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다과회 (2)
"으으음."
"호호호호."
"으으으음."
“호호호호호호!”
“……그렇게 즐거우십니까?”
“얘는. 그럼 안절부절못하는 아들 모습이 이렇게 귀여운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니.”
연우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때 보면 자신의 어머니는 확실히 차씨 집안의 사람이 맞는 것 같았다.
‘저렇게 즐거워하시니 뭐라고 말씀도 못 드리겠고…… 내 인생아.’
라플라스가 신랑 측 집안을 대표하는 사절로서 무궐을 방문하는 동안.
연우는 도저히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무궐을 방문한 것은 라플라스였다, 라플라스!
그가 거느린 여러 권속들 중 가장 사고치고 말 안 듣는 놈.
사실 마음 같아서는 샤논이나 한령, 그도 아니면 부나 레베카에게 맡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샤논은 정우 녀석과 같이 있었지. 한창 바쁠 테고.’
차정우를 당장 이 자리에 부르지 않은 것은 지금이 한창 가장 바쁜 시기임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창공 도서관은 세계의 모든 역사적 사실들이 기록되는 곳.
더군다나 최근에는 평행 우주니 다중 우주니 하는 것들이 무한대로 확장되면서 도서관의 규모도 하루가 다르게 계속 커지고 있는 중이었다.
여태껏 ‘굴레’라는 틀에 갇혀 있던 우주가 천마와 칠흑왕의 싸움이 중단되면서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며 생기게 된 결과.
그렇다 보니 연우는 이런저런 다른 일로 차정우가 신경 쓰는 일은 없기를 바랐다.
아직은 준비 단계이니 본격적인 혼 례식이 시작될 때에나 부를 생각이었다.
물론, 정작 본인이 이 사실을 안다면 자신은 빼 두고 이게 뭐 하는 짓이냐며 분통을 터뜨리겠지만.
여하튼 차정우는 그런 상황이라 부르지 않았고, 샤논은 그를 돕기 위해 나가 있으므로 따로 부를 수가 없었다.
'한령은 아들과 여행 중이었지. 레베카는 케르눈노스와 함께하고 있는 상황이고.’
한령과 레베카, 둘 모두 소증한 이 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부는…… 말이 없는 편이니.’
부-파우스트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 말 없는 성격으로 사절 역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그렇다고 타계의 신이나 올림포스를 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니.’
경계의 거주자를 비롯한 타계의 신들은 이러한 ‘안’쪽 세계의 문화에 대해 잘 이해를 하지 못하므로 멀뚱하게 있을 가능성이 크고.
올림포스는 사실 최근 교류가 거의 없었던지라, 사절을 부탁하겠다고 부르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반면에 라플라스는 어차피 당장 하고 있는 일도 없는 데다가, 탑의 문화는 물론 현재의 상황도 잘 알고 있으니 일을 시키기에 딱 알맞았다.
……결국 이렇게 복합적이고 짜증나는 이유로 어쩔 수 없이 녀석이 사절 역을 맡게 된 것이니.
혹시 가는 길에 무슨 사고라도 치지 않을까, 연우로서는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녀석을 살필 요량으로 심령을 활짝 열어 두고 있는데.
『이 라플라스는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을 받는 것이 너무나 즐거운 것이와용!』
이딴 속마음이나 들리니 도로 꺼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래도 녀석은 ‘만약 사고를 치게 되면 최소 만 년 단위로 공허 한가운데에다 처박아 둘 줄 알아라’라는 경고 때문인지 다행히 별다른 사고를 치지 않고 있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계속 그렇게만 해라.
연우가 속으로 그리 꿍얼대고 있는 그때.
“아들, 한번 안아 봐도 되겠니?”
레아가 웃으며 건네는 말에 연우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와락.
레아가 연우를 꽉 끌어안았다.
그녀는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아들을 품에 안고는, 뒷머리를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너무 대견하다는 듯이.
“이제 이렇게 엄마의 아들로만 있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구나.”
“……어머니.”
“그동안 고생 많았지?”
"……."
“우리 가족들을 위해서 매번 희생하기만 하고…… 미안하고, 또 고맙게 생각한단다. 엄마 아빠 모두.”
"……."
“이제부터는 그동안 어깨 위에 올려 뒀던 무거운 것들 전부 내려놓으 렴."
"……."
“장하다, 정말 장해. 우리 아들.”
연우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금 여기서 무슨 말이라도 했다간 겨우겨우 삭여 놨던 감정이 불쑥 고개를 치켜들 것 같았으니까.
“임마의 아들로 태어나 줘서 너무나 고마워.”
그런데 그게 좀처럼 쉽지 않았다.
그래서.
“……저 역시 제 어머니로 계셔 주셔서 항상 감사합니다.”
