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845화 (845/862)

45화. 제3지대 (5)

티그리스는〈별〉과 관련해서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모두 털어놓았 다.

만약에 제대로 말하지 않는다면 언제라도 연우가 그에게 손을 쓸 것 같았으니까.

남쪽 화살과 해시계의 조각을 삼켰다고는 하나, 연우에게는 절대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자존심?

그딴 게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살고 싶다.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티그리스는 이대로 뒀다간 자신의 삶까지 죄다 털어놓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쓸데없는 이야기까지 늘어놓았다.

그쯤 되자, 연우는 듣기 지겨워 그만하라는 듯 손을 가만히 들었다.

뚝!

티그리스는 거짓말처럼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러면서 두 눈동자만 조용히 굴렸다.

데구루루…….

이제 연우가 여기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목숨이 결정될 것이었으니.

등골에 식은땀이 돌 수밖에 없었다.

두근두근!

그의 그런 조마조마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크로노스와 레아는 그들끼리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결국 그 별인지 뭔지 하는 놈들이 죄다 뭉쳐서는 조각들을 모으고 다니는 중이다, 이거로군?”

크로노스의 말에 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요.”

“네가 돌아다니면서 싹 다 잡으려고 해도, 그럴 때면 귀신같이 허수 세계니 뭐니 하는 곳으로 침잠해서는 잡지 못했다는 거고.”

“예.”

“……‘낮’이니 ‘밤’이니 하는 정신 사나운 걸 겨우 끝내 놨더니 또 다른 게 튀어나오는구만.”

크로노스는 지겨워 죽겠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쨌든 모든 얘기를 듣고 난 지금.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연우가 앞으로 바빠질 거라는 것.

크로노스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허수 세계라는 곳에 갈 생각인가 보지?”

연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슬쩍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때마침 길을 안내해 줄 안내견도 생겼으니까요.”

"……!"

티그리스는 연우의 말뜻을 깨닫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원하던 대로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대로 계속 끌려다녀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는 사실에 안색이 창백하게 질리고 말았다.

* * *

연우는 올포원 때처럼 티그리스를 쇠사슬로 묶어 그림자 속 공허에다 처박았다.

그러지 말라고 발버둥을 쳤지만, 그런 것에 아랑곳할 연우가 아니었다.

그리고.

“저, 저거……?"

크로노스는 아무 생각 없이 공허 안쪽을 보다가 두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여겼던 얼굴이 어둠 속에 반쯤 파묻혀 있었다.

올포원.

비바스바트였다.

녀석 때문에 탑에서 유폐된 적이 있던 크로노스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는 상황.

하지만 이내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연우가 무왕을 만나기 위해 ‘작은 굴레’를 되감았다면, 자연스레 올포원과 만날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더군다나 그는 이미 연우와 함께 올포원을 처치한 적이 있는 상황.

그렇다 보니 원한도 이전만큼 깊지는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안타깝게 여겨 줄 이유도 전혀 없었다.

“저치는 왜 저기에다 처박아 둔 거냐?”

“굳이 손쓸 이유가 없었으니까요.”

“……그도 그렇다만.”

“그리고 올포원도 스승님과 마찬가지로 21층에 머물던 환영이 원형입니다. 그런데도 저만큼 오랫동안 확고하게 정체성을 유지하고, 형체도 흐트러지는 기색이 없어서 한번 제대로 확인해 보고 싶었습니다.”

확실히 올포원은 단순한 환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높은 격을 지니고 있었지.

그래도 크로노스로서는 찝찝한 마음이 들어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레아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런 올포원을 바라봤다.

그녀도 녀석이 그들 가족에게 어떤 악영향을 끼쳤는지는 잘 알고 있었지만, 저렇게 묶여 있으니 안타까운 마음이 든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가 천마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크로노스에게 들은 적이 있었기에 그만한 존재의 혈육이 뭐가 아쉬워서 저런 선택을 했을까 의문이 들던 중이었다.

“……어?”

레아는 올포원의 얼굴을 살피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항상 올포원을 감싸고 있던 빛무리는 공허에 완전히 집어삼켜져 본체가 훤히 노출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어찌 보면 앳되다 할 수 있을 정도로 젊은 얼굴이 보였다.

연우보다도 어려 보이는 모습.

연우와 크로노스의 시선이 저절로 레아 쪽으로 돌아갔다.

“왜 그러세요, 어머니?”

“왜? 무슨 일 있어?”

“저 아이……! 잠깐만.”

