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다과회 (3)
‘머, 멋져!’
세샤는 오딘의 손을 낚아채면서 박력 있게 한마디를 쏘아붙이는 아테나의 모습을 보면서 ‘치인다’는 느낌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친구인 박유민이 아이돌 가수니 덕후니 하는 것들을 이야기할 때는 별반 와닿지 않던 것들이건만.
아테나가 보여 주는 모습은 정말이지 멋, 그 자체였다.
그러기에 간절히 바랐다.
저 악당처럼 보이는 오딘을, 이 멋진 언니가 멋있게 무찌를 수 있길.
* * *
순간, 깊은 침묵이 내려앉은 것 같 았다.
“……시건방진 건 여전하군.”
오딘은 자신의 손목을 가만히 내려 다보다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고오오오-
그와 동시에 흉험한 기운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끼아아아!
끔찍한 귀곡성(鬼哭聲)이 사방에서 메아리처럼 울렸다.
오딘의 별명은 ‘죽은 전사자(戰死者)의 아버지’.
전쟁터에 죽은 전사들의 영혼을 수집하고, 개인 사병으로 부리기에 붙은 별명이었다.
격의 폭풍에 실린 귀곡성은 전부 그러한 것들이었다.
전쟁터에서 오딘의 이름을 외치고, 오딘에게 신앙을 바치면서 죽은 이들의 영혼이 내뱉는 절규(絶叫).
그것들 하나하나가 전부 아테나에 대한 적의와 악의를 띠고 있었다.
만약 오딘이 명령만 내린다면 당장 통제에서 벗어나 그녀에게 달라붙어, 갖가지 저주와 액운을 쏟아부으려 들 게 분명했다.
물론, 그것이 아테나를 위기로 몰아넣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테나의 격 역시 오딘과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을 만큼 뛰어난 것이었으니까.
칠혹왕의 수석 사도.
연우가 칠흑왕의 주 자아로서 이 시간대에 방문한 이상, 아테나는 소싯적의 크로노스가 돌아온다고 해도 뒤지지 않을 위대한 격을 자랑했다.
오딘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의 하나 남은 눈은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담고 있다는 ‘영지안(靈智眼)’이었으니까.
그 짧은 시간 동안 영지안은 아테나의 격을 판별하고, 오딘과의 싸움에 대한 결과를 내놓은 상태였다.
결과물은 아주 간단했다.
-불가.
절대 싸워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귀찮게 만드는 것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영지안이 추가적으로 가져다준 판단이었다.
그래서 오딘은 감히 자신에게 이빨을 들이밀려는〈올림포스〉의 새로운 수장을 노려보았다.
여차하면 여기서 승부를 볼 생각도 있다는 듯이.
물론, 아테나 역시 여기서 한 수 접어 줄 생각 따윈 추호도 하지 않았다.
아스가르드는 줄곧 올림포스와 비교되곤 하던 곳.
크로노스가 실각하면서 아스가르드의 성세가 좀 더 커졌다고는 하나, 올림포스의 새로운 부흥을 꿈꾸는 그녀로서는 절대 여기서 굽힐 수 없었다.
아니, 애당초 그럴 생각도 없었다.
자신이 구해 준 세샤는 공적으로는 올림포스 왕의 조카였으며, 사적으로는 그녀의 사촌에 해당하는 아이였다.
쉽게 말해 혈육이니…… 언니로서의 자존심도 있으니 절대 가만히 묵과할 수 없었다.
“여기가 어딘지, 여기서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 그런 걸 염두에 뒀으면 좋겠습니다만.”
아테나는 한때 숙부였던 포세이돈과의 대립에서도 큰 승리를 거뒀을 정도로 승부사적인 기질을 지니고 있었다.
평상시에는 이성적인 면모가 강할지 몰라도, 막상 싸움이 벌어지게 되면 절대 물러서지 않는 호전적인 성격인 것이다.
“이 내가, 오딘이, 저들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건가?”
“봐야죠.”
“뭐라?”
