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843화 (843/862)

43화. 제3지대 (3)

또르르-

유리컵에 양주가 한가득 담겼다.

얼음이 달그락 소리를 냈다.

“너.”

“예, 아버지.”

“……딴 여자 생긴 건 아니지?”

순간, 연우는 가만히 크로노스를 바라봤다.

"……."

"……."

그렇게 한순간 적막이 흐르고.

“……농담, 아니셨습니까?”

연우는 크로노스의 눈빛이 진지한 것을 보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크로노스는 여진히 진지했다.

“얘야, 네가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다만, 그래도 사랑이라는 감정에는 의리도 포함되는 거다. 근데 너를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려준 아이를 내버려 두고……!”

“아버지.”

“그래, 아들아.”

“헛소리하실 거면 달나라에나 가서 하시죠.”

크로노스는 계면쩍은 업굴로 볼을 긁적였다.

“……아냐?”

“그랬다가 에도라한테 머리채 잡힐 일 있습니까? 그리고 딴 여자는 굳이 필요하지도 않습니다만.”

“그럼 어떻게……."

“‘굴레’를 감는 능력은 어디 도박판에 묻어 놨을까 봐요?”

“어……? 그러네?”

“어머니. 아버지가 은퇴하셨다고 이제 이렇게 당연한 것도 너무 옛날 일처럼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그러게나 말이다. 안 그래도 요즘 뭐만 하면 계속 깜빡깜빡하지 뭐니. 네가 이해하렴. 요즘 머리도 좀 많이 빠지는 것 같고……."

레아의 푸념에 크로노스가 발끈하 면서 일어났다.

“내 머리가 뭐 어때서! 아직 멀쩡해!”

“좋은 발모제라도 하나 찾아 드릴까요?”

“그런 거 나도 할 수 있거든!”

“화가 나면 무의식적으로 그걸 인정하고 있는 거라던데……."

“아니라고!”

연우와 레아의 크로노스 놀리기는 한참 뒤에야 끝났다.

크로노스는 꿍한 얼굴이 되었지만, 그를 보는 레아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그런 남편이 귀여워 죽겠다는 듯.

연우는 그런 부모님의 모습을 보면서 엷게 웃었다.

자신이 원하던 모습이 바로 저러했으니까.

연우는 결혼을 결심하게 된 계기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크로노스는 토라져 있다가도 좋아하던 아이에 대한 이야기가 들리자 귀를 종긋거렸고.

레아는 ‘어머?’, ‘정말?’이라고 맞장구를 치면서 아직 만나지 못한 며느리에 대해 궁금해했다.

여태 에도라에 대해서는 크로노스에게서 듣기만 해 왔기에 가장 큰 호기심을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상견례를 치러야 할 것 같습니다.”

“어머! 여보, 우리가 상견례를 한대요. 너무 신기해.”

레아는 소녀처럼 까르르 웃으면서 즐거워했다.

그동안 많은 자식들을 가졌지만, 사실 그들 부부는 자식들의 결혼식에 참석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시기가 오기도 전에 크로노스가 마성에 물들면서 패란을 일으켜 제우스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나야만 했으니까.

그리고 부활을 이룬 뒤에도, 연우와 정우를 낳긴 했지만, 정우가 먼저 아난타를 만나 버렸으니 그럴 기회가 없었다.

그쪽은 애당초 사돈이라고 할 것도 없었고.

그러다 보니 연우의 결혼이 그들로서는 새롭기만 했던 것이다.

남들에게는 이게 전부 당연한 일이건만.

그런 걸 전혀 즐기지 못했었다는 사실에 크로노스는 쓰게 웃어야만 했다.

이렇게 즐거워하는 레아를 보니 너무 미안했던 것이다.

“그럼 사돈댁…… 은 영매, 그분만 나오시겠구나?”

크로노스는 ‘사돈’이라는 말이 조금 어색했는지 말꼬리를 흘렸다.

그런데.

“아뇨. 스승님도 나오실 겁니다.”

“음……?”

크로노스는 순간 이해를 하지 못했다.

스승?

“하지만 그 양반은……!”

“계십니다.”

“뭐?”

무왕은 분명히 ‘황’으로 각성했다가, 가이아의 저주에 의해 흩어졌…….