레아는 탁상에 놓아 뒀던 서류들을 이리저리 뒤져 보았다.

연우가 왜 그러나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는데, 크로노스가 뒤늦게 뭔가를 깨달았는지 두 눈을 부릅떴다.

“임자, 설마?”

“응. 뭔가 닮았다 싶었는데……."

레아가 빼 든 건 손재원의 인적 사항이 적혀 있는 서류였다.

좌측 모퉁이에 붙은 사진.

그리고 축 늘어진 올포원의 얼굴.

어쩐지 닮아 보였다…….

“……으으윽.”

그때, 올포원이 앓는 소리를 내면서 천천히 고개를 위로 들었다.

끔뻑이는 두 눈은 여전히 초점이 잡혀 있지 않았지만, 그걸로도 충분했다.

사진 속 얼굴을 옆에다 갖다 붙이니 똑같았다.

“그러고 보니 ‘손’ 씨……?”

천마의 얼굴들 중 유독 독보적인 행보를 보이며 본체인 천마와도 잘 어울린다는 손오공 역시 ‘손’ 씨이지 않았었나……?

물론,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걸 수도 있었지만, 크로노스는 그게 맞을 거란 직감을 강하게 받았다.

그쯤 되는 존재라면 단순한 직감이나 예감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가 없는 법이었다.

그리고.

한순간, 크로노스는 여태껏 기억이 흐릿하기만 하던 밴드 윌의 보컬, 손지호의 얼굴이 떠오르고 말았다.

천마가 바로 그곳에 있었다!

히죽 웃으면서.

“어, 어어어어어?”

크로노스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티그리스가 연우를 보면서 잔뜩 겁에 질려 식은땀을 뻘뻘 흘리듯이, 크로노스에게는 천마가 바로 그러한 대상이었다.

'이거 어쩌면 천마가 보고 있을지도……?’

천마의 성격이라면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꼬장을 부려도 이상할 게 없었다.

이걸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싶어 머릿속이 뱅글뱅글 도는 가운데.

어느덧 의식을 완전히 찾은 올포원이 이쪽을 응시했다.

“……날, 어떻게 할 생각이지?”

올포원의 깊은 두 눈이 연우를 바라보았다.

아무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는 착 깔린 목소리.

어찌 보면 저항을 포기한 채, 달관해서 처분을 기다리는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연우는 알고 있었다.

녀석이 언제든 이곳을 빠져나갈 기회만 노리고 있다는 것을.

‘나라도 그렇게 할 테니까.’

자신과 올포원.

둘은 다른 듯하면서도 비슷한 면을 많이 갖고 있었다.

그는 올포원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 신에 레아에게 물었다.

“어머니, 그런데 저자는 왜 찾으신 겁니까?”

연우는 탑에서 올포원을 흡수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기억도 어느 정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연우는 올포원이 천마와 마찬가지로 지구 출신이며, 본명이 ‘손재원’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채영이가 찾던 아이란다.”

“아까 그 아이 말씀이십니까?”

연우는 무언가 싶이는 바가 있어서 당장 위층에 있는 세샤에게 메시지를 날렸다.

『민채영이라는 아이, 아래로 좀 데려와 주겠니?』

『채영이요? 혹시 무슨 일 있으세요?』

『그런 건 아니다만.』

『으음…….』

『왜 그러지? 무슨 일이라도 있나?』

연우는 어쩐지 세샤가 민채영을 데리고 나오기를 꺼려 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게, 음, 채영이가 삼촌을 어려워하는 것 같아서요.』

『알 것 같군. 감각이 예민해서 그런 걸 테니 걱정 말고. 보여 줄 게 있어서 그래.』

『네. 알겠어요.』

위쪽이 어수선해진다 싶더니, 곧 세샤가 민채영을 데리고 1층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어……?」

"……설마?"

살짝 겁먹고 있던 민채영과 지친 기색이 역력한 올포원의 눈이 마주쳤다.

둘은 우두커니 서서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 * *

인과율.

그것이 정확히 어떻게 작용하는 건지 연우는 잘 모른다.

세계,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칠흑왕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위를 채우는 인과율이라는 항목은 동생이 관장하는 법칙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어떤 메커니즘으로 작동하는지는 몰랐다.

아니, 알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이 빚어내는 결과에서 흔히 ‘우연’이나 ‘운명’이라고 부르는 요소가 자연스러운 건지, 아니면 다분히 누군가가 남긴 장난인 건지, 그도 아니면 정말 수백 혹은 수천만 분의 일 확률로 벌어지는 일인 건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연우는 확신했다.