오딘의 하나뿐인 눈이 살짝 일그러졌고.
아테나는 그런 그를 보면서 한쪽 입술을 한껏 비틀었다.
“눈치를 보니까 여기에 온 것 아녔습니까?”
끼아아아!
귀곡성이 더 커지면서 사방으로 강풍이 휘몰아쳤다.
“어, 어어?”
“이런 씨팔! 이게 무슨 짓이야!”
“싸우지 말라고 분명히 경고했는데……!”
“젠장! 일단 피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혹시나 귀곡성에 휘말릴까 싶어 황급히 자리를 피하기 시작했다.
휘휘휘……!
쩌적, 쩌저적-
노점상이 와르르 무너지고, 땅이 갈라졌다.
“외뿔부족은 뭘 하는 거야! 저것들 안 말리고!”
오딘이 대동하고 있던 아스가르드의 신들과 아테나의 뒤를 따르던 올림포스의 신들이 일제히 병장기 쪽으로 손을 가져가는데.
“개판 오 분 전이구만.”
갑자기 하늘에서부터 굵직한 목소리가 음산하게 퍼졌다.
오딘이 자랑하는 귀곡성의 강풍이 음험함을 자랑한다면, 이 목소리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공포를 부르는 무언가를 담고 있었다.
마기(魔氣).
그것도 짙을 대로 짙어서 마치 심연을 퍼 올린 것처럼 너무나 까맣게 느껴지는 흑색마기(黑色魔氣)였다.
악마들 중에서도 단 한 명만이 보유하고 있다는 마기.
[바알이 강림합니다!]
콰르르릉!
하늘을 가르며, 검은 벼락이 아테나와 오딘이 있는 자리로 떨어졌다.
아테나와 오딘은 자칫 위험할 수 있겠단 생각에 황급히 몸을 뒤로 물렸고.
원래 그들이 있던 자리에 벼락이 쇄도한 뒤, 검은 폭풍이 휘몰아치면서 점차 사람의 형태를 갖췄다.
파직, 파지직-
얼마나 강대한 격을 지니고 있었던지, 혹색마기가 스파크처럼 튀어 올랐다.
그러면서 드러나는 얼굴.
르 인페르날의 수좌, 바알이 송곳니가 훤히 드러나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겉모습과 달리 그가 정말 웃고 있다고 여기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이곳은 무왕의 권역이다. 괜히 사고 쳐서 쪽팔릴 일 만들 생각 말고 그만 좀 하지?”
쿠릉, 쿠릉, 쿠르르릉-
[‘바사고’가 강림합니다!]
[‘아몬’이 강림합니다!]
[‘바르바토스’가 강림합니다!]
……
바알의 뒤를 따라 마왕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마기는 점점 더 양을 불려 나갔다.
[악마의 사회, ‘르 인페르날’이 완전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도합 70여 명의 대마왕으로 구성된 대군단의 사기는 그야말로 폭거(暴擧), 그 자체였다.
“르, 르 인페르날이……!”
“절대악이 모두 나타날 줄은……!”
은근히 아테나와 오딘의 충돌을 기대하던 이들은 하나같이 마른침을 삼켰다.
천계에 아무리 크나큰 환란이 닥쳐도 웬만해서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던 절대악의 사회가 아니던가.
한평생 살면서 마왕을 직접 목격할 일이 없는 이들도 대부분이기에 그들이 주는 충격은 무척이나 클 수밖에 없었다.
“바알, 감히 너의 그 알량한 군세로 날 핍박하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하지만 오딘은 마기가 주는 압박에도 전혀 주눅 드는 바 없이 흉흉한 안광을 띨 뿐이었다.
바알의 웃음이 커졌다.
“그렇게 보이나?”
“그렇게 보인다면?”
“그럼 아주 잘 봤다고 말하려 그랬지.”
바알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어? 서, 서광이 드리운다!”
구경꾼 중 이상 현상을 발견한 누 군가가 하늘을 보며 소리쳤다.
