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혼인 (3)
마군이 위치한 마경이 떠들썩해지던 그 무렵.
‘굴레’를 되감는 것으로 완전한 멸망이라는 운명에서 벗어난 곳이 있었으니.
아스가르드.
선택받은 자들만이 살아갈 수 있다는 땅의 주민들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아래로 향하는 길이 막혔구나.”
아스가르드의 왕, 오딘이 천천히 한쪽 눈을 떴다.
흔히 완전, 존엄, 위신, 권위의 상징으로 통하는 다른 사회 속 천부신(Sky Father)들과 다르게, 오딘은 중대한 한 가지 결점을 안고 있었다.
안대를 찬 애꾸눈이라는 것.
이러한 장애는 사실 다른 천부신이나 대신격들에게 멍청하다거나 약하다는 평가를 받기에 딱 알맞은 것이었다.
일반적인 육체가 아닌 영체(靈體)로 구성되다 보니, 아무리 큰 장애를 안고 있더라도 신력만 충분하다면 얼마든지 복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애꾸라는 장애를 계속 안고 있다는 건, 천형(天刑)을 극복할 만한 힘이 없다는 것.
천부신으로서의 자격도 없다는 판단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오딘에게는 그러한 평가가 먹히지 않았다.
그가 한쪽 눈을 잃은 대신에 얻은 권능이 무엇인지 모두들 잘 알기 때문이었다.
예지(叡智).
달리 미래시(未來視)라 부르는 능력이 바로 그것이었다.
아사와 바니르로 대표되는 두 신족 간의 충돌로 항상 혼란스러우면서도 자그마한 사회였던 아스가르드가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오딘은 새로운 광경을 엿보고 있었다.
아스가르드의 종말이었다.
까아악! 까악!
오딘의 양쪽 어깨에 올라탄 두 까마귀, 후긴과 무닌이 괴성을 질러 댔다.
-종말이다, 종말!
-우리 다 죽는다!
-여기 있어도 죽는다!
-밖으로 나가려 해도 죽는다!
천계는 현재 연우의 시스템 조작으로 인해 완전히 잠겨 버린 상태.
그 때문에 아스가르드를 비롯한 많은 사회들이 ‘원인 불명’의 차단을 뚫기 위해 절치부심 노력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많은 이들이 오딘을 찾아 방책을 강구한 것이었는데…….
오딘은 장장 닷새 동안 식음을 전폐하면서 미래시를 계속 작동시켰고, 신력의 대부분을 소모한 끝에야 위와 같은 결론에 다다를 수 있었다.
아스가르드를 여기까지 키우기 위해 노력했던 오딘으로서는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는 일.
‘무왕이라고 했나……? 이전에 봤던 종말의 굴레는 그 필멸자로 인해 벌어진 것으로 해석이 되었었는데. 이번에는 조금 달라. 그놈이지만…… 그놈이 아니다.’
천부신 중에서도 손꼽히는 지혜를 지녔다고 평가받는 그조차,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어떠한 결론도 내릴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까아악! 까아아악!
-이래도 죽어! 저래도 죽어!
-그런다면 죽게 만드는 놈을 찾아야 해!
-근데 그놈이 누군지 몰라!
-누구지?
-몰라!
-제일 가까운 놈은 누가 있지?
-니플헤임?
-아냐!
-개들은 약해!
-그럼 천계를 가둔 놈!
-그놈이다!
-그놈을 죽이면 돼!
-그전에 봤던 놈도!
-죽이자!
-죽이자! 죽이자!
오딘은 손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아무렇게나 떠드는 듯해도, 후긴과 무닌의 조언은 이따금 오딘에게 새로운 사고의 방향을 선물해 주곤 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중 하나인 것 같았다.
“거치적대는 놈들을 모두 치워 버린다……."
가장 끌리는 선택지일 수밖에 없었다.
극단적으로 죽이지는 않더라도, 그들과 어떤 거래를 할 수만 있다면.
하나 남은 오딘의 눈이 아래쪽으로 향했다.
화아아악!
그 순간, 그가 앉아 있던 옥좌 주변으로 파동이 넓게 퍼지면서 새로운 광경을 그려 냈다.
무왕과 연우가 있는 외뿔부족 마을의 전경이 그려지고 있었다.