크로노스는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어떤 한 가지 생각에 미치고 말았 다.

“……뭔가 했구나.”

“예. 그래서 말씀입니다만.”

연우는 도중에 말을 끊고 고개를 위로 들었다.

크로노스와 레아의 시선도 저절로 그쪽으로 향했다.

2층 난간 쪽.

민채영이 있던 자리였다.

“조금 전에 유령 소녀 한 명이 있는 걸 봤습니다만, 익숙한 기운이 느껴져서요.”

“익숙한 기운?”

크로노스의 질문에 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그 아이가 ‘별의 조각’이란 걸 갖고 있지 않습니까?”

"……!"

"……!"

순간, 크로노스와 레아의 두 눈이 커졌다.

“역시 맞군요.”

연우의 말에 크로노스가 먼저 정신을 차렸다.

“무왕…… 아니, 사돈댁과 그 조각인지 뭔지 하는 게 관련이 있는 거구나?”

연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별의 조각이란 건, 스승님이 승화(昇華)하시면서 남긴 영혼의 조각입니다.”

크로노스와 레아는 그제야 어떻게 자신들의 인지 범위 바깥에서 그만한 존재들이 탄생할 수 있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크로노스의 기억 속에서, 무왕은 괴물이었다.

홀로 아스가르드를 전멸시키고, '의지’만으로 ‘황’에 올랐던 괴물 중의 괴물.

만약 탑의 시스템이 아니었더라면 올포원이라는 존재는 그를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건 천계의 다른 존재들도 마찬가지였을 테지.

신왕이었던 그로서도 도저히 한계를 짐작하기 힘들었던, 논외의 존재인 것이다.

그러니 그만한 존재가 '황’이 되면서 남긴 조각이라면…….

'품고 있는 것만으로도 괴물이 되기 충분하지.’

크로노스가 만난 〈별〉이라고 해 봤자, 단 셋밖에는 없었지만, 그들 하나하나는 웬만한 ‘짐승’쯤은 쉽게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세계선을 삭제하면서 그 속에 있던 신화를 모조리 먹어 치운 존재이니 그게 당연한 것일 테지만.

그만한 진화를 가능하게 한 원동력이 무왕이 남긴 조각이라면 이 상황이 저절로 이해가 되었다.

“그럼…… 저 아이는 어떻게 되는 것이냐?”

크로노스는 긴장된 얼굴로 연우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별의 조각을 품은 존재는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밟을 수밖에 없다.

세계선에서 넘어온 다른 별에게 조각을 뺏기고 잡아먹히거나.

아니면 조각을 소화하면서 완전한 별로 거듭나거나.

만약 연우가 민채영에게서 별의 조각을 강제로 회수하겠다고 선언한다면, 그 과정에서 민채영이 다치게 된다고 해도 그것을 말릴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아마도 자신과 레아는 그런 연우를 막으려 들 것이다.

그동안 민채영과 보낸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고 해도, 이제는 딸처럼 여기고 있었으니까.

연우는 그런 아버지의 표정에서 모든 생각을 읽고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 저 그렇게 막 나가는 놈은 아닙니다만?”

“그럴 리가.”

“대체 저는 아버지한테 어떻게 인식이 박혀 있는 거죠?”

“인성‘황"?”

“그 인성이 유전이란 생각은 안 해 보셨습니까?”

“당장 사과해라.”

“또 뭔 소리를……!”

“그동안 너희들을 위해 희생해 왔던 네 엄마에게 대체 무슨 망발이냐!”

연우는 ‘양심은 있으세요?'라는 얼굴로 크로노스를 바라봤고, 레아는 저 못 말리는 남편이 또 시작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혼들었다.

“하여간 걱정 마세요. 조각을 회수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으니까. 이미 이곳으로 오면서 몇 개는 수거했거든요.”

“별이란 놈들은?”

“만났죠.”

“불쌍하군.”

“그런데 몇몇 개체는 확실히 쉽게 여겨서는 안 될 것 같았습니다. 아예 세계선과 우주, 그 ‘밖’으로 완전히 나가 버리는 개체도 있는 것 같고요.”