온통 검은 먹구름으로 가득한 하늘 사이로, 햇살처럼 따사로운 빛줄기가 드리웠으니까.
[메타트론이 강림합니다!]
[미카엘이……!]
[라파엘이……!]
……
[신의 사회, ‘말라흐’가 이 땅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르 인페르날이 선 곳과는 정반대쪽.
서기장 메타트론을 중심으로 한 대천사들이 일제히 휘황찬란한 날개를 퍼뜨리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마기로 가득하던 공간에 서기(端氣)가 물밀듯이 들이닥치면서 먹구름을 밀어냈다.
말라흐까지……!”
“절대선은 왜? 전쟁이라도 벌이려는 건가……?”
사람들이 모두 혼란스러워하는 가운데.
메타트론이 입가에 자애로운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환란은 더 큰 환란만 부를 뿐입니다. 올포원이 갑자기 실종되어 하계로 내려올 수 있게 된 이때, 가뜩이나 어수선해지기 쉬운 천계의 질서를 이런 사소한 다툼으로 흩뜨려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메타트론의 시선은 오딘과 아스가르드에게 향해 있었다.
그 때문에 아스가르드 신들의 얼굴은 완전히 굳어 버리고 말았다.
말이야 그럴듯하게 꾸몄을지 몰라도, 메타트론은 노골적으로 올림포스의 편을 들어 주고 있었으니까.
“항상 그런 식이었지.”
올림포스, 르 인페르날, 말라흐.
천계에서도 손꼽히는 성세를 자랑하는 세 곳이 아스가르드와 대치를 하게 된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딘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눈치였다.
“천마에 줄을 선 것들이 벌이는 짓은 항상 그럴듯하게 포장이 되어 있어.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결국 제 잇속을 채우기 바쁘면서 말이야.”
그 말에 아테나와 바알, 메타트론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저 말이 천마를 도와 흑막을 자처하던 그들의 세태를 비꼬는 것임을 모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아테나는 연우로부터 올림포스의 비밀에 대해 들어서 알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천마와 칠흑왕이 화해를 한 이때.”
오딘의 영지안이 요요하게 빛났다.
“너희들의 그 동맹이 과연 얼마나 더 유지될 수 있을지 구경하는 것도 재미가 있겠지.”
"……!"
"……!"
"……!"
“고금을 통틀어 공통된 적이 사라진 이후 동맹 체제 내에 벌어진 내분과 갈등은 항상 주요 행사였으니까 말이야.”
아테나와 메타트론, 바알은 어쩐지 그 말에 단호히 부정하는 대답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오딘의 예지(叡智)가 대수롭지 않게 여길 영역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오딘은 꺼냈던 지팡이를 도로 아공간으로 던져 넣으면서 몸을 반대로 돌렸다.
“다들 이만 숙소로 돌아간다.”
저벅!
오딘과 아스가르드 신들은 그 말을 끝으로 모두 자취를 감췄다.
[신의 사회, ‘아스가르드’가 물러납니다!]
“그놈들 참 꽁무니 빼는 주제에 끝까지 지지 않으려고. 쯧쯧! 애쓴다, 애써."
바알은 그런 오딘을 보면서 가볍게 코웃음만 칠 뿐이었지만.
어떻게든 뒤로 내빼야 하는 상황임이 뻔히 보이는데, 마지막에 자존심이라도 챙기려는 모습이 그로서는 우습게 여겨졌던 것이다.
“그나저나 아테나, 그리고 칠혹왕의 조카분.”
세샤는 순간 바알이 자신을 부르자 화들짝 놀란 얼굴이 되었다.
‘날 알고 있어……?’
르 인페르날은 그녀도 알고 있을 정도로, 98층 천계의 균형과 질서를 지킨다고 널리 알려진 거대 악마 사회.
그곳의 수장이 자신의 존재를 정확히 알고 있으니 놀랄 수밖에.
“쿠키라도 한 점 하겠나?”
