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847화 (847/862)

47화. 혼인 (2)

모든 상견례가 끝난 뒤.

“……하아!”

연우는 하얀 재가 된 모습으로 의자에 반쯤 몸을 걸쳤다.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정도로 냉철한 성격을 자랑하던 그였건만.

지금은 전혀 그런 것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냉혈이니 열광이니 하는 특성도 전혀 통하질 않고…….'

상견례에서 대체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비쳤을지 몰라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서먹할 수밖에 없는 양가의 분위기를 자신이 나서서 조율했어야 했는데, 오히려 에도라가 다 정리해 버린 셈이니.

혹시 이번 일로 실망하면 어쩌나 싶은 생각이 들…….

툭!

그때, 연우는 생각을 하다 말고 자신의 어깨를 짚는 손길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에도라가 방긋 웃고 있었다.

“수고하셨어요, 오라버니.”

“……난 한 게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

“한 게 없으시긴 뭐가 없으세요? 오라버니가 없었으면 분위기가 정말 어색했을 텐데요. 잘하셨어요.”

연우는 의기소침해진 자신을 어떻게든 북돋아 주려는 에도라를 보면서 울컥하고 말았다.

결혼 선택을 정말 잘한 것 같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그 때문일까?

와락!

“어머!”

그 아름다운 모습에 연우는 충동적으로 에도라를 끌어안고 말았고.

“다른 어른들이 보시면 어쩌려고……!”

에도라는 화들짝 놀라 연우를 찰싹 때리면서도, 싫지는 않은지 굳이 빠져나오려고 애쓰지는 않았다.

도리어 이후로는 가날픈 손으로 연우의 등을 두들겨 줄 뿐.

“우리 오라버니가 어쩌다 이런 응석받이가 되셨을까? 시간이 갈수록 더 어린애가 되신단 말이야.”

토닥토닥.

아이를 달래는 듯한 따스한 손길에 의해 그동안 바짝 긴장 되어 있던 연우의 근육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정말 이 사람은 내가 없으면 안 되겠구나.

에도라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약한 모습을 자신에게만 보여 주는 연우가 너무 귀여운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싱긋 웃고 말았다.

바로 그때.

에도라는 이쪽을 보면서 자신처럼 싱긋 웃고 있는 미소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니, 그건 ‘싱긋’이라는 상큼한 느낌이기보다는 ‘으히히’라는 변태적인 웃음에 가까운……!

히죽!

대체 언제 나타난 건지.

무왕이 팔짱을 낀 채로 문틀에 반쯤 상체를 기대고서 그들을 흥미진진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재미있어 죽겠다는 투로 이쪽을 보는 통에 에도라는 등골이 쭈뻣 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왜…… 그래?”

연우는 에도라의 상반신이 빳빳해진 것을 느끼고,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싶어 그녀의 가슴에 묻고 있던 얼굴을 슬쩍 들었다.

무왕이 전력을 다해 은신술을 펼치고 있는 까닭에.

그리고 연우가 정신적 긴장 때문에 주변을 신경 쓰지 못한 까닭에 생긴 결과.

무왕은 어느새 얼굴이 새빨갛게 익어 버린 에도라를 보면서 소리 없이 입술을 벙긋거렸다.

오. 라. 버. 니. ♥

으. 힛. ♡

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 마지막에는 입술로 하트 모양까지 만드는 모습이 에도라의 뜨거워진 얼굴에 열기를 더했다.

‘주, 주, 죽여 버릴 거야아아앗!’

이제 그녀의 업굴은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부들부들……!

“에도라?”

연우가 결국 이상함에 고개를 뒤로 돌리려는데.

“이 화상, 또 시작이네.”

“어? 어어어? 임자? 이 귀 좀 놓고 말하……! 아아악!”

영매의 손이 불쑥 나타나더니 무왕의 귓불을 잡아당기면서 그를 복도로 질질 끌고 나갔다.

연우는 그제야 방금 그 모습을 스승에게 들켰다는 것을 깨닫고 조금 얼굴이 붉어졌지만.

“……어차피 놀림당할 거.”

곧 생각을 바꿔 먹었다.

“좀만 더 이렇게 있자.”

“……네.”

연우와 에도라는 다시 서로를 꽉 끌어안았다.

