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혼인 (1)
“호호호호! 이것 참. 이런 면모도 유전인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레아였다.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웃는 그녀는 어쩐지 크로노스를 보고 있었다.
그러자 크로노스가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마치 레아의 시선을 피하려는 것처럼.
그 모습에서 연우는 불현듯 무언가를 느꼈다.
“설마?”
“……아냐. 아무것도.”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하려고 했잖아.”
“아닙니다만?”
“너 이 새끼……!”
크로노스가 인상을 와락 구기자, 연우는 슬쩍 레아 뒤쪽에 가서 섰다.
“어머니.”
“호호호호. 실은 말이지, 네 아버지가 젊었을 때.”
“아아악! 안 돼! 말하지 마!”
“워낙에 자기 잘난 맛에 취해 살았지 뭐니. 그래서……."
“아아아아악! 안 들려어어어!”
크로노스는 어떻게든 레아의 말을 막기 위해서 길길이 날뛰었지만 통할 리 만무했다.
* * *
마을에 또 다른 소문이 퍼졌다.
“그 말 들었나?”
“또 무슨 말?”
“카인이 부모님을 모셔 왔다던데.”
“오? 오오오오! 오오!”
“그걸 본 마을 사람이 한두 명이 아냐.”
연우가 마을 한복판에 나타나 무왕이 있는 궐로 이동했다는 소문.
그것도 부모와 조카로 추정되는 이들을 데리고 왔단다.
확실히 대수롭지 않게 여길 만한 일은 아니었다.
현재 마을을 지배하고 있는 최대의 화젯거리는 바로 연우와 에도라의 결혼이었으니.
당연히 이런 빅뉴스를 놓칠 부족원은 아무도 없었다.
“보러 가자!”
“구경 가자!”
“으흐흐흐!”
“가즈아아아!”
그렇게 무왕의 궐은 수많은 부족원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하나같이 음침한 미소를 흘려 대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 다른 곳에 있음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공주님…… 시부모님을 모두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들었는데.”
“오, 참말인가?”
“어. 카인 쪽에 사정이 있었잖아. 그 때문이라던데.”
“시부가 될 사람이 크로노스고, 시모는 레아잖아? 그럼 그럴 만하지. 하여간…… 재미있겠는데?”
“그치? 으흐흐흐.”
그 도도한 에도라가 과연 처음 만나는 시부모 앞에서 부끄러워할까 아니면 평소와 다름이 없을까.
그들에게는 아주 흥미로운 주제가 분명했다.
그리고 여기에 양념으로 한 가지 더.
“근데 난 그것도 궁금하단 말이지.”
“오! 또 신경 써서 볼 만한 포인트가 있나?”
“아니, 왜. 카인이 부족장한테는 매번 대들더라도, 공주님 일에는 끔뻑 죽잖아.”
“그랬지? 결혼식도 언급하는 걸 어려워하던데.”
“그럼 상견례에서는 어떨까?”
“……긴장하는 카인이라는 게, 도무지 상상이 안 가네.”
“그러니 그걸 보러 가자는 게 아니겠나!”
부족원들의 생각은 하나같이 대동소이했다.
북적북적!
웅성웅성!
저마다 궐 안쪽을 조금이라도 엿보고자 이리저리 들썩이는 바람에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몇몇은 아예 몰래 숨어들어 볼까, 은신술을 시도해 보기도 했지만, 궐 주변에 둘러친 보호막 때문에 도저히 접근이 불가능했다.
“단순히 호신강기를 외부로 확장한 걸로 이런 보호막이라니. 정말이지 괴물이라니까.”
부족원들은 접근을 칼 같이 차단하는 무왕의 술수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어떻게든 허점을 찾고자 노력했다.
애당초 외뿔부족이라는 종족 자체가 도전과 모험 정신으로 똘똘 뭉친 반골 집단이 아니던가.
이런 식으로 꼭꼭 숨기려 드는 건 오히려 더 그들의 승부욕을 자극할 뿐이었다.
“은신술은 안 돼! 어쩌지?”
“차라리 부술까?”
“대체 어떻게? 가뜩이나 사람 같지 않은 양반이 이번에 초월까지 했다면서?”
