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841화 (841/862)

41화. 제3지대 (1)

“저 인간이 갑자기 여기서 왜 나와!”

차정우는 책자를 읽다 말고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드디어 연우에 대한 행적을 찾아낸 셈이었으니까.

다만, 그가 왜 이렇게 늦게 나타난 건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시간적 공백이 커도 너무 컸다.

다중우주와 평행우주라는 것은 분명히 시간의 흐름이 저마다 달라 상당한 시차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래도 그 격차에는 ‘한계’라는 것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연우가 오리지널-세계선 #0에 나타난 시점은 ‘첫 번째 별’인 무왕 나유가 해체된 것을 알게 된 시점에서부터 상당한 격차가 있었다.

대략…… 못해도 만 년 단위쯤은 아주 우습게 알 만한 시간.

스스로를 ‘별’이라고 가리키는 이들이 무수히 많이 발생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대체 어디서!”

그런 이들이 발생하는 동안, 차정우가 전부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세계를, 우주를, 섭리를, 모든 것을 기계 장치로 여기며 그것들을 관리하고 조율하는 전능자(全能者).

그리고 기계 장치에서 도출되는 모든 기록들을 책자로 정리하고, 보관하는 서고지기. 혹은 사서(司書).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특성인 ‘퀴리날레’를 극대화시키면서 그것을 세계의 섭리와 입체화시킨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차정우는 이미 인과율(困果律),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맡고 있는 신위에 대해 세상 누구보다 가장 큰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고, 그에 걸맞은 책임감을 보여 왔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수많은 의문에 둘러싸인 채, 스스로를 되돌아봐야만 했다.

-나는 정말 제대로 일을 하고 있던 게 맞는가?

-나는 제대로 세상사를 모두 관장하고 있었던가?

-혹시 뭔가를 놓치고 있었던 건 아닌가?

-바쁘다는 핑계로 직무 유기를 했던 것은 아닐까? 정신이 없다는 이유로 중요하게 들여다봐야 할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이제야 와서 뒤늦게 뒷북을 두들기는 건 아닐……!

“거기까지만 해.”

차정우가 자괴감이 주는 늪에 허덕이고 있을 때,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천마가 가만히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가 준 깊은 울림이, 흔들리던 영혼을 강제로 깨워 준 모양이었다.

천마는 모든 것을 알고자 한다면 알 수 있다.

그건 일개 필멸자나 초월자들은 물론, 같은 ‘황’도 포함되는 이야기.

그가 엿보지 못하는 것은 동급인 칠흑왕밖에는 없는바.

그러니 차정우가 혹시 자신이 뭔가를 놓치고 있었던 걸까 하는 생각에 매몰되던 것을 깨 준 것이다.

‘……내가 심각했나 보구나.’

차정우는 자신을 걱정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샤논과 녹턴을 보면서 쓰게 웃고 말았다.

천마는 팔짱을 끼면서 시큰둥한 투로 말했다.

“네 책임 아니니까 걱정 마라. 따지자면 이건 죄다 내 직무 유기에 가까우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음."

차정우의 질문에 천마는 관자놀이를 벅벅 긁으면서 뜸을 들였다.

설명하기가 어려워서 그런 게 아니라, 숨기고 있는 뭔가를 드러내기 찝찝해서 그런 것 같았다.

『거 혼자만 알고 있지 말고 숨기는 거 있으면 싸게 싸게 내놓으…… 헤헤헤헤. 말이 그렇다는 거지 뭘 그렇게 인상을 구기고 그러십니까요. 그러다 잘생긴 얼굴에 주름만 늘지 말입니다. 헤헤헤헤. 혹시 필요 한 거라도 있으실깝쇼?』

샤논은 천마가 슬쩍 주먹을 들어 보이자 재빨리 굽실거리면서 양손을 파리처럼 비벼 댔다.