연우는 한참 뒤에나 어머니에게 그런 말을 건넬 수 있었다.
그리고 레아는 그렇게 한참 동안 아들을 끌어안았다.
그동안 마음속 가득 짐을 안고 살아왔던 아들이, 이제는 자유롭고 행복하게 자신만의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 * *
[이곳은 ‘외뿔부족의 마을’입니다!]
[현재 마을 내에 큰 축제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에 외뿔부족에서는 일족의 이름을 대신하여 축제에 참여하는 모든 참석자들에게 한 가지 공고를 발표하였습니다.]
[공고의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공고]
1. 축제는 신성하다.
2. 신성한 축제를 방해하는 행위 일체는 외뿔부족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받아들이겠다.
3. 축제가 벌어지는 중에는 어떠한 사건 사고도 불허한다.
4. 마을은 외교적으로 철저히 중립을 표방하므로, 마을 내에 체류하는 동안 외부의 은원은 절대 허락되지 않는다.
5. 그 외 자잘한 사항은 알아서 잘 처신하도록. 말 안 들으면? 그냥 뒈질 줄 알아라.
공고는 사실 5번으로 전부 설명할 수 있는 것이었다.
만약 축제를 방해하거나 외뿔부족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이 벌어졌다간 뒈질 줄 알라는 서슬 퍼런 협박.
조직과 부족의 체면을 전혀 고려치 않은 노골적인 언행이라, 뒤에서 손가락질하는 이들도 적잖게 있었지만.
사실 그것이 외뿔부족으로서는 워낙에 자주 보였던 태도이기도 해서 어느 누구 하나 겉으로 그런 의사를 표하지는 못했다.
그 덕분에 외뿔부족의 마을은 수많은 조직과 세력, 그리고 플레이어와 랭커들로 북적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커다란 사건 사고가 벌어지지 않고 있었다.
사실 외뿔부족의 협박이 아니더라도, 올림포스의 주신이자 죽음의 신과 악마들의 왕이고, 사룡과 망자 거인들을 부리며, 시스템의 최고 관리자이기까지 한 연우의 눈 밖에 날 만한 짓을 저지를 용자는 아무도 없었지만.
“우와!”
덕분에 세샤는 축제를 아주 즐겁게 즐길 수 있었다.
“이거 엄청 맛있어!”
세샤는 노점상에서 구한 꼬치구이를 한입 가득 베어 물고는 감탄을 터뜨렸다.
특유의 소스를 잔뜩 머금은 고기와 채소에 불맛까지 더해져 입 안에서 맛의 축제를 벌인 탓이었다.
“이것도 맛있고!”
육즙 가득한 만두도 눈길을 사로잡았고.
“저것도 맛있어!”
초콜릿을 한가득 묻힌 츄러스도 맛있었다.
“여기는…… 천국인가요!”
세샤는 워낙에 여러 일을 겪으며 살아왔기에 웬만한 일에는 감정 표현조차 보이지 않는 편이었지만.
간만에 고향이었던 탑의 세계로 돌아와서 그런지 잔뜩 들떠 있었다.
아난타는 그런 딸을 보며 가만히 미소를 지은 채 그 뒤를 따르면서도, 한편으로는 언제나 전쟁터 같은 분위기를 풍기던 탑이 이런 모습도 보일 수 있다는 사실에 적잖게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마주친 인파만 해도 꽤나 많았던 데다가, 행차만 해도 엄청났는데, 정작 싸움의 위기는 없었던 것이다.
그들의 머리 위로 나부끼는 깃발들도 제각각이라 탑 내에 이렇게 많은 클랜들이 있었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반면, 그럼에도 넘치는 사람들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인지, 민채영은 잔뜩 주눅이 든 상태였다.
난생처음 ‘이세계’라 할 수 있는 곳을 여행하게 되었으니 많은 것이 낯설 수밖에.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민채영은 비행기조차 타 본 적이 없었다.
한국을 벗어나 외국으로 가 본 적도 없는데, 덜컥 이세계로 오게 되었으니 충격은 더 클 테지.
그래도 아난타가 지켜 주고 있고, 세샤가 데리고 이리저리 쏘다니는 통에 긴장감이 점차 줄어드는 게 보였다.
아마 하루 이틀쯤 더 지나면 여기도 익숙해지지 않을까?
'이곳의 좋은 면만 보고 가야 할 텐데.’
아난타는 탑이 지닌 여러 추악한 면모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부디 민채영만큼은 이곳이 지닌 아픔을 끝까지 몰랐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리고.
"……."
‘……다행히 저기도 일단 얌전하구나.’
아난타는 로브를 깊숙하게 눌러쓴 채로 조용히 민채영의 뒤만 따라다니는 사내를 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올포원이었다.
비바스바트의 인격과 손재원의 기억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자.
