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제3지대 (4)
“아, 진짜 뭐라고 말하는지 하나도 안 들리네.”
세샤는 마법으로 1층의 목소리를 엿들으려 했지만, 번번이 튕겨 나는 통에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이 되었다.
연우와 에도라의 연애 이야기는 사실 그녀로서도 관심사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마지막 순간까지 연우를 기다려 주었던 연인.
그녀에 대한 사연을 들을 때면 세샤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한 인연을, 과연 자신은 만날 수 있을까?
그렇게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생각해 보면, 선뜻 대답을 하기가 힘들었다.
자신은 자신이 봐도 자존심이 아주 대단했으니까.
누군가를 망설임 없이 기다린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연우도 자신과 비슷한 성격이란 것을 감안한다면…… 결국 ‘사랑’이란 감정은 ‘나’를 최대한 죽일 수 있어야만 거머쥘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사랑이란 것이 참 어렵게 느껴졌다.
그래도 언젠가 찾아올 운명의 대상을 바라는 것은 사춘기의 소년, 소녀라면 누구나 꿈꿀 바람이었기에 버릴 생각은 없었지만.
그런데.
“……채영아?”
세샤는 뒤늦게 민채영이 한쪽 구석에서 깊은 고민에 잠겨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녀를 불렀다.
「으응? 어어어?」
민채영은 세샤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샤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어?”
「아니, 그게 아니라…… 어, 그러니까……!」
민채영은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다가, 세샤가 계속 자신을 빤히 쳐다보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 그, 그……!」
“괜찮으니까 편하게 말해도 돼.”
「그게 너희…… 삼촌…… 말이야…….」
“삼촌? 연우 삼촌 말하는 거니?”
끄덕끄덕…….
“삼촌이 왜?”
「혹시…… 어떤 사람인가 싶어서…….」
"……?"
세샤는 순간 민채영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갑자기 연우 삼촌에 대해서는 왜 묻는 거지?
처음 보는 사람이라 관심이라도 생겼나?
그러다 문득 세샤는 2층 난간에서 연우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화들짝 놀라면서 몸을 숨기던 민채영의 반응을 떠올렸다.
그 모습이 꼭……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지?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
연우에 대해 묻는 내내 세샤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다.
그러면서 슬쩍슬쩍 눈치를 보는 것이……!
띠이이잉.
세샤는 한순간 정신이 멍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고 말았다.
뒤통수를 맞은 듯 뭔가 얼얼한 기분.
물론, 연우는 조카인 자신이 봐도 잘생기고 키도 훤칠해서 인기가 많을 만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래도……!
척!
세샤는 민채영의 양어깨를 세게 붙잡았다.
“채영아.”
「으응?」
민채영은 얼결에 대답하며 세샤와 마주 보았다.
어쩐지 자신을 쳐다보는 세샤의 눈빛에 힘이 잔뜩 실렸다.
“안 돼.”
「……?」
“삼촌이랑 나이 차가 얼만데? 지금 네가 느끼는 건 그냥 사춘기 시절에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잠깐의 감정적 충동일 뿐이야.”
「……??」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잖아? 그러니까 우리 삼촌보다 좋은 사람은 아주 많을 거야.”
「……???」
민채영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세샤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세샤는 그걸 깨닫고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말았다.
아무래도 이대로 말을 빙빙 돌려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충격 요법을 써야 할 듯했다.
세샤는 이 여리고 착한 친구의 마음이 덜 다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으니까.
“잘 들어, 채영아.”
「응…….」
“우리 삼촌 임자 있어.”
「……응?」
“아주 예쁘셔. 아아아아주우우우우. 그러니까 우리 삼촌은 단념하는 게……!”
「그, 그런 거 아니거든!」
민채영은 그제야 세샤가 어떤 오해를 했는지 깨닫고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세샤는 여전히 진지했다.
“첫눈에 반한다는 게 부끄러워할 건 아니니까……!”
「정말 아니야!」
“아냐?”
「그렇다구!」
“……정말로?”
「그래!」
“그럼 왜 그런 반응을……."
「그거야 너희 삼촌에게서 이상한 게 느껴졌으니까, 그게 뭐지 싶어서 물어본 거뿐이야!」
“응? 느껴져……?”
「응…….」
민채영은 그제야 자신이 연우를 보자마자 느꼈던 이상한 기분을 털어 놓을 수 있었다.
가슴이 막 두근거리고, 피가 빨리 도는 듯한…….
“……그거 딱 상사병에 걸렸을 때 반응인데?”
