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842화 (842/862)

42화. 제3지대 (2)

‘저 사람이…… 소영이 삼촌?’

2층 난간 뒤에서.

민채영은 슬그머니 난간 아래쪽으로 고개를 내밀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곳에 머물면서 처음 보는 손님이었다.

마치 밤하늘을 옮겨 둔 것처럼 새카만 머리와 눈.

그리고 차분한 말투와 걸음걸이.

인상은 차가워 보이지만, 전반적으로 훈훈하다고 할 수 있는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어쩐지 겉보기에는 냉미녀 같아도, 막상 친해지고 보면 그렇게 순할 수가 없는 세샤와 닮은 것 같기도 했다.

하긴 따지고 보면 닮았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삼촌이라는 사람과 세샤의 아버지는 일란성 쌍둥이라고 들었으니까.

그리고 민채영은 가능하다면 내심 연우를 한 번쯤 만나 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도 했다.

그동안 세샤가 그에 대한 이야기를 워낙에 많이 한 덕분이었다.

가족들을 위해서 한평생을 희생하셨던 고마운 분.

그가 있어서 지금의 자신도, 어머니도,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거라고 했던가?

자세한 사정까지는 듣지 못했지만, 플레이어로서의 능력도 상당한 것 같았다.

그래서 세샤가 ‘삼촌’이라며 반갑게 부르는 소리에 연우가 나타났음을 깨닫고, 내심 기대에 차서 슬쩍 그를 엿보았다.

인사를 하고 싶어도 저쪽에서는 자신이 낯설기만 할 테니.

그런데…….

‘……무서워.’

민채영은 연우를 보자마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사실 그런 표현으로는 지금 자신이 느끼는 인상을 설명하기에 너무 부족했다.

아득한.

절대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어떤 것.

크다는 말로도 그를 표현하는 건 불가능했다.

어떻게 한계를 짐작하기 힘들 정도로 너무 까마득했으니까.

언젠가 지구의 크기를 설명해 주는 동영상을 본 적이 있었다.

우주상에 존재하는 여러 행성과 항성 따위를 지구에다 견주면서 지구가 얼마나 그리도 작은지, 다른 항성들은 그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그러한 항성들이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모인 은하군은 또 얼마나 큰지…… 또 그러한 은하군은 얼마나 있는 건지…… 가만히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홀리는 듯했었다.

그런데.

연우에게서 느껴지는 느낌이 바로 그때와 같았다.

아니, 더 컸다.

그때는 단순히 시각으로만 쫓아가면서 어림짐작으로 대충 크기를 가늠했던 것이라면, 지금은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으니까.

피이이잉-

머리 한편에서 무언가가 크게 울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여태껏 있는지조차 감지 못했던 기다란 실타래가 가볍게 튕기는 듯한 느낌.

민채영은 그게 무엇인지 몰라 자기도 모르게 움찔거렸고.

"……."

「…….」

곧 이쪽으로 고개를 든 연우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민채영은 화들짝 놀라 다시 난간 뒤쪽으로 몸을 숨겼다.

하지만 놀란 가슴은 쉽게 진정되질 않았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두근두근두근!

* * *

『낭군님! 흑흑. 너무하시와요. 저를! 저를 떠나신다니요! 소녀가 무엇을 그리도 잘못하였기에…… 너무나 무정하시옵니다……!』

말투만 두고 본다면 어디 사극에서 무정하게 떠나는 옛 연인을 원망하는 양갓집 규수…… 안타까운 처지에 놓인 아낙네인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아주 허스키하고 걸걸하며, 가녀린 척 연기하는 사람이 구릿빛 근육으로 뒤덮인 스킨헤드의 남자라면……?

“……시각을 포기하고 싶다.”

세샤는 한순간 진심으로 검지와 중지로 자신의 눈을 찔러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놈은 정말이지 시도 때도 가리질 않았다.

어떻게 삼촌한테 고자질하는 이런 순간까지도 저런 짓을 할 용기가 나는 건지.

이미 한 번 죽어서(?) 겁을 상실한 건지.

아니면 정말 그냥 맞는 게 좋아서 저러는 건지.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정확하게는 이해를 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세샤만큼이나 늘 라플라스의 괴행을 지켜봐 온 크로노스도 질린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유일하게 레아만은 ‘어머’하고 놀라더니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웃고 있었다.

예전부터 느꼈던 거지만, 할머니는 라플라스에게 관대해도 너무 관대했다.

그녀의 눈에는 라플라스가 아주 귀엽게 보인다나?

하여간 세샤로서는 알고 싶지 않은 심미안이기도 했다.

그리고.

