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다과회 (1)
“그럼 넌 이제부터 별의 조각을 모으러 다니겠구나.”
무왕이 갑작스레 불쑥 꺼낸 말에 영매가 의문을 표했다.
별의 조각을 모으러 다녀?
『남편? 그게 무슨 말……?』
영매의 ‘눈’은 어디까지나 탑의 세계에만 한정되어 있다.
그녀의 눈이 탑에 어린 소호 금천의 축복에서 기인한 데다가, 시스템과 긴밀하게 관련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전지(全知)에 가까운 눈은 탑의 외부에 위치한 별들에는 해당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부터 어떻게 남편의 영혼을 완성시켜야 할까 고민하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무왕이 그런 말을 꺼내니 의문이 들 수밖에 없던 것이다.
연우는 곧 에도라와 혼인식을 갖게 된다.
새신랑이라는 뜻인데 갑자기 집을 떠나는 것이 말이 될……!
영매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다가 도중에 입술을 꾹 다물고 말았다.
연우의 시간관념은 자신들의 것과 아주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황’이란 존재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서 완전히 벗어나 언제나 같은 자리에 존재하는 유일성(推一性)을 갖춘 존재.
당장 '차연우’의 시선은 이곳에 있을지 몰라도, ‘칠혹왕’이 보고 있는 시선은 전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굴레’.
혹은 ‘꿈’.
지금 그들이 살아가는 세계는 잠든 칠혹왕이 꾸고 있는 '꿈’에 불과할지니.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아니, 전지적 시점으로 그 속을 훤히 내려다 본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미 모든 세계선들을, 시간대들을 샅샅이 훑어보고 있었구나.’
하지만 그런데도 아직까지 티그리스 외에 다른 조각들을 가져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뜻하는 바는 하나.
‘〈별〉들이 숨어 있구나. 칠흑왕도 어찌 감지하지 못하는 제3의 지대에.’
천마와 칠흑왕은 전지전능,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존재들이건만.
그들의 감시를 피할 수 있는 공간이라니.
그런 것이 정말 존재가 가능하긴 한 걸까?
현재 자신들이 머물고 있는 세계와 평행우주, 다중우주로 이어지는 여러 세계선의 존재만 해도 영매에게는 너무나 까마득하게 여겨지는 것이건만.
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으니 납득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결국 숨은 별들을 찾기 위해서는 연우가 ‘직접’ 움직여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또 모험이라니…….'
영매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 아이는.
이 아이는 어찌 이리 단 한시도 평화와 행복에 안주할 수가 없단 말인가.
이미 정신적으로 상당히 지쳐 있을 텐데도, 제 스승을 위해 이렇게 발 벗고 나서는 모습이 너무나 미안하기만 했다.
그리고.
너무나 감사했다.
『…….』
영매는 목이 메는 것 같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마 연우가 떠났다가 긴 시간을 외유하고 돌아온다고 한들, 그들은 그것을 전혀 눈치챌 수 없을 것이다.
시간의 제약에 얽매이지 않는 아이이니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으로 돌아오면 그만이지 않은가.
그러고는 말하겠지.
별반 힘들지 않았노라고.
절대 얼마나 힘들었는지 티를 내지 않을 것이다.
이 아이는 원래 그런 아이였으니까.
피식.
연우는 영매의 그러한 시선을 읽었는지 엷게 웃으면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별들을 찾으러 잠시간 이곳을 떠나 있을 거란 의미였다.
“언제 갈 참이냐?”
“식은 치러야 하지 않을까요? 스승님이 올포원한테 발리는 꼴도 봐야 하고 말이죠.”
빠직!
무왕의 미간에 혈관이 잔뜩 돋아났다.
“누가, 누구한테 발려?”
“벌써 노환 증세가 있으십니까? 작게 말한 것도 아닌데 안 들리신다니.”
“이 새끼가?”
무왕은 엷게 웃는 연우를 보면서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한참 동안 인상을 찡그려야 했다.
이전에는 대들 때 대들더라도 이따금 고분고분한 맛이 있었건만.
이제는 실력 좀 찼다고 스승 대하기를 동네 똥개 다루듯이 한다.
이렇게 싹퉁머리가 없는 놈인 줄 알았다면 싹수가 자라기 전에 미리 자근자근 밟아 뒀을 덴데.
이것이 모두 손속에 사정을 둔(?) 아량 넓은 이의 비애일 따름이었다.
“하여간 내 딸내미 눈에 또 눈물 흐르게 만들었다간 두 다리 모두 부러질 줄 알아. 알간?”
무왕의 경고에.
“그야.”
연우는 짙은 미소를 홀렸다.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 * *
탑의 세계가 워낙에 효율과 실용을 추구하는 문화가 짙다 보니, 외뿔부족의 풍습도 이러한 경향이 아주 강한 편이었다.
그래서 혼히 관혼상제(冠婚喪祭)로 분류되는 전통 의식도 점차 약소화되는 추세였고, 일반 부족원들의 혼인식은 아예 친지들만 불러다가 연회를 즐기는 게 대부분이었다.