저대로 뒀다간 정수리가 땅에 닿을 기세라 천마는 그를 어이없다는 투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천마는 대답을 필요로 하는 차정우의 시선에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이 도서관에 있는 지식들…… 영지(靈知)가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알고 있지?”

“전 우주 곳곳에 퍼진 여러 생명체들이, 그 영혼으로 보고 듣고 이해하고 깨달으면서 쌓은 기록들이라고 천마께 배웠습니다.”

“맞아. 필멸자, 초월자…… 신, 악마, 용종, 거인족…… 뭐 하나 가릴 것 없이 '영혼’을 지닌 존재라면 누구나 지식을 쌓을 수 있다.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고, 기존의 섭리를 비틀면서 새로운 섭리를 창안하기도 하지. 그리고 그러한 결과물들은 모두 ‘빛’이 닿은 자리에만 가능하고.”

빛이란, 그저 단순한 물질이 아니었다.

그 자체로 세상을 구성하는 입자이고 끊임없이 확산하는 파동이며, 그 속도는 모든 물질을 앞서서 시간과 역사를 규정한다.

또한, 우주를 ‘확장’시키기 때문에 창조(創造)에 있어 가장 필수적이면서 기본적인 질료이기도 하다.

우주 창생 혹은 세계 창조의 과정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우주가 제자리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확장하면서 새로운 행성을 만들고, 문명을 태동시키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문명의 수가 많아질수록 그만큼 많은 초월자들이 자연적으로 탄생하게 된다.

그렇기에 빛이 닿은 자리에만 섭리가 구축되고, 우주가 탄생할 수 있다.

또한, 그 속에서 태어난 생명체들이 ‘관찰’할 수 있는 범위는 우주가 확장된 자리, 즉, 빛이 닿은 구역으로만 규정된다.

그리고 이때 도출한 결과들을 바탕으로 섭리를 ‘해석’하고, 이를 통해 ‘지식’을 쌓을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쌓인 지식은 문명의 발전을 이루며…… 더 많은 영지를 창공 도서관에다 실어 나른다.

'빛이 곧 지식을 의미한다’는 말은 바로 이 뜻이었다.

그러니 빛은 무한하게 사방으로 뻗쳐 나가고, 우주는 계속 커져 가며, 영지도 그만큼 차곡차곡 쌓인다.

거기에 완성(完成)이란 개념은 없었다.

계속되는 미완성(未完成).

그것이 곧 이 우주의 절대적인 진리였다.

천마는 바로 이 점을 이야기한 거였다.

“빛은 곧 나를 의미하니, 나는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계속 강해진다. 우주가 무한하게 확장할수록 빛이 머무는 구역도 그만큼 넓어지니까. 이전에는 '굴레’니 ‘꿈’이니 하는 것을 두고 칠흑왕과 엎치락뒤치락하느라 도중에 끊길 때도 많았지만, 이제는 그럴 걱정도 없지.”

“천마 님.”

“왜 그렇게 불러? 뭐, 내가 존경스 립긴 하겠지만 꼭 그렇게 볼 필요는 없……!”

“짧게 요약 좀 해 주십시오.”

천마는 한순간 멍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세상에 자신을 두고 저딴 식으로 말하는 놈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러다 뒤늦게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를 깨닫고 이를 갈았다.

빠드드득!

“……너 이 새끼, 하여간 누가 쌍둥이 아니랄까 봐 아주 똑같구나?”

“쌍둥이니까요.”

“진짜 딱 하루만 날 잡고 줘 패 버릴까……."

“그럼 파업할 건데요.”

“……제기랄.”

차정우가 창공 도서관에서 손을 놔버리면 그 일은 다시 고스란히 천마가 떠맡아야만 했다.

그리고 절대 그딴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는 게 천마의 다짐이었다.

그게 얼마나 중노동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이제야 겨우 손을 떼고 좀 놀러 다닐 수 있게 되었는데, 뭐?

파업?

파아아아어어어어업?

