰거나, 엄마 부르라고 했었지?”

사실 세샤는 네피림의 불꽃 말고도 이래저래 선택할 수 있는 대응책이 많았다.

세샤가 워낙에 어린 시절부터 세간의 이목을 사면서 살아온 데다가, 자칫 용인(龍人)이라는 사실이 들키고 나면 지구인들이 어떻게 나설지 알 수 없어 이런저런 대비책을 마련해 두었던 것이다.

시스템이 닫힌 지금도 사용할 수 있도록 계속 유지했었는데…… 정작 세샤는 그걸 사용할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 아난타로서는 갑갑할 수밖에.

하지만 사실 세샤도 세샤 나름대로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보름 전에 어머니와 다투고 난 뒤로 그녀는 아직도 어머니에게 사과를 하지 않은 상태.

그놈의 자존심이 뭔지, 죄송하다는 말만 하면 될 것을, 그런다면 어머니도 모두 이해해 주리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렇게 말씀드리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 때문에 괜히 아난타를 부르는 것이 어렵기만 했고, 잠깐 망설이는 사이에 암흑의 구에 갇히고 만 것이 다.

“채영아!”

「으, 응?」

“도망치자!”

세샤는 얼결에 대답하는 민채영의 손을 잡고 2층 계단 쪽으로 달렸다.

“저 녀석이!”

아난타는 기가 찬다는 얼굴로 세샤를 노려보다가, 곧 허탈한 얼굴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단 몇 시간 사이에 십 년은 족히 나이를 먹은 것처럼 몸이 무거웠다.

“너무 다그치지는 말려무나. 세샤도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닐 테니까.”

유일하게 세샤의 속마음을 알고 있는 크로노스가 따스하게 웃으면서 말하자, 아난타가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실 저도 답답한 마음에…… 못난 모습을 보여 드려서 죄송해요.”

“죄송하긴. 너처럼 아이에게 지극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자식들에게 여전히 미안한 마음이 앞서는 크로노스로서는 항상 그런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 ‘별’이라는 놈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것 같구나. 혹시 짚이는 건 있니?”

그러다 크로노스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아난타는 아주 오랜만에 신왕으로서의 면모를 볼 수 있었다.

“아뇨. 짚이는 게 전혀 없어요. ‘별’이나 ‘별자리’를 신위로 둔 신과 악마는 본 적이 있어도…… 스스로 별이라고 가리키는 자들은 들어 본 적이 없거든요.”

천교의 북두성군이나 남두성군, 멤피스의 타와레트도 있으며, 가까이는 옛 올림포스의 크리오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 증 어느 누구도 ‘별’이라는 단어를 종족 명처럼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전혀 별개의 존재로 봐야 한다는 건데…… 문제는 그 기원(起源)을 알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영혼은 혹시 없었나요?”

크로노스는 시간을 다스리며 죽음을 관장하기도 한다.

영혼을 회수해서 심문을 하는 건 어떠하냐는 의미였지만, 크로노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게 이상했다.”

“이상하다는 말씀은……?”

“스퀴테로 분명히 ‘베었단’ 말이지? 존재를 둘러싼 시간, 그 자체를 말이다. 그러니 죽음을 맞은 것인데, 영혼이 없었단 말이야.”

크로노스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마치 어디론가 휘발되었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융화되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구나. 존재도, 업적도, 신화도 있는데. 영혼은 없는 상태라니, 웃길 노릇이지. 나도 처음에는 놈들이 나를 속이는 건가 싶었으니까.”

아난타는 크로노스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영혼이 없는 존재가 가능하기나 한 걸까?

그렇다는 건 차정우의 옛 모습처럼 사념체만 남은 형태라는 건데…… 그렇다고 하기에는 또 신화를 쌓았다는 게 이상했다.

신화는 곧 영혼을 강화시켜 주는 재료.

그렇기 때문에 영혼이 없는 사념체가 신화를 쌓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수많은 굴레를 반복하면서 격을 쌓아 올렸던 차정우의 사념체는 특별한 예외일 뿐.

삶도 죽음도 없는 존재.

크로노스는 별이라는 것이 이 세계의 법칙에서 벗어난 이레귤러로만 보였다.

“어쩌면 그 ‘별’을 만들어 낸다는 별의 조각이라는 것이 영혼을 집어삼키는 건 아닐까? 조각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잖아. 완전하지 않은 것.”

그때, 레아가 조심스레 의견을 내놓았다.

크로노스는 순간 두 눈이 번뜩 뜨이는 기분이 들었다.

“불완전하니까 완전해지기 위해서 영혼을 삼키고, 그걸 기반으로 움직인다는 거지?”

“응. 대신에 잡아먹힌 영혼의 의식은 그대로 남아서는 조각을 움직이는 운영체제가 되는 거지.”

“섬뜩한 이야기로군. 그럴싸하기도 하고 말이야.”

크로노스는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만난 별들은 꼭 자유 의지를 지닌 것처럼 행동했으니까.

하지만 레아의 추측에 따르면, 그건 어디까지나 다른 조각을 찾고자 하는 별의 조각이 편의를 위해서 뒤집어쓴 거죽일 뿐.