심지어는 아주 간단하게 부부 두 명이서 술잔에 물을 떠다가 조촐한 예식만 갖추고 끝내는 경우도 허다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반 부족원들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
혼인을 치르는 대상이 족장의 가족이라면, 왕족이라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졌다.
하물며 에도라는 그저 그런 왕족도 아니었다.
영매의 딸이자, 차기 영매로 점쳐지는 고귀한 신분.
당연히 말 많고 탈 많은 전통 의식대로 치러질 수밖에 없었다.
외뿔부족의 전통 혼례는 크게 여섯 단계로 이뤄졌다.
-가장 먼저, 납채(納彩).
외뿔부족에게서 혼인이란, 두 사람의 백년가약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두 집안의 결합을 의미하기도 하는바.
그렇기 때문에 집안 대 집안의 결속(結束)의 의미로서 양 가문이 먼저 나서는 편이었다.
납채는 신랑의 가문에서 신부의 가문으로 청혼서와 함께 사주단자를 보내는 것을 의미했다.
모년 모월 모일 모시에 태어난 어느 가문의 아들, 차 아무개가 귀 가문의 여식에게 장가들기를 청하노니, 여기 보내드린 사주단자를 잘 살펴보시고 청혼의 수락 여부에 대해 대답을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그런 내용을 갖고 있었다.
사주단자에는 신랑의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각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그가 지닌 ‘운’과 ‘명’에 대해 대략적으로라도 점칠 수가 있다.
그럼 신부 집에서는 청혼을 받은 딸의 사주단자와 같이 비교하여 두 사람의 합이 맞는지 맞지 않는지를 가늠하고, 만약 합이 잘 맞는다면 승낙을 하는 것이다.
“어? 이런 거 하려면 원래 정우 녀석이 해야 하는 거 아냐?”
문제는 현재 연우의 집에 사주단자를 보낼 만한 사람이 따로 없다는 점이었다.
올림포스를 부르려니 그쪽과는 인연이 서먹서먹해진 지 오래되어 당장 부르기가 뭣한 상황.
그래서 크로노스는 차정우를 데려올 것을 이야기했지만, 곧장 레아에게 등짝 스매시를 당해야만 했다.
“이이는! 그 아이가 지금 얼마나 바쁜지 잘 알면서! 안 그래도 사서 일 배우느라 정신이 없을 텐데…… 정우는 다른 절차가 모두 끝나고 나면 그때 부르는 걸로 해.”
"그럼 대체 누가……?"
“있잖아.”
“누……! 이, 임자! 안 돼! 그놈은!”
“이이는. 라플라스, 그 아이가 아무리 장난기가 많은 성격이라고 해도 이런 일에서까지 그런 장난을 치지는 않아요.”
“아니, 걔는 그러고도 남을 놈이라니까!”
『오홍홍홍! 신(臣) 라플라스, 큰 마님의 믿음에 크게 감복할 따름이어용!』
크로노스는 관자놀이를 쥐어뜯으면서 절대 안 된다고 몇 번씩이나 항변했지만, 레아의 결정을 바꿀 수 없었다.
결국 사주단자를 보내는 건, 라플라스의 몫이 되었다.
“아, 안 돼……."
다행히 사주단자가 든 함을 들고 거처를 떠나는 라플라스의 모습은 평상시(?)와는 달랐다.
스킨헤드의 근육질 남성이라는 특징은 다르지 않았지만, 토끼 귀 머리띠는 사라지고 품이 넉넉한 외뿔부족의 전통 복장을 갖춰 입고 나선 것이다.
워낙에 체격도 단단하고 키도 훤칠하니, 외향만 두고 보면 그렇게 늠름해 보일 수가 없었다.
『오홍홍홍! 때때로 이런 옷을 입는 것도 기분 전환으로 베리베리 굿이에용! 그 기념으로 토끼 댄스 브레이크라도 한번 춰 볼까 싶은 충동이 마구 들어용!』
……입만 꾹 다물고 있다면 말이다.
크로노스는 손으로 얼굴을 덮은 채로 길게 탄식을 내뱉다가, 곧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토끼 댄스 브레이크니 뭐니 하는 거 절대 금지다.”
『홍홍홍홍. 걱정 마세용.』
“가는 도중에 옆으로 새는 것도 금지.”
『홍홍. 당연하죵!』
“흥이 난다고 갑자기 옷 찢지 마. 뜬금없이 근육 쇼도 하지 말고.”
『에잉. 우리 큰 주인님도 설마. 제가 그런 짓을 하겠어용?』
“정갈하고, 다소곳하게. 경망스럽게 굴지 말고. 보폭은 크고, 걸음 속도는 최대한 느리게. 말수는 줄이고, 눈에 힘 잔뜩 줘라. 표정 변화는 주지 말고. 그리고 또……!”
『오홍홍! 정말이지, 우리 큰 주인님도 참. 신왕이라고까지 불리셨던 분이 걱정도 많으시다니깡.』
“……내가 왜 걱정이 많을 수밖에 없는지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거 아니냐.”