자신의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알았어! 빨리 말해 주면 되잖아! 빨리 말해 주면!”

악덕 노동자를 만난 힘없는 고용자라는 입장에 놓이게 된 천마는 자화자찬을 그만두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샤논이 차정우를 존경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건 그냥 무시했다.

애당초 연우와 연관된 이들은 하나같이 저 모양이었으니까.

“자, 그럼 빛이 닿지 않은 자리는 어떻게 될까?”

“……그야 우주 창생에서 한 발 떨어지는 것 아녔습니까? '낮’과 ‘밤’의 개념도 그래서 나온 거였잖아요?”

차정우는 천마가 던진 말의 의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혼세팔신을 비롯해 타계의 신들이 머무는 영역은 빛이 닿질 않아 ‘밤(녹스)’으로 분류되었고, 여기서 흘러나온 기록들은 여전히 창공 도서관에는 쌓이지 않는다.

애당초 관측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낮(에로스)’의 영역 안에서는 전지와 전능을 자랑한다는 천마도 그쪽의 상황에 대해서 깊이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차정우는 걱정하지 않았다.

‘밤(녹스)’의 영역은 그쪽대로 연우가 꽉 잡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 순간.

천마가 얄궂게 웃었다.

“‘낮’에도, 그리고 ‘밤’에도 속하지 않는 제3지대가 있다면?”

차정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건 샤논도, 그리고 녹턴도 마찬가지였다.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으니까.

그런 건 여태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말이었다.

“세계에 빛도, 어둠도, 그러한 개념도 없이 오로지 혼돈만이 가득했던 당시. 우주는 칠흑왕…… ‘밤’이 ‘아둔한 아버지’라고 부르는 존재의 ‘꿈’으로만 존재했었지.”

그것은 첫 번째 ‘굴레’…… 첫 번째 ‘꿈’이 시작되기도 전에 있었던 태초(太初), 그 이전의 역사.

지금은 알고 있는 이가 천마 외에는 거의 없다시피 한 비사였다.

“그러다 ‘꿈’ 한복판에서 갑자기 알 수 없는 원인으로 균열이 생겼고, 이윽고 그것이 커지면서 반고가 태어났다.

혼돈의 알이 깨지면서 비로소 빛이 생겨나 우주 창생이 시작된 거야.”

천마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이때 깨진 혼돈의 알에서 새어 나온 빛이 훗날의 ‘낮’이 되었고, 여기에 휘말리지 않은 영역은 ‘밤’이 되었다. 나는 운 좋게 그 빛이 되어 ‘낮’을 손에 쥐면서 ‘밤’을 되풀이하려던 칠혹왕과 계속 맞부딪쳐 갔고.”

여기까지는 차정우도 잘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그 혼돈의 알에서 태어난 반고를, 천마가 뒤늦게 흡수하면서 지금의 신위에 오른 것이 아닌가.

칠흑왕과 대립할 수 있는 힘은 바로 거기서 나온 거였다.

“하지만 깨진 알의 조각에 대해서는 아무도 신경 쓰지 못했다.”

차정우는 어렴풋이 무언가가 잡히는 것 같았다.

“사실 그럴 겨를이 없었지. 애당초 나는 아직 미약하기 짝이 없는 ‘낮’을 어떻게든 키워 보겠답시고 ‘밤’의 족속들을 두들겨 패느라 정신이 없었고, 칠혹왕은 계속 잠만 처자느라 신경도 쓰지 않았으니까.”

"……."

“그러다 보니 그 알의 파편들이 ‘낮’에도, ‘밤’에도 속하지 않은 채 세계의 이면(衰面)으로 흘러 들어가는 걸 깨달았을 때는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였고…… 그때는 이미 그것들이 죄다 이데아에서도 가장 깊은 저층을 이루게 되었지.”