지금은 연우에 의해 대부분의 능력이 봉인되어 있어서 그런지 배광이 흘러나오지 않아 평범한 외양을 하고 있었다.
지금 그의 모습을 보고 올포원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그래도 그가 초월자들에게 품고 있는 적의를, 세계에 지닌 한을 잘 알기 때문에 혹여 어떤 사고를 치지는 않을까 우려했었는데.
다행히 올포원은 무미건조한 눈길로 주변을 살피기만 할 뿐,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는 않고 있었다.
원래의 올포원이라면 연우가 아무리 능력을 구속했다고 해도, 자신의 의지를 어떻게든 관철시키려 했을 테지만.
민채영과의 만남이 그에게 미친 영향이 아주 컸던 건지, 올포원은 여태 얌전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래서 아난타는 올포원과 민채영의 관계가 항상 궁금했다.
'각자 불안전하기 때문에 도리어 서로를 어떻게든 채워 주려는 걸까?’
결여(缺如)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둘 모두 오래도록 채워지지 않던 무언가가 있었기에 서로의 존재로 그것을 채우려는 게 아닐까.
아난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사랑의 형태는 여러 가지가 있는 법이니.
'나와 그이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렇기에 아난타는 민채영과 올포원의 인연이 부디 좋은 결과를 맺기를 바랐다.
둘 모두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채영아.”
그리고 다행히 민채영은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녀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민채영이 겁을 잔뜩 먹은 미어캣처 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세샤가 덥석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으, 응……?」
“저기 공연하는 거 같은데 공연 보 러 가자.”
「응? 그게……!」
“따라와.”
세샤는 민채영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손을 잡아끌었다.
대답 따윈 듣지 않겠다는 듯이.
민채영은 ‘어버버’거리다가 얼결에 강제로 끌려다니며 인파 한가운데를 같이 가로질러야만 했다.
“세샤! 앞 똑바로 봐!”
아난타와 올포원도 그녀들의 뒤를 따라붙었다.
딸이 저렇게 막무가내로 굴 때는 어떻게 대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무슨 사고라도 나지 않을까 노파심이 드는데.
탁!
아니나 다를까.
세샤가 갑자기 달리다 말고 어떤 노인과 어깨가 살짝 부딪치고 말았다.
회색 머리에 한쪽 눈에는 안대를 찬 노인.
한쪽 어깨에 커다란 까마귀를 얹고 있는 독특한 외양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세샤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살짝 스친 정도에 불과해도, 자신의 실수이고 상대방이 기분 나빠할 수 있으니 사과하는 게 옳았다.
"……."
하지만 애꾸눈의 노인은 말없이 세샤와 부딪친 어깨를 흘깃 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얘가 진짜! 그렇게 뛰지 말라고 해도……!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혹시 다치신 곳이라도 있으실까요?”
아난타는 한 박자 늦게 도착하고,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분위기가 좋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
노인은 여전히 애꾸눈으로 세샤와 아난타를 번갈아 보기만 할 뿐.
가타부타 아무 말도 없어 혹시 벙어리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까악! 까아악!
그때, 까마귀가 크게 날갯짓을 하면서 괴상한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소리가 얼마나 크고 우렁찬지, 주변을 지나던 사람들이 황급히 노인과 거리를 벌리며 힐끔 이쪽을 쳐다보았다.
아난타는 이상하게 ‘불길한’ 무언가를 느껴야만 했다.
말로 표현 못 할 뭔가가, 죽음의 기운이, 전장에서나 느껴질 법한 음습한 바람이 노인에게서 잔뜩 풍기는 것 같았다.
“혹시 다치신 곳이 있으시면 말씀을……!”
그래서 아난타가 뭐라고 말을 하려는데, 노인이 갑자기 그녀를 향해 손을 뻗어 왔다.
너무나도 느릿느릿하고 자연스러운 동작이라, 아난타는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느끼지도 못했다.
그 동작 어디서도 어떤 살의나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엄마!”
하지만 뒤늦게 세샤가 다급히 자신을 부른 뒤에야, 아난타는 노인의 손끝을 중심으로 불길함이 감돌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고난도의 마술(魔術)……!’
아난타가 다급히 마력을 끌어올리려 했지만, 느리게만 보이던 노인의 손길은 어느새 그녀의 얼굴을 완전히 덮쳐 오고 있었다.
이대로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기 감이 머릿속을 가득 메우던 그때.
탁!
별안간 옆에서 다른 팔이 튀어나오며 신경질적으로 노인의 손목을 낚아챘다.
아난타의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익숙한 얼굴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올림포스의 새로운 수장, 아테나가 인상을 잔뜩 굳힌 채로 노인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곳에서 소란은 용납되지 않는다는 말을 그새 잊은 겁니까, 오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