크로노스는 별 대수롭지 않은 농담으로 여기는 라플라스의 반응에 더 깊은 한숨을 토해 내야만 했다.
“하아……! 하여간 근엄, 엄격, 진지. 근엄진. 이 세 개 절대 잊지 마!”
『옛썰! 라져 댓!』
라플라스는 과장되게 거수경례까지 하며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것은 크로노스의 불안감을 자극하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나.
옆에 있는 레아는 그런 라플라스를 아주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는데.
『그럼 라플라스, 출격합니다! 피슈우우웅!』
“야! 뛰지 말라고!”
비행기가 되어 거처를 떠나는 라플라스를 보면서 크로노스는 결국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문명(問名).
“신랑 측의 사절, 출발이오오!”
라플라스는 사주단자가 든 함을 직접 들고 마을의 정중앙에 난 주작대로를 지났다.
그 뒤를 따라 예단 및 예물을 한가득 짊어진 일꾼들이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경쾌하게 노래를 불러 댔다.
“오느으을 가아아면〜♪"
“언제에에 오나아아〜♩♪♬”
“누구우울 마다아아〜♩”
“가아시인 느으은가〜♬”
“엥? 뭔가 좀 이상한데? 원래 이런 날에 이런 노래가 맞나?”
“에이 알 게 뭐야! 좋으면 다 좋은 거지! 안 그러냐?”
“으히히헛! 그도 그래.”
“자, 그럼 다시 박자 붙여서!”
“꽃가마에 가신 임은〜♩♪"
“내마다고 잠드셨지〜 얼쑤〜♬”
“얼쑤!”
“얼쑤우우!”
신랑 측 사절 행차에는 부족원들이 대거 따라붙어 구경하기 바빴다.
그들이 이런 재미난 구경을 마다할 리 없었으니까.
그렇게 라플라스와 행차의 뒤편으로 사람들이 대거 모이면서 인산인해를 이루는 가운데.
탁!
라플라스는 드디어 에도라와 무왕 등이 머무는 무궐(武闕)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외뿔부족이 탑의 세계로 건너온 이후, 대대로 부족장들만이 머물렀다는 궁궐.
사실 궁전이라고 하기에는 그리 크지 않은 규모라 장원이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렸지만, 건물 곳곳에 남아 있는 세월의 때는 고즈넉하고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한껏 더해, 궁전과도 같은 위엄이 있었다.
“올림포스으- 전대애 신와아앙- 크로노스으 님과- 레아아 님의 말자(未子, 막내아들)아- 차연우 군이이- 외쁠부조옥의- 지도자이신- 무우와앙- 나유우 님과- 여엉 매애- 님의 여식- 청람가의- 공주우- 에도라 차오 님에게에- 청혼으을- 하나니이- 이에- 대다압을- 주우십시오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라플라스에게 고정된 가운데.
라플라스는 굳게 닫힌 무궐의 정문 앞에서 사주단자가 든 함을 높이 든 채로, 어깨에 힘을 빡 주며, 얼굴은 더없이 진지한 표정을 하고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그렇게 외쳤다.
문명이란 신랑 측이 신부 측에 사람을 보내어 신부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물어보는 행사.
즉, 신랑의 사주단자를 받은 신부 측에서 답례로 이번에는 그들의 사주단자를 내보내는 것이다.
다만, 이때 신부 측의 사주단자에 는 납폐(納幣, 신랑이 예물을 주는 것)와 전안(奠雁, 신랑이 기러기를 가지고 신부 집에 가 상에 올리고 맞절을 하는 예)할 날짜를 정한 택일단자(擇日單子, 좋은 행사에 어울리는 좋은 날짜를 고른 종이 단자)가 같이 담기게 된다.
이때, 신부 측에서 대문을 활짝 열어 사주단자와 택일단자를 내준다는 것은 청혼을 수락한다는 뜻이고, 대문을 끝까지 열어 주지 않는 것은 ‘그쪽과 혼인을 치를 생각이 없으니 이만 돌아가시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이는 어디까지나 외부에 보여 주기 의식에 불과할 뿐.
이미 이야기는 모두 끝난 상태.
다만, 대문을 바로 여는 것은 신부 측의 가치를 낮추는 행위이므로, 보통 신랑 측이 한나절 이상 대문 앞에 서서 대답을 기다리는 것이 관례였다.
그 때문에 라플라스는 그렇게 한참 동안 우두커니 서서 대문이 활짝 열 리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그때까지도 그는 크로노스의 우려와 다르게 진지한 자세로 임하고 있었다.
‘꺄핫!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절 보고 있어용. 역시 이 라플라스는 사람들의 애정(?) 어린 관심을 받는 것이 너무나 즐거운 것이와용! 계속 이랬으면 좋겠네용. 오홍홍홍!’
……속내는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겉으로 보기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끼이이익!
어느 순간, 무궐의 대문이 활짝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