그리고 바알이 곧 주머니를 뒤적거리면서 꺼낸 쿠키 세트에 다른 의미로 눈을 동그랗게 떠야 했다.
네모난 철제 상자 안에 가지런히 놓인 쿠키.
초코칩이 콕콕 박혀 있어서 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군침이 돌았다.
“아주 고소한 냄새가 나지? 흐흐. 이게 이래 봬도 83층에서만 나는 셰드 빈이라는 코코아 품종으로 만든 거거든? 나도 아주 아끼는 것이다만, 둘 다 고생했으니 큰맘 먹고 내주마.”
세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악마 중의 대악마라 불리는 존재가 쿠키 세트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황에 잠시간 머뭇거리는데.
“의심하지 않고 맘 편히 드셔도 무방합니다. 원래 바알 님의 취미가 디저트 베이킹이시니까요. 이것 말 고 91층의 블러드 스트로베리로 만든 딸기 케이크도 훌륭하지요. 향긋함이 아주 일품이랍니다.”
갑자기 메타트론이 세샤의 뒤편으로 슬그머니 나타나더니 쿠키를 한 움큼 집어 입안에 털어 넣었다.
가뜩이나 험상궂은 바알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야. 너한테는 먹으라고 권한 적이 없는데?”
“어차피 배에 들어가면 전부 끝인 것을, 누가 먹든지 맛있게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남!”
“아오…… 하여간 열린 주댕이라고, 아주.”
바알은 어이가 없다는 투로 메타트론을 바라봤지만, 메타트론은 뻔뻔하게 쿠키를 한 움큼 더 집어 맛있게 즐길 뿐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세샤에게 어서 먹어 보라는 식으로 눈짓을 보냈고.
세샤는 잠깐 머뭇거리다 쿠키를 하나 꺼내 살짝 베어 물었다.
‘마, 맛있어……!’
카카오의 쌉쌀한 달콤함과 잘 구워진 쿠키의 촉촉함이 입 안을 감도는 것 같았다.
아직 식지 않은 쿠키의 식감도 너무 좋아서 눈이 번쩍 뜨일 정도였다.
‘악마의 맛’이라는 단어가 절로 생각날 정도였다.
“아.”
세샤는 자신도 모르게 정신없이 쿠키의 맛을 즐기다 말고, 뒤늦게 그새 쿠키를 다 먹었다는 사실에 아쉬움을 토로했다.
메타트론은 그런 세샤가 귀여웠던지 눈가에 엷은 미소를 띠었다.
“아무래도 칠혹왕의 조카님께서 바알 님의 특제 쿠키가 아주 마음에 드신 듯한데…… 조금 더 드셔도 무방하겠죠?”
바알은 팔짱을 끼면서 콧방귀를 뀌었다.
“당연한 말을! 쿠키의 매력을 아는 사람 중에 악인은 없지. 챙긴 건 몇 개 없다만 맘껏 즐겨라.”
“악마는 있지 않나요?”
“메타트론, 그대는 이런 일에는 좀 닥칠 필요가 있을 것 같다만.”
바알과 메타트론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세샤는 이 맛있는 걸 혼자서 즐겨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잘 챙겨서 삼촌과 할아버지에게 갖다 줄 수 있을까 고민을 하던 중에 아테나가 바알에게 던지는 질문을 얼핏 엿들을 수 있었다.
“아가레스 님이 보이질 않는데, 어 디 가셨나요?”
그런데.
"……."
여태 태연한 태도를 유지하던 바알이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린 채 아무 대답도 없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그래서 아테나는 조심스럽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고.
바압은 르 인페르날을 떠나기 전에 빌어먹을 놈팡이가 했던 말을 떠올리면서 지끈거려 오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야만 했다.
-뭣이? 감히 이 몸의 허락도 없이 결혼을 해? 누구 마음대로! 안 되겠다! 댕댕아! 준비해라!
-왕!
그놈이 대체 무슨 헛짓거리를 하려는지 알고 싶지도 않다…….
바알은 그렇게 속으로 한숨과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