「아, 정말 아니야! 그러니까!」
민채영은 뭐라고 말해야 할까 싶어서 신중히 어휘를 선택해 가며 입을 열었다.
「막 눈길이 가고.」
“어?”
「그러다 이상하게 눈이 마주치니까 어딘지 모르게 시큰거렸어.」
“으으음……?”
「그래서 계속 신경 쓰이는데…….」
“……맞는데, 상사병?”
「그러니까 그런 게 아니래도!」
민채영은 앙증맞은 주먹을 풍차처럼 휘휘 돌리기까지 했다.
「그리고 나! 좋아하는 사람 있거든!」
“뭐?”
세샤는 순간 충격을 받은 얼굴이 되고 말았다.
민채영이 연우에게 관심이 있다고 착각했을 때보다 더한 얼굴.
「그, 그게 충격받을 일은 아니잖아!」
“너무 순수해서 연애 감정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지!」
“어? 들켰나?”
「우쒸!」
민채영은 약 오른다는 듯 주먹을 꽉 쥐었지만, 그럴수록 세샤의 웃음은 더 크게 빵 터지고 말았다.
‘너무 귀엽잖아. 이런데 어떻게 안 놀리고 있을 수 있겠냐고.’
세샤는 어찐지 박유민의 마음을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곧 저 멀리 밀어 두었다.
“그럼 더 자세하게 말해 볼래? 삼촌 봤을 때 정확하게 어땠었는지. 혹시 마력 흐름이 느껴졌다면 평소와 달랐는지. 아니면 긴장되었는지, 꺼려졌는지, 그런 것들.”
그래도 계속 놀리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
세샤는 놀림이 더 길어졌다간 순한 민채영이라고 해도 정말 화를 낼 수 있겠단 생각에 진지한 자세로 귀를 기울이고자 했다.
민채영은 여전히 심통 난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곧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그게……!」
* * *
“그거 혹시 ‘조각’이란 거 아냐?”
「조각?」
세샤는 민채영의 설명을 자세히 듣고 난 뒤에 그런 결론을 내렸다.
민채영이 느꼈다는 갖가지 감각들은 아무래도 상사병이 아니라 ‘긴장’이었던 것 같았다.
눈앞에 뱀을 만난 쥐가 느끼는 것과 같은 류의 긴장.
‘내가 실수했네…….'
세샤는 곧장 민채영에게 사과부터 했다.
자신은 그 감정을 착각해서 장난을 치기까지 했는데, 민채영은 사실 두려움을 느꼈던 것이니.
친구가 처한 상황도 잘 알지 못한 채 그걸 놀렸다니, 화를 내더라도 할 말이 없었다.
다만, 민채영은 자신이 느꼈던 그 감각들이 긴장과 두려움이라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만약 민채영이 조금만 더 격이 높았더라면, 연우가 절대 항거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그만큼 위기감을 느꼈겠지만.
지금 그녀와 연우 사이에는 어떻게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까마득한 격차가 있었기에 도리어 위기감이라는 감정도 느끼지 못한 것이다.
눈 가린 장님이 코끼리 다리를 만졌을 때 그것이 코끼리 다리인 것을 모르듯.
민채영은 연우가 어떤 존재인지 좀처럼 감을 잡지 못했다.
다만, 그녀가 품고 있는 별의 조각은 연우를 느꼈던 모양이다.
조각과 영혼 사이에 어느 정도 동화가 이뤄졌다 보니, 그 반응을 민채영이 느꼈던 것이다.
민채영은 세샤의 사과에 괜찮다고 대꾸하면서도, 머릿속은 조금 복잡해졌다.
별의 조각이 뭔지 이제 조금씩 자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여기 있는 것도 전부 이것 덕분인 걸까?’
민채영은 ‘떨림’이 전해지는 왼쪽 가슴 부근을 어루만졌다.
심장이 뛰는 것 같다고 느꼈던 것.
그것이 바로 별의 조각이었다.
심장 박동은 조각의 떨림이었고.
지금도 연우가 근방에 있어서 그런지, 별의 조각은 잘게나마 떨리고 있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거기에 집중하고 있으면 조각의 모양이 얼추 느껴졌다.
그곳을 중심으로 천천히 도는 마력도 느낄 수 있었고.
‘단단해, 너무.’
아무리 입문자 수준이라지만, 이제는 민채영도 마법에 대해 배운 것이 있기 때문에 별의 조각이 품고 있는 에너지가 얼마나 대단한지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이것을 전부 소화할 수 있다면, 정말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까?
정말 저 밤하늘에 총총 박혀 있는 ‘별’이 될 수 있는 걸까?