“……라플라스.”

연우는 골머리 아파 죽겠다는 듯이 손으로 머리를 짚으면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탑에 있을 때도 저러더니.

여기서도 여전했던 모양이었다.

『넵, 주인님! 말씀하시와용!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신가용? 따뜻한 목욕물? 점심? 아니면……!』

소박맞은 아낙네 연기를 하다 말고, 라플라스가 몸을 팽이처럼 크게 한 바퀴 돌았다.

그러자 입고 있던 옷이 뿅, 뿅, 하는 깜찍한 소리와 함께 변하면서-세샤가 어린 시절에 TV로 보던 마법 소녀 만화를 따라 하는 것 같았다-메이드 복장이 되고 말았다.

치마의 양 끝단을 잡고 콧소리를 잔뜩 내기까지, 변신은 정말이지 한순간이었다.

특히 짧은 치마 아래로 드러난 새까만 다리는 무척이나 굵은 데다가 털까지 무성하게 자라 있어 세샤와 크로노스의 정신을 저 먼 곳으로 날아가게 만들었다.

연우의 얼굴에서도 감정이 싹 사라졌다.

핏기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대가리 박아.”

『어머, 엉큼하셔라. 저 치마 입고 있는 거 안 보이시나용?』

한쪽 눈까지 찡긋거리는 모습이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게 분명했다.

“……세샤야.”

“……네. 삼촌.”

“……미안하다.”

“……아니에요. 이제 익…… 숙해 졌어요. 하, 하하하……!”

물론, 세샤의 웃음소리에는 감정이 전혀 느껴지질 않았다.

어쩐지 라플라스는 연우가 돌아온 것에 기분이 더 업된 것 같기도 했다.

“혹시 집에 당근 있니?”

“당근이요?”

그러다 갑자기 연우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물건을 찾자, 세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움찔!

라플라스의 몸이 눈에 띄게 떨렸다.

홱!

세샤의 시선이 재빨리 그쪽으로 돌아갔다.

라플라스는 가볍게 휘파람을 불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굴고 있었지만, 세샤의 예리한 시선을 피할 수는 없었다.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야, 변태 토끼.”

『오홍홍홍. 왜 그러시나용?』

“너 머리에 땀이 잔뜩 맺혔다?”

『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용……! 오홍홍홍!』

“삼촌, 당근이라고 하셨죠?”

“어.”

“잠시만 기다리세요. 어제 요리한다고 썰어 두고 남은 게 있거든요.”

뭐가 뭔지 몰라도 분명히 저 변태 토끼의 약점을 잡은 게 분명하다!

세샤는 당장 부엌으로 달려가려 했고, 라플라스는 두 눈을 부릅뜨면서 그쪽으로 몸을 날렸다.

『세샤 님! 스토오오옵!』

하지만 라플라스의 거구가 떠오르기 전에 그림자가 움직였다.

라플라스의 의지를 거스르고, 그림자는 촉수 수십 개를 토해 내면서 녀석을 꽁꽁 묶어 바닥에 내리꽂았다.

쾅!

『안 돼애애앳!』

아무리 세게 때려도 오히려 기분 좋다면서 하악거리던 라플라스가 정말 진심으로 울부짖고 있었다.

그사이 세샤는 냉장고에서 빨간 당근을 가져와 라플라스 앞에 흔들었고.

『히이이익!』

라플라스는 혹시 당근이 자신에게 닿기라도 할까 봐 몸을 힘껏 반대쪽으로 밀면서 비명을 질렀다.

『치워 주세요! 제발요! 제발제발제발……! 저리 좀 안 보이는 곳으로……! 끼아아악! 당근 물이 떨어지……! 아아아아악! 닿았어, 닿았다고! 내 피부가! 내 우유 피부가 썩어! 썩는다구! 아아아아악!』

"……."

라플라스는 안색마저 창백해진 채로 당근을 정말 ‘무서워’했고, 그러다 당근을 씻고 난 뒤에 남아 있던 물방울이 발끝에 떨어지자…… 그야말로 난리를 피워 댔다.

정말 손도 대서는 안 될 혐오스러운 뭔가에 닿기라도 한 것처럼.

세샤는 혹시나 정말 녀석의 엄살처럼 피부가 녹기라도 하는 건가 싶어서 물이 닿은 곳을 확인해 봤지만, 물방울은 그냥 라플라스의 다리를 타고 아무렇지 않게 흐르기만 했다.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했다.

하지만 녀석은 그마저도 너무 싫은지, 거실 한가운데에서 이리저리 데굴데굴 굴러 댔다.