정작 거죽은 그런 사실도 모른 채로, 자신이 완벽하다는 생각에 갇혀 조종당하는 인형에 불과하단 뜻이었다.

“그럼 민채영이라는 아이는……!”

『그 이상은 육성으로 언급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지 않으세용?』

그림자가 불쑥 치솟으면서 라플라스가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댔다.

크로노스는 그제야 자신이 말실수를 할 뻔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차 싶으면서도, 기묘한 시선으로 라플라스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 변태 토끼가 이렇게 속이 깊은 면이 있었나?

『오홍홍홍. 왜 그렇게 사랑스럽다는 시선으로 보시는 건가용?』

“……내가 쓸데없는 생각을 한 것 같구나.”

크로노스는 그냥 라플라스에 대해 판단 내리는 걸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이 녀석은 알면 알수록 그저 골치만 더 아프게 할 뿐이었다.

“하여간 일단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보가 너무 적어. 보니까 한두 놈이 아닌 것 같은데 근거지에 대해서도 아는 게 전혀 없고. 일단 정우 녀석부터 불러야 할 것 같은데.”

크로노스는 팔짱을 끼며 난감하다는 투로 한숨을 내쉬었다.

“새아가, 정우는 연락이 되니?”

아난타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최근에 급증하고 있는 세계선 때문에 정신이 없는 것 같았어요. 연락을 보내도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어쩌면 그 갑작스러운 분화와 이번 놈들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세계선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별의별 놈들이 다 튀어 나올 소지도 크니.”

자신들이 여태 알고 있던 우주나 세계의 환경은 이제 많이 다를지도 모른다…… 크로노스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차정우가 가족들에게 누누이 말하던 바이기도 했다.

‘차연우’라는 형상을 찾기 위해 시작된 세계선의 분화는 이제 차정우도 감당하기가 벅찰 정도로 계속 늘어나고 있는 상황.

인과율의 조정자라는 신위를 두고 있어 어떻게든 제어를 하고 있지만, 그의 이목을 피해서 무언가가 비밀리에 움직여도 절대 이상하지 않았다.

어쩌면.

세계가 많아진 만큼 ‘황’을 향해 달려갈 가능성을 품은 존재들이 그만큼 많아질지도…….

어쨌거나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민채영을 이쪽에서 보호하는 동안에 별인지 뭔지 하는 놈들의 접근이 계속될 거라는 것.

어쩌면 탑에서의 시절보다 더 복잡한 일에 휘말릴지도 몰랐다.

“일단 별에 대해서 조사하면서 채영이가 찾는다는 사람도 따로 찾아 주는 건 어떨까요? 어쩌면 이번 일과 어떤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러자꾸나. 십 년도 넘게 눈을 뜨지 않았던 아이가 저렇게 갑자기 눈을 떴다는 건 분명히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

이미 가족들은 세샤로부터 민채영에 대한 자세한 사연을 모두 들은 상태.

민채영을 조사하면서 소망을 들어 주다 보면 다른 뭔가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게 공통된 의견이었다.

“찾는 아이의 이름이 뭐라고 했지?”

“손재원이요. 정확하게 14년 전에 지금 세샤가 다니는 학교에 재학했었고, 말이 없는 편이었다고 해요.”

“부모나 다른 가족 관계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고?”

“예. 아시는 것처럼 매일 학교에 일찍 나왔고…… 눈에 크게 띄는 편은 아니어도 이따금 재지가 뛰어났다고 하네요.”

“첫사랑인가 보군?”

“이이는. 그런 건 왜 궁금해해?”

레아가 크로노스의 무릎을 가볍게 찰싹 때렸다.

“나도 나이를 먹었나. 꼬마들 러브 스토리 들으면 가슴이 간질간질하더라고. 우리 젊었을 때 생각도 좀 나고?”

“하여간 주책은.”

"흐흐흐."

레아는 두 눈을 살짝 홀기면서도 싫지 않은 눈치였다.

크로노스가 가볍게 웃었다.

“그나저나 손재원…… 손재원이라! 흠! 그렇단 말이지?”

크로노스는 턱을 쓰다듬으면서 헛웃음을 홀렸다.

아난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세요? 혹시 아시는 이름이 세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크로노스는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여기서 또 ‘손’ 씨가 나와서 말이다. 뭐, 실제로 관계는 없겠지만, 아무래도 좀 불안해져서…… 허! 이것도 나이를 먹어서 괜히 그런 건가. 걱정만 많아졌구나.”

"……?"

"……?"

레아와 아난타는 크로노스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크로노스는 손사래를 치면서 헛웃음을 흘렸다.

“그런 게 좀 있다. 그런 게 좀……."

대한민국에 '손’ 씨 성을 가진 사람은 아주 많다.

이 나라의 학생이었다니 한국인이겠으나, 가능성을 넓혀 중국과 일본, 북한, 베트남 같은 동아시아를 합치면 못 해도 수천만 명은 나올 테지.

그러니 단순한 우연에 불과하겠지만.

그래도 어쩐지.

크로노스는 이상하게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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