“검진이라도 펼쳐 봐?”
“해 보자! 뭐라도 해 봐야지, 안 그러면 이거 답답해서 대체 어떻게 참으라고!”
부족원들 중에는 아예 힘으로 보호막을 부수는 걸 시도하려는 이들도 있었다.
물론, 그럴 때마다 반탄강기(返彈罡氣)가 저절로 일어나, 보호막에 가해진 충격파보다 배나 강한 반발력으로 그들을 모조리 튕겨 내기 일쑤였지만.
퍼퍼퍼펑!
쿠쿠쿠쿠-
“쿠에에엑……!”
“크허억!”
“역시…… 쉽지 않군!”
“그래도!”
“이 몸을 막을 수는 없지!”
“언제나 그러했듯 이번에도 이 난관은 어떻게든 넘는다! 으랏차차차!”
부족원들은 마치 마왕성에 진입하려는 용사 일당이라도 된 것처럼 그럴듯한 대사를 내뱉으면서 저돌적으로 보호막에 부딪쳐 갔다.
몇몇은 자신이 몇 초나 더 버텼다거나, 아주 작은 그을음이라도 남겼다면서 승부를 보기까지 했으니.
서로 간에 불어닥친 경쟁심은 부족원들을 자석처럼 끌어당기면서 어느새 무왕의 궐은 넘어서야 할 철옹성처럼 되어 있었다.
“……죄다 바보들만 모아 놨나.”
그런 놈들을 보면서.
대장로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투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았다.
젊은 놈들이고 늙은 놈들이고 할 것 없이 죄다 여기에 모여서는 저런 헛짓거리만 해 대고 있으니.
이 부족, 이대로 둬도 정말 괜찮은 걸까?
대장로는 진심으로 부족의 미래를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
물론, 그 미래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저 안에 있었지만.
* * *
쿵.
쿠쿠쿵.
아무리 호신강기를 몇 겹이나 세워서 보호막으로 삼는다고 해도, 마법을 쓰지 않는 이상 소음까지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주 미세하게나마 떨림이 전달될 수밖에 없었고, 무왕이나 크로노스쯤 되는 이들이라면 당연히 그걸 쉽게 감지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 건지, 떨림은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무슨 방법이라도 찾은 모양이었다.
같은 부족이라지만, 정말이지 대단한 양반들이다 싶었다.
“하하하핫. 많이 소란스럽지요?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이해해 주시기 바라겠습니다. 워낙에 우리 애들이 소란스러워서……."
무왕의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이어진 말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크로노스가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정적인 것보다야 활동적인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저도 이런 분위기는 워낙에 익숙해서요.”
크로노스는 외뿔부족의 분위기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어쩐지 어린 시절의 올림포스가 떠오르는 것 같았으니까.
우라노스의 철권 아래 세력 통합이 이뤄진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절.
올림포스는 언제나 크고 작은 내홍으로 조용할 날이 없었다.
우라노스가 있어서 내전이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대신에 그러한 열의를 경쟁으로 치환시켜서 매번 잦은 충돌이 벌어지곤 했던 것이다.
그리고 우라노스는 그것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올림포스의 전력을 끌어올렸었고.
이유는 다를지언정 외뿔부족과 비슷한 경우라 봐도 될 것 같았다.
혈기 끓는 부족원들.
승부욕 넘치는 분위기.
자유분방한 문화.
이 모두가 마음에 들었다.
만약 레아나 연우가 없었더라면, 채신머리 따윈 벗어던지고 이들과 같이 어울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양반도 그새 달라진 것 같고.’
크로노스는 마음 한편에 내려 뒀던 호승심이 조금씩 고개를 치켜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끊임없이 소생하는 아스가르드를 눈앞에 두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으며, 그들을 모조리 물리치는 것으로도 모자라, 나중에는 웃으면서 승화하기까지 했던 자.
같은 무인으로서 존경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 자리에 있는 무왕은 진짜 무왕이라기보다는 그것이 남긴 잔존 사념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크로노스의 눈에 무왕은 여전히 무왕으로 보였다.
“날도 날인데 술이라도 한잔하시겠습니까?”
“오, 좋은 술이라도 있으신가 보죠?”