“바깥? 타계를 말하는 거냐? 그러니까 ‘밤’ 말이다.”

“아뇨. 그것과는 다른데…… 음, 설명하기가 어렵네요.”

연우는 말을 잇다 말고, 도중에 뭔가를 떠을렸는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이럴 게 아니라 직접 이야기를 듣는 게 낫겠군요.”

"……?"

"……?"

크로노스와 레아가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으려는데.

파아앗!

연우가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 * *

‘……〈아둔한 어둠〉! 설마 했는데 왜 저 작자가!’

허수 세계(虛數世界)라는 것이 있다.

동전에 양면이 존재하듯, 현존하는 현실 세계에도 이면(衰面)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으니.

이것은 그림자처럼 따라붙으면서도, 절대 외부인들에게 관측되지는 않는다.

각 세계선에서 쏟아지는 온갖 사념들을 모조리 먹어 치울 뿐만 아니라, 혼히 ‘타계’라고 부르는 ‘밖’…… '밤’의 영역의 이면에도 해당하기 때문이었다.

그 기원은 반고가 나왔다는 알의 껍질.

그 자체로 세계가 되고 싶어 하는 기원(祈願)을 가졌지만, 절대 그러한 바람을 이룰 수는 없는 곳이었다.

별의 집단들은 바로 이러한 허수 세계에 드나들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언젠가 천마가 말한 제3지대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다.

그래서 티그리스는 이러한 허수 세계에 몸을 감춘 채, 거울에 비치는 상(像)을 엿보고 있었다.

그들이 그동안 크로노스나 레아 같은 개체들에게 존재를 들키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이와 같은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티그리스는 아주 조심히 허수 세계를 지나면서 크로노스와 레아를 관찰하고 있었다.

언제든 기회가 생기는 즉시 별의 조각을 품은 민채영을 이쪽으로 납치하기 위해서…….

그런데 의도하지 않게 목격하게 된 것이다.

그들이 ‘아둔한 어둠’이라 부르는 칠흑왕의 자아를!

천마…… ‘지고한 빛’과 함께 아직까지 절대 부딪쳐서는 안 된다고 평가받는 절대적인 존재들.

실제로 실수로 칠흑왕과 마주쳤다가 ‘삭제’를 당한 동료들도 적잖게 있었다.

천마는 창공 도서관에 처박혀 아직도 자신들의 존재를 읽어 내지 못한 듯 보이나, 칠흑왕은 조각을 계속 수거하러 다니는 것으로 보여 주의가 필요했다.

그래서 티그리스는 당장에 자리를 뜨고자 했다.

이곳에 숨어서 연우를 더 감시해 볼까 하는 충동도 있었지만, 괜한 호기심으로 죽음을 재촉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다행히 칠혹왕이 아직 허수 세계에 직접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었……!’

다행이라면 칠혹왕은 우주와 세계,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존재.

그렇다 보니 허수 세계에 ‘개입’할 수 있는 수단이 전무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티그리스의 그러한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갑자기 눈앞의 공간이 갈라지나 싶더니, 엄청난 흡입력이 작용해 그의 육체를 거세게 끌어당기기 시작한 것이다.

어떻게 저항할 새도 없이, 티그리스는 마치 멱살이라도 붙잡혀 패대기쳐진 것처럼 힘이 가해지는 쪽에 강제로 빨려 들어가야만 했다.

“컥!”

콰아아앙!

티그리스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사색이 되고 말았다.

연우가.

바로 눈앞에서 멀거니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칠흑처럼 깊기만 한 두 눈을 본 순간.

덜덜덜…….

티그리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몸을 떨어야만 했다.

뱀을 만난 쥐처럼.

모든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이와는 절대 부딪치지 말라고!

“간섭을 못 한다면 그냥 이쪽으로 강제로 끌어오면 그만이지. 안 그래?”

연우의 차가운 미소를 보고 있으려니 티그리스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연우의 입가에 걸린 냉소가 더 짙어졌다.

“내가 뭣 때문에 널 잡았는지는 알겠지? 그러니까 알아서 불어.”

끄덕…….

티그리스는 연우가 당장 자신을 죽이겠다고 할까 봐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살기 위해서는 개가 되라면 개라도 되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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