혼인식 준비로 하나같이 바쁜 이들을 보면서.
“……흠.”
오딘은 한쪽 눈을 가늘게 떴다.
아스가르드가 새로운 움직임을 준비하는 동안.
마찬가지로 더 바쁘게 움직이는 신의 사회가 있었다.
올림포스.
연우가 주신으로 있으며, 최고 전성기를 이룩하였던 크로노스와 레아에 대한 그리움이 강하게 남아 있는 곳.
“연우 님이 나타나신 게 맞다고?”
아테나가 다급하게 던진 질문에 헤르메스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어. 맞아.”
“그럼 왜 이쪽으로 오시지 않고, 아래에서……!”
아테나는 많이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연우가 나타난 이후로 천계도 닫히고, 그와의 채널링 역시 계속 단절되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연우의 수석 사도인 그녀로서는 많이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
심지어 그녀는 연우가 먼 미래에서 ‘굴레’를 되감아 이곳에 왔다는 것도 모르기 때문에 더욱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헤르메스는 어리디 어린 막내 숙부에게 이토록 애착이 심한 누이를 재미나다는 얼굴로 보면서 뒷말을 덧붙였다.
“더 재미난 건 뭔지 알아?”
“……또 뭐가 있어?”
“크로노스 님이 계셔.”
“그거야 연우 님의 옆에 계속 계시던……!”
“온전한 형태로.”
“뭐?”
아테나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거기다 레아 님까지 계신 거 있지?”
‘‘그, 그 말은……!”
“두 분 다 완전한 부활을 이루신 것 같아.”
"……!”
“그런 두 분이 현재 외뿔부족 마을에 있지. 이게 뭘 의미할까?”
"…….”
아테나는 한순간 침묵에 잠겼다.
외뿔부족은 연우의 스승인 무왕이 있는 곳일 뿐만 아니라, 그의 하나뿐인 연인이 사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 곳에 부모님을 모시고 찾아갔다?
이것이 뭘 의미하겠나!
벌떡!
아테나가 힘차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헤르메스는 자기도 모르게 크게 삐져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아야만 했다.
아테나의 얼굴이 참으로 진지하기 이를 데가 없었으니까.
페르세포네와 대립하고 있을 때 딱 저런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 같은데.
장작을 더하다 못해 아주 기름까지 끼얹은 것처럼 두 눈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물론, 그걸 굳이 입 밖으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냥 가만히 옆에서 구경하고 있는 게 더 재미있는데. 굳이 왜?’
헤르메스는 맛난 음식을 아끼고 또 아끼면서 아주 천천히 음미하는 성격이었다.
“헤르메스!”
“왜?”
“우리 올림포스가 어디지?”
헤르메스는 아테나가 원하는 대답을 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당연히 연우 님의 우산이자, 크로노스와 레아 님의 터전이지.”
“맞아. 그리고 지금 외뿔부족은 단체로 움직이고 있단 말이지? 그런데 우리 올림포스가 가만히 있어서야 되겠어?”
“안 되지.”
“당연하지! 그러니까!”
아테나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떤 의미인지 몰라도 그녀는 절대 지고 싶지 않아 보였다.
세력 면에서도.
혹은 누군가에게도.
“어서 준비해! 우리도 내려간다!”
“흐흐흐. 알았어, 누이.”
아테나는 헤르메스의 웃음소리가 왠지 모르게 거슬렸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지금은 어떻게든 하계로 내려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 * *
짙은 어둠 속에서.
『죽음이.』
『……아주 잠깐 사라졌던 죽음이 돌아왔다.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큰 모습으로.』
얼굴을 가린 채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들이 빚어 나왔다.
『아니. 이건 그냥 큰 모습이 아니지 않은가.』
『보다 더 원초적인…….』
『보다 더 근원적인…….』
『죽음보다도 더 이전에 있던 아둔한 어둠. 그 자체.』
그것은 소속된 사회와 상관없이 ‘죽음’이라는 공통된 신위로 묶인 이들의.
소위 이단아라 불리는 죽음의 신과 악마들이 공통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정신 영역이었다.
『우리가 보지 못하고, 닿지 못했던 어느 시간선에서 모든 걸 이룩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곳으로 오신 게 분명하다.』
그곳에서는 이미 연우가 이 시간대에 나타났을 때부터 그가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를 짐작하고 있었다.