그건 아마 차정우도 잘 모를 거라고.

지금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올포원-손재원과 민채영의 만남.

이것을 과연 단순히 우연이나 운명이라 치부할 수 있는 건지…….

연우는 저 무의식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손재원의 기억 일부를 떠올리면서 그 속에 민채영이라는 요소가 아주 소중하게 담겨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이것은 나비 효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적인 존재로 활약하던 손재원이 무의식중에나마 민채영에 대한 그리움을 계속 남겼고, 이것이 인과율에 강한 영향을 끼치면서 나비 효과로 별의 조각이 민채영에게 닿은 것이 아닐까 하는…….

아니면 정반대로 별의 조각을 얻을 운명이었던 민채영이 손재원을 그렸고, 이 때문에 ‘굴레’를 되감았던 연우와 함께 달려와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간에 둘은 다른 사람의 시선은 전혀 알지도 못하는 듯, 서로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연우는 올포원을 묶고 있던 속박을 모두 풀어 주었다.

어차피 대부분의 힘은 거둬들였던 데다가, 어떻게 되찾는다고 해도 민채영이 있는 앞에서 난동을 피우지는 않을 거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던 것이다.

설사 예감이 잇나간다고 해도 쉽게 제압할 자신이 있었고.

연우와 크로노스, 레아, 세샤는 두 사람이 자기들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일부러 자리를 피해 주었다.

“허……! 저 인간 같지도 않던 작자가 사랑이라니.”

크로노스는 기가 차다는 얼굴로 몇 번씩이나 헛웃음을 흘렸다.

그가 기억하던 올포원은 사람의 형상을 벗어던지면서 인간의 인격까지 마모되어 항상 정의만을 부르짖던 성인(聖人)이었다.

‘말이 좋아 성인이지, 그 정도면 정의무새였지. 으으.’

그런데 그런 녀석에게서 저런 인간적인 면모를 보고 있노라니 기분이 묘해질 수밖에.

하지만 그렇기에 크로노스는 더 이상 올포원을 원망할 수 없게 되었다.

옛사랑을 다시 만난 모습에서.

죽어서도 잊지 못하고 서로를 그리워했음이 느껴지는 그 모습에서.

레아를 한 번이라도 더 보기 위해 수백 수천 번을 전생하던 자신의 모습이, 그리고 자신을 돌보기 위해서 스스로 타천을 결정했던 레아의 모습이 비쳤으니까.

레아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던 민채영을 애틋하게 바라보면서 잘되었다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제 되감겠습니다.”

연우는 허공을 짚었다.

날짜 감각이랄 게 없는 그들로서는 준비만 모두 끝난다면 상견례의 자리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거였다.

철커덩!

[‘굴레’를 되감으시겠습니까?]

끼기기긱!

굴레가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근데 저도 가도 돼요?”

얼결에 같이 따라나서게 된 세샤가 조심스레 묻자, 레아가 따스하게 웃으면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에도라 언니 만나고 싶다면서?”

“이제는 언니가 아니라 숙모죠! 히히. 맞아요. 꼭 다시 보고 싶었어요.”

민채영에게도 말했듯, 세샤에게 에도라는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예쁘고, 자상하고, 당당하던 모습.

인젠가 자신이 되고 싶은 모습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내세울 수 있을 정도로 롤모델이기도 했다.

끼기기긱-

주변 풍경이 휙휙 바뀌는 동안.

연우는 뒤늦게 무언가를 떠올리고 가족들에게 말했다.

“……혹시 마을에 도착해서 이상한 걸 보더라도 놀라지 마십시오.”

“이상한 거라니? 놀라면 뭐 얼마나 놀라려고. 너는 말이다. 이따금 보면 이 애비와 엄마가 평범한 삶을 살았던 것처림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어.”

크로노스는 기나긴 생을 살면서 별의별 일들을 다 겪어 보지 않았던가.

그렇다 보니 그렇게 호언장담을 했지만, 어쩐지 연우는 뭔가 찝찝한 얼굴이었다.

그러다 ‘굴레’ 되감기가 끝난 뒤, 크로노스는 연우가 왜 걱정을 했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허어……? 저게 무슨?”

레아와 세샤도 놀란 나머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외뿔부족의 마을 공터 한가운데.

연우와 에도라의 동상이 서 있었다.

"……."

"……."

"……."

세 사람은 순간 어떤 반응도 보이지 못한 채로 멍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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