소화가 끝나고 넘어서기까지 한다면.
세샤의 조부모님인 크로노스와 레아의 수준까지 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다면.
‘……만나 볼 수 있을까.’
언제부턴가 마법을 익히면서 민채영이 갖게 된 생각.
찾고 싶다.
자신에게 따스한 봄바람이 되어 주었던 그 아이를.
멀리서라도 좋으니, 설사 자신을 완전히 잊었어도 좋으니, 단 한 번이라도 보고 싶었다.
처음에는 그저 막연하게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뿐이었다면, 이제는 정말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겼다.
어쩐지 도와주겠다고 나섰던 크로노스와 레아가 힘들어하기는 했지만, 민채영으로서는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기도 했다.
‘확실히 다른 아이들과 많이 다르긴 했으니까.’
당시에는 스스로가 정신적으로 많이 쫓기는 편이었기에 크게 신경 쓰지 못했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그는 분명 신비로운 구석이 아주 많은 아이이긴 했다.
또래의 친구들과는 어딘가 전혀 다른…….
마치 혼자서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 같은…….
그리고 별의 조각과 함께 천천히 열리고 있는 영적인 지식을 통해 내다봐도, 그는 일반인들과는 전혀 달랐다.
던전과 게이트가 열리기 이전의 시대이긴 했지만, 어쩌면 크로노스나 레아와 마찬가지로 정체를 숨기고 지구에 있었던 신적인 존재였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니면 그와 연관된 존재이거나.
여하튼 그 정체가 무엇이 되었건 간에 민채영으로서는 ‘희망’이 생겼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했다.
자신에게도 능력이 생긴다면, 만약 크로노스와 레아가 찾아 주지 못하더라도, 그녀 스스로 온 우주를 떠돌아다니며 찾아도 되는 것이니.
‘물론, 그보다 먼저 이 조각부터 다룰 수 있게 되어야겠지만…….'
민채영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동안 억울하게 당하기만 하고, 수동적으로만 눌려 있던 삶이었지만.
그리고 지금도 자칫 별이니 뭐니 하는 놈들에게 쫓길 위험이 컸지만.
그것을 모두 이기고 떨쳐 내고 싶었다.
예전과 다르게 이제 자신에게는 세샤가 있고, 크로노스와 레아가 있지 않은가.
이렇게나 고마운 사람들이 있고, 가족 같은 분들이 있으니…… 어떻게든 일어날 수 있을 터였다.
그렇기에.
한편으로 다시 연우에게 생각이 미쳤다.
여전히 얼굴만 떠올려도 저절로 두려움을 부르는 존재였지만.
‘그분이라면 이 조각을 어떻게 다룰 수 있을지 아시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던 무렵이었다.
“그런데……."
「응?」
세샤의 말에 민채영은 상념을 멈추고 시선을 그쪽으로 돌렸다.
“조금 전에 너 좋아하는 남자가 있다고 했잖아.”
「그, 그, 그, 그건!」
다시 민채영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 었다.
“그거 혹시 전에 말했던 손……!”
「아아아아! 말하지 마! 안 들려, 안 들려! 와! 와와와와! 와아아아! 아아아아아!」
민채영은 온갖 괴성을 질러 대면서 손으로 귀를 막고, 시끄럽게 방을 돌아다니는 등 세샤의 말을 어떻게든 묻어 두고자 했다.
세샤는 그런 친구의 반응이 귀여워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연우와 에도라.
차정우와 아난타.
크로노스와 레아.
그리고 여기 있는 민채영과 손재원…… 이라던 아이까지.
사랑이라는 감정이 정말 어떤 것일지.
또 어떤 느낌을 주는 건지.
세샤는 너무 궁금했다.
* * *
……올포원은.
비바스바트는.
손재원은.
아니, 그들을 이루던 ‘껍질’이자 존재의 한 ‘조각’이었던 이는…….
연우가 처박아 둔 공허 한가운데 단단히 속박된 채 기나긴 꿈을 꾸고 있었다.
고난(苦難)…… 온통 괴로움과 어려움으로만 가득 차 있는 이 빌어먹을 세계에 발을 들이기 이전.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던.
그것이 행복인지도 모르고, 불평과 불만만 많아서 모두의 속을 썩이게 만들던.
그 시절 꿈을.
……재원아.
그 속에서.
그에게 있어 유일하게 웃음을 주었던 친구의.
추억의.
그리움의.
첫사랑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던 이의 목소리를 계속 듣고 있었다.
……안녕?
듣고 싶었지만, 결국 듣지 못했던 그 짧은 인사 한마디가.
그의 가슴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