그들의 모든 힘이 바로 그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왕을.』
『진짜 왕이 되신 그분을.』
연우는 더 이상 칠혹왕의 사도나 집행자 따위로 분류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칠흑왕.
바로 그 자체였다.
『배알하러 가자.』
『영접하러 간다」
그렇기에 신하인 그들은 찾아오지 않는 왕을 뵙고자 자신들이 직접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우리는 그분이 남기신 찌꺼기이며 그분이 이 우주에 남긴 위상(位相). 이것이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 말을 끝으로.
철커덩!
어둠이 닫혔다.
* * *
그렇게 천계에서 많은 존재들이 연우를 중심으로 바쁘게 움직이는 동안.
조용히 그들을 예의 주시하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탑의 지하에 해당하는 부분.
혹은 이면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공간.
허수 세계(虛數世界).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그 세계에서 누군가가 눈을 떴다.
그것은 모든 것이 흐릿하기만 하여 별다른 형체를 가지고 있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어쩐지 그 속에는 사자의 기품과 형상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사자자리(Leo).
스스로를 ‘별’이라 부르는 존재들 사이에도 위계는 존재한다.
그리고 백수의 왕이라는 사자를 이름으로 내걸고 있다는 것은 그중에서도 손꼽히는 존재란 뜻이었으니.
현재 ‘별’들을 지배하는 두 명의 왕 중 한 명이 바로 그였다.
『참으로 재미난 일이 벌어지고 있구나.』
사자자리는 일반적인 사자처럼 잠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하루 중 4분의 3을 잠들어 있고, 나머지 4분의 1 동안만 깨어 있는 식.
그러니 그 모습만 본다면 게으르다고도 할 수 있을 테지만, 사자자리가 눈을 떴을 때에 보이는 포악함은 다른 별들도 벌벌 떨 정도였기에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해 따질 수가 없었다.
오히려 깊고 오래 잔다는 것은 그가 그만큼 강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그랬던 사자자리가 최근 들어 잠드는 시간이 많이 줄어들었다.
어떤 존재를 ‘관찰’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아둔한 어둠이여. 저 모자라기만 한 곳에서 너는 너만의 삶을 살려고 하는구나.』
그 존재는 별이라면.
세계에서 태어난 존재라면.
생명체라면 알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그야말로 저 수많은 우주, 그 자체라 할 수 있었으니까.
영원한 잠에 든 자, 칠흑왕.
그리고.
그의 자아인 차연우.
『혼인이라?』
사자자리는 그 사실이 우습기만 했다.
『그만한 절대자가 어째서 스스로를 인과율에 얽매이게 하려는 건지…… 꿈속에서 인형 놀이라도 하고 싶었던 건가?』
힘을 갖춘 이는 그만한 그릇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 사자자리가 평소에 갖고 있는 지론이었다.
그렇다 보니 그의 시선에서 요즘 연우가 보이는 행보는 하나같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투성일 수밖에 없었다.
꿈에 들어가 소끊놀이라도 하려는 듯 보이는 꼴이 우습기 짝이 없었으니까.
자신이 연우라면, 저만한 힘을 지니고 있다면 절대 저러지 않았을 텐데, 훨씬 더 많은 무언가를 시도해 볼 수 있을 텐데 왜 그러지 않고 저기 서 그치는 것인가?
대체 저만큼 좁은 도량을 가진 이가, 어떻게 저런 위치에까지 다다를 수 있었는지가 의문이기만 했다.
『생각이 궁금하군.』
하지만 보는 것만으로는 절대 의문이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았기에.
사자자리는 도중에 생각을 바꾸기로 마음을 먹었다.
직접 만나서 그의 생각을 들어 보기로.
물론, 아직 칠흑왕이나 천마 같은 이들과 부딪칠 때는 아니었기에 위험천만한 행동이란 건 잘 알고 있었지만.
그야 별다른 해악을 끼치지 않는다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설사 자신의 의도와 다르게 저쪽에서 적의를 띤다고 해도, 무작정 피할 필요도 없었고…….
「어디 한번 볼까…….』
사자자리가 천천히 엎드려 있던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오랜만의 외출이었다.
그렇게.
곳곳에서 연우의 혼인식을 관전하기 위한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