세샤도 크로노스도 전혀 생각지 못한 상황이라 금붕어처럼 입술을 벙긋거리면서 멍하니 연우를 쳐다봤다.

대체 이 녀석이 왜 이러냐는 투.

연우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나도 이유는 몰라. 하지만 저놈이 이상하게 당근을 엄청 무서워하더라고. 아, 양파도 무척 싫어했으니까, 나중에 한 번 써 봐.”

세샤는 정신이 또 한 번 더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조금 전과 이유는 달랐지만.

둘 모두 라플라스가 원인이기는 했다.

‘토끼가 당근 혐오자라니…….'

실제로 토끼가 당근을 무척 좋아한다는 건 어떤 미디어 속 유명 캐릭터가 만들어 낸 속설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딱히 싫어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라플라스는 아예 정반대인 모양이었다.

이 변태 토끼는 정말이지 상식과 비상식의 기준이 어디인지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그렇단 말이지?’

씨익!

지금 상황에서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당근을 바라보는 세샤의 입꼬리가 크게 말려 올라갔다.

마치 그 모습이 맛있는 먹이를 발견한 라플라스의 그림자처럼(?) 아주 잔혹해 보였다.

“삼촌, 그놈 좀 제대로 잡아 주세요.”

“그래.”

더 많은 그림자 촉수가 불쑥 솟구치면서 라플라스를 칭칭 감았다.

누에고치라도 되는 것처럼 이제는 아예 움직이기조차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으흐흐…… 흐흐! 흐흐흐흣!"

세샤는 단전 깊숙한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웃음기를 도저히 참을 길이 없었다.

라플라스가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길 때마다 웃음소리가 더 기괴하게 커졌다.

쿵!

쿵!

라플라스에게는 그녀의 발소리가 마치 사형 집행인의 발소리처럼 아주 크게 들려왔다.

“으헤헤헤헤.”

『세, 세샤 님! 이, 이, 일단 지, 지, 진정하시는 게 어떠실까용?』

“진정? 지이이인저어어엉?”

세샤의 머리가 옆으로 꺾였다.

라플라스의 구릿빛 피부를 따라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 그, 그래용. 지, 진정하세용. 우, 우리 귀엽고 까, 깜찍한, 마, 마음씨도 넓은 세, 세샤 님은 타, 타인을 배려하는 따, 따뜻한 부, 분이시잖아용. 그, 그, 그러니까 그 휴, 흉측한 건 자, 자, 잠깐 내, 내려놓으시고……!』

“그래. 내려놓을게. 여기다가.”

세샤가 말한 장소는 바로 라플라스의 무릎 안쪽이었다.

『아, 아, 안……!』

“삼촌, 얘 입 좀 가려 주세요!”

『읍읍을! 으으으으읍!』

라플라스는 입이 꽁꽁 묶인 채로도 난리를 피웠지만, 연우의 속박을 완전히 거부할 수 없었고.

툭!

당근이 무릎 안쪽에 던져진 순간, 새된 비명을 질렀다.

『히에에에에엑!』

처절한 비명 소리가 집안을 가득 울렸다.

라플라스가 처음으로 기절했다는 것은 비밀 아닌 비밀.

물론, 그런 녀석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흑, 흐흐혹. 더럽혀졌어. 난 더럽혀지고 말았다고.』

라플라스가 우울함에 젖어 훌쩍이든 말든.

연우와 세샤 등 나머지 가족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소식도 없이 여긴 어쩐 일이냐? 그렇지 않아도 너를 찾을 생각이긴 했다만.”

“무슨 일 있었습니까?”

“그건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조금 뒤에 설명해 주마. 그보다 너는 무슨 입이냐?”

연우는 크로노스의 목소리가 유달리 착 가라앉아 있는 것을 깨닫고 슬며시 위쪽 계단 난간을 보았다.

거기선 익숙한 기운이 감지되고 있었다.

무왕을 닮은 기운이.

그것과 관련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연우는 우선 크로노스의 말마따나 자신의 방문 목적부터 이야기하고자 했다.

“아버지, 어머니.”

“뭘 또 그렇게 목소리를 착 까는 거냐? 사람 괜히 걱정되게.”

“부담 갖지 말고 말하렴.”

크로노스와 레아의 대답에 연우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결혼하겠습니다.”

"……."

"……."

"……."

전혀 예기치도 못했던 말.

순간, 크로노스와 레아는 물론, 세샤까지 입을 쩍 벌리고 말았고.

그중에서 가장 크게 놀란 크로노스는 헛웃음을 흘리다가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이쪽 이야기가 훨씬 더 길어질 것 같으니, 약주라도 하나 가져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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