* * *

“호외요, 호외!”

“결혼이다, 결혼!”

“카인과 에도라 공주님이 결혼한다!”

“캬캬캬캬! 내가 말이야. 왕년에 카인과 대련을 해서……!”

혼인식 날짜가 잡혔다!

그런 소식이 퍼지면서, 마을은 다시 난리…… 아니, 소란…… 아니, 그냥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런 좋은 일을 두고 그냥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부족원들이 더 바쁘게 뛰어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부족원들은 각자 친하게 지내던 세력이나 지인들에게 경사가 있다며 바쁘게 소식을 전달하는 한편.

주요 클랜들에게는 아주 휘황찬란하게 꾸며진 초대장을 뿌려 댔다.

그 속에 적힌 내용은 이런저런 미사여구로 가득 차 있었지만, 간략하게 표현하자면 딱 두 줄로 정의할 수 있었다.

-빈손으로 오지 말 것.

-선물 제대로 챙겨올 것.

만약에 제대로 축하해 주지 않으면 재미없을 줄 알라(?)는 협박이 묻어 있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혼인이 가지는 무게는 절대 일반적인 것이 아니었다.

남편인 카인은 무왕의 제자요, 이미 탑 내에서는 적수를 찾아볼 수 없는 절대자였고-이 시간대 기준에서-.

아내인 에도라는 무왕과 영매의 자식이며, 차기 영매로 내정된 사람이었다.

영매가 외뿔부족 내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족장과 비슷하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아니, 때때로 어떤 면에서는 영매의 입지가 족장보다도 더 크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접대 쉽게 여길 수 있는 행사가 아니었다.

물론, 이러한 그들의 모습을 아니꼽게 여기는 시선들도 상당했다.

특히.

클랜 아르티야와 좋지 않은 관계를 맺은 곳들이 그러했다.

* * *

“……이것만 봐서는 우리를 놀리는 게 분명하군.”

마군(魔軍).

한때, 천마를 쫓으며 그의 관심과 사랑을 갈구하였으나, 끝끝내 대답 없던 그에게서 돌아서며 모시는 신을 바꿔야만 했던 곳.

그리하여 도착하게 된 이상향…… 마경(魔境)에서 겨우 숨을 고르고 있던 대주교 휼은 수하가 가져온 초대장을 보면서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휼은 정말 과거에 탑의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대마두가 맞나 싶을 정도로 소박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늘 입고 다니던 법복(法服)은 온데간데없이, 전원생활을 즐기는 농부가 입을 법한 해진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은 어딜 보더라도 마군의 대주교라는 생각이 들기 힘들었다.

특히 언제나 그에게서 풍기던 위압감과 패기가 물로 씻은 듯이 사라지고 없었으니.

마기와 혼기로 가득 차 있던 눈동자마저도 이제는 맑아져서 마치 유리알을 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무릇, 마경이라 함은 지옥보다도 더 지독하고, 무저갱보다도 더 음험한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나.

휼과 마군의 교도들이 도착한 마경은 기존의 그러한 인식과는 전혀 궤를 달리했다.

아침이면 해가 뜨고, 밤이 되면 해가 지는 곳.

땅이 매우 기름져 씨앗을 뿌리면 뿌린 대로 농작물이 자라고, 졸졸 흐르는 강을 가둔 저수지는 너무 맑아 물고기가 잔뜩 헤엄쳐 다니는 곳.

‘사회’와 ‘문명’이라는 것이 크게 없어서 다른 사람들과 다툴 것도, 경쟁할 것도 없는 곳.

독한 마음을 품더라도 따스한 햇살과 훈훈한 바람을 느끼고 나면 그마저도 저절로 풀리고 마는 곳…….

언제나 싸움과 혼란만 거듭하며 살아왔던 마군으로서는 그렇게나 손에 넣고 싶어 하던 것들이 바로 이곳에 있었다.

그래서 주교들 중 몇몇은 이곳을 두고 마경이 아니라 ‘극락(極樂)’ 혹은 ‘천당(天堂)’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냐고 묻기도 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곳의 주인, 우마왕(牛魔王)은 그 말을 부정했다.

그가 항상 입에 달고 사는 말이 있었다.