천마는 찝찝해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관측도, 관찰도, 개입도, 어떻게 손을 쓰기에도 힘들 만큼 이쪽과는 아예 법칙도 섭리도 전혀 다른 '무언가’가 돼 버린 거다. 실질적으로 그곳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기도 하는 모순(矛盾), 그 자체니까.”

존재라는 것이 성립하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 번째는 영혼을 지녔을 것.

두 번째는 ‘낮’과 ‘밤’, 어디든 한쪽 영역에 똬리를 틀고 있어야 한다는 것.

그래야만 자유의사를 가지고 활동하는 것이 가능했다.

두 절대자의 손을 떠나 버린 세계에서는 그런 것이 불가능하다.

애당초 영혼이 자리 잡질 못하니까.

그 속에 뭔가가 있더라도 그것은 한낱 허깨비에 지나지 않으며, 어떤 사실이 있다 하여도 온통 거짓밖에는 되지 않는다.

애당초 없는 것이니까.

그래서 모순.

혼돈보다도 더 지독한 혼돈인 것이다.

“나조차도 그곳에 뭐가 있는지 모른다. 관심도 없고, 관심을 줄 일도 없었어. 그러니 나도, 너도, 연우의 시선도 피해서 여태껏 움직였다면, 바로 그곳을 경유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우리들의 눈 ‘밖’에 있는 건 거기밖에 없으니까.”

천마의 말은 거기서 뚝 끊어졌다.

“하……!”

차정우는 한참 뒤에야 자기도 모르게 긴 탄식을 내뱉을 수 있었다.

입가에는 씁쓸함이 어렸다.

“……이제는 뭔가 좀 알겠다 싶었는데, 아직도 이 세계는 제가 모르는 것들투성이네요.”

“뭔가를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지. 우리는 자유로워졌을 뿐, 우주와 세계가 존재하는 한 섭리는 계속 바뀌기 마련이니까. 나도 아직 모르는 것들투성인데, 뭐. 이데아의 저층에 깔리게 된 저 혼돈의 알 조각이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도 모르고. 또 다른 어디서 내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뭔가가 어떻게 나타날지 몰라.”

차정우는 천마의 설명 중에 유독 한 문장이 귀에 박혔다.

또 다른 어디서 내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뭔가가 어떻게 나타날지 몰라.

차정우는 한순간 시야가 확장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체감할 수 있었다.

세상은 정말이지 그가 모르는 미지의 것으로 가득하다는 걸.

“……그렇게 생각하면 애당초 태초의 우주 이전부터 있었다던 칠흑왕은 또 어디서 기원했는지 따져 묻는 걸로 수수께끼는 더 커지겠네요.”

“말했잖아? 그렇게 일일이 따지면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불가에 삼천세계(三千世界)라는 말이 있다.

수많은 세계를 하나로 엮은 것을 두고 일천세계라고 하고, 그러한 일천세계를 다시 일천 개만큼 엮은 것을 두고 이천세계라 하며, 이 이천세계를 다시 일천 개만큼 묶은 것을 두고 삼천세계라고 한다.

달리 대천세계라고도 부르며, 그 위에도 더 많은 개념이 무한하게 뻗쳐 나갈 수 있다고 말한다.

‘어쩌면 내가 인식하고 있는 세계의 범주는 삼천세계에만 국한된 것일지도 모르지.’

그저 어려웠다.

모든 것들이.

“연우 놈도 별의 조각을 쫓아서 그쪽을 거쳤을 수 있으니까, 일단 좀 더 확인해 보자고.”

차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천마는 그제야 조금 속이 편해졌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책자를 보는 시선에는 날카로움이 담겼다.

“크로노스, 이 자식 날 앞에다 두고도 못 알아본다 이거지?”

손재원.

손지호.

서은영.

그 이름들을 자신이 왜 모르겠나.

“두고 보자.”

조금 전에 파업을 운운하며 뺀질거리던 차정우에 대한 앙심을, 그 아버지에게 대신 전가하려는 건 절대 아니었다.

저어어어어얼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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