“이런 좋은 날을 맞았을 때 따려고 묵혀 둔 게 있죠. 흐흐흐흐.”
“그건 설마……?”
“역시 사돈께서는 안목이 있으십니다. 맞습니다. 후아주입니다.”
“허! 이리도 귀한 것을……!”
뽕!
마개를 여는 순간, 술병에서부터 과일 향이 짙게 흘러나왔다.
무왕이 자신만만하게 웃었고, 크로노스의 입가에 군침이 싹 돌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어느새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대작을 시작했고.
레아와 영매는 다소곳하게 마주 앉아 자식들의 결혼 일정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식의 시기는 언제가 좋을까요?”
“아무래도 길일을 잡는게 좋겠죠?”
“외뿔부족에서는 길일이라 생각하는 일자가 어떻게 되실까요?”
길일을 맞추자느니, 신혼살림은 어떻게 하자느니, 패물은 또 이렇게 하는 게 좋겠다느니…… 연우와 에도라로서는 뭐가 뭔지 하나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아무래도 둘 다 결혼이 처음이다 보니 모든 걸 부모님께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정확하게는 양가 어머니들이 알아서 맞추는 것이겠지만.
사실 연우와 에도라 둘의 미래를 그리는 것이니 그들만의 생각으로 편하게 식을 잡고 싶어도, 크게 보면 올림포스와 외뿔부족이라는 거대 집단 간의 화합이라고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절대 소홀히 넘길 수가 없었다.
“따님을 너무 예쁘게 키우셨어요. 어찜 이렇게 고울까.”
그러다 이야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었을 때쯤, 레아가 따스한 눈으로 에도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곧 며느리 될 아이가 너무나 사랑스럽다는 투.
사실 레아는 마을에 들어섰을 때 살갑게 다가와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던 에도라의 모습에서 이미 마음 속으로 결혼을 허락한 상태였다.
물론, 연우가 좋아한다고 하여 데리고 온 아이이니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있다고 해도 반대를 하거나 할 생각은 애당초 없었지만.
그래도 어른을 대하는 태도에서부터 그녀가 얼마나 번듯하게 자라왔는지, 그리고 심성은 얼마나 바른지를 알 수 있었기에, 예상보다 흐뭇한 마음으로 결혼을 추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레아의 그러한 시선이 닿을 때마다, 에도라는 도리어 얼굴을 푹 숙이고 말았다.
두근두근두근!
분명히 전날까지만 해도, 아무리 긴장되더라도 두 시부모님께 살갑게 잘해 드려야겠다고 굳게 다짐했건만.
그리고 두 분을 뵈었을 때까지만 해도 다짐이 잘 이뤄지고 있다 싶었는데, 이 자리에 앉는 순간 그러한 것들은 모두 날아가고 말았다.
‘……어찜 좋아.’
감사합니다 하고 대답은 한다지만, 다른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자칫 자신이 꺼낸 화제가 두 분께 결례가 되는 건 아닌지, 부모님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못난 짓은 아닌지 몇 번이고 숙고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자신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바짝 긴장하고 있는 반면에.
‘오라버니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셔.’
연우는 태연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 역시 양가 부모님이 나누는 대화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크게 끼어드는 바는 없었지만, 뭔가 공기가 어색해진다 싶으면 적절한 화젯거리를 꺼내면서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역시 대단해.’
아무래도 긴장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전까지만 해도 많이 떠는 것처럼 보이더니, 막상 실전이 되니 그런 부담이 적어지기라도 한 건지.
그런 모습이 참 연우답다 싶어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어……?’
에도라는 뒤늦게 발견할 수 있었 다.
컵을 잡고 있는 연우의 손이 쉴 새 없이 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덜덜덜…….
컵 속에 담긴 물이 잔잔한 파문을 그리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겉보기만 그렇지, 자신보다도 훨씬 긴장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떻게든 티를 내지 않으려는 것이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피식!
덕분에 에도라는 오히려 긴장을 한껏 풀 수 있었고, 마음을 놓으면서 편하게 대화에 뛰어들 수 있었다.
물론, 그때까지도, 아니, 마지막까지도 연우의 손은 도저히 떨림을 멈추지 않았다.
덜덜덜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