-이 땅은. 이 세계는. 세상에서 비림을 받아 어디로도 갈 곳이 없는 이들이, 마지막 희망을 품으면서 힘겹게 닿은 곳이니라.

-그런 곳을 두고 마경이라 하지, 어찌 다른 이름을 붙일 수 있겠나?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들이 도착하였기에 마경.

그러한 마경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뭉친 곳이기에 복마전(伏魔殿).

휼은 그런 단어들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우마왕이 말한 대상들이 꼭 자신과 교도들을 말하는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굳이 따지자면 자신들도 ‘마(魔)’라는 글자를 품고 살아가지 않았던가.

그러니 어찌 보면 마경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이들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토록 바라고 또 바라던 평온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물론, 이곳에서 평화를 얻었다고 해서 바깥세상에 대한 소식마저 완전히 단절한 것은 아니었다.

자고로 평화란, 전쟁과 혼란의 사이에 머무는 휴지기(休止期)에 불과한 것일 뿐.

이 평화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른 누구보다 강한 힘을 품고 있어야 하며, 세상 돌아가는 일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함을, 휼은 세상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외뿔부족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들이 세상과의 단절을 선언하였으면서도, 언제나 고고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은 누구보다도 강한 힘을 품고 있기 때문이니.

그래서 교도들 중 상당수가 마경을 나가 바깥에서 세작 역할을 하고 있었고.

이따금 반드시 알아야 할 소식 같은 것을 전달해 주곤 했다.

문제는 이번 소식의 경우, 외뿔부족이 ‘직접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토록 꼭꼭 숨겨 놨던 세작에게 직접 초대장을 전달해 주었다라.”

휼은 손에 들린 초대장…… 정확하게는 청첩장을 앞뒤로 번갈아 보면서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수많은 박해를 피해 도망치던 것이 문화로 남아 있어 세상 누구도 찾아낼 수 없을 만큼 깊은 어둠 속에 숨어 있는 것이 그들의 신도들이건만.

외뿔부족은 언제 숨었냐는 듯이 그들에게 접근을 해 왔다고 한다.

아무리 영매라는 불가해의 존재가 있다지만, 대체 저들의 눈은 어디까지 닿아 있는 걸까?

“이주교. 그대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그동안 마군이 연우 때문에 고생했던 것을 감안한다면, 이런 청첩장은 와서는 안 되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휼의 부름에 반응하는 킨드레드만큼 연우와 악연이 짙은 자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휼은 그의 생각이 궁금했다.

과연 어떤 대답을 내놓을지.

아마도 불쾌하게 여기지 않을까 싶었다.

아니면 우마왕이나 다른 동주칠마왕에게 의견을 구해 보라며 대답을 미루거나.

그런데.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킨드레드는 뜻밖의 대답을 내놓았다.

휼의 한쪽 눈이 살짝 말려 올라갔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공과 사는 확실하게 구분 지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공은 무엇이고, 사는 무엇이지?”

“공은 외뿔부족이 강하다는 것이고, 사는 카인과의 관계가 나쁘다는 것입니다.”

“굳이 강자와 관계를 멀리할 필요는 없다?”

“이미 탑 내에서는 본 교단의 행방을 두고 이런저런 추측과 소문이 무성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자리에 나타난다면.”

“세가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말할 수 있지. 아니, 오히려 더 크게 부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겠지. 옳은 생각이다.”

“별것 없는 의견이었습니다.”

“아니. 머릿속이 많이 어지러웠는데, 덕분에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휼은 뒷짐을 지며 고개를 들었다.

마경에 도착하고 나서 예전과 확연하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렇게 하늘을 볼 기회가 많다는 것이었으니.

저렇게 도도히 흐르는 하얀 구름을 보고 있을 때면 문득문득 떠오르는 게 많았다.

이것도 여유로운 일상이 주는 축복과도 같은 것일 테지.

“……아직 재기를 이야기하기에는 갈 길이 멀지만. 그래도 한 번쯤 외유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휼은 그렇게 증얼거리면서 몸을 반대로 돌렸다.

“우마왕을 뵈어야겠다. 시간을 내어 달라 말씀드리도록.”

“명!”

쉭!

조용히 사라지는 킨드레드를 보는 휼의 눈빛은 요요히 빛나고 있었다.

“저 구름은 언제나 그렇듯이 계속 흐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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