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854화 (854/862)

54화. 다과회 (4)

“쿠키는 어떤가? 입맛에 맞는가?”

“맛있습니다. 안사람이 좋아할 것 같습니다.”

“흐.”

“……왜 그렇게 웃으십니까?”

“벌써 안사람이라고 말하는 걸 보니, 참 좋을 때구나 싶어서.”

메타트론과 바알은 곧 연우의 초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들이 강림했다는 사실을 연우가 이미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연우는 그들을 조부, 우라노스의 친구들로 대했다.

천마가 이 우주라는 ‘굴레’를 굴리기 훨씬 이전부터 같이 손을 잡아, 칠흑왕의 도래를 어떻게든 막아 보고자 애썼던 존재들이 아니던가.

비록 지금은 전성기 시절과 비교하면 찌꺼기만 남은 상태라고는 하나, 그래도 그들의 의지는 반드시 존경해야만 하는 것들.

그래서 연우는 아무 스스럼없이 그들에게 말을 낮춰 달라 청하였고, 바알은 악마답게 흔쾌히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메타트론은 무슨 생각인지 아무 대답도 없이 그저 웃기만 할 따름이었지만.

그런데 말을 놓게 되자마자 바알이 결혼 선물이라며 무언가를 한가득 꺼내 놓았다.

……쿠키와 차였다.

연우는 한순간 ‘악마가 쿠키를?’이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지만, '굴레’를 감기 전에도 바알이 비슷한 취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어렴풋이 떠올릴 수 있었다.

반복되는 우주의 절망 속에서 유일하게 취미를 붙인 부분이라고 했던가?

하여간 그런 비슷한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했다.

그리고 다과를 즐기면서 담소를 나누게 되었는데, 그의 태도는 마치 나이에 찬 친구 손자를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따스하기만 했다.

그것이, 아주 잠깐 연우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언젠가 크로노스의 신화에서 엿보았던 조부님이 떠오른 탓이었다.

'굴레’를 감을 수 있게 되었으니 언젠가는 에도라를 데리고 그분도 뵈러 가야겠다…… 연우의 마음 한편에 그러한 다짐이 무럭무럭 생겨났다.

“이제는 알고 있겠지? 우리가 줄곧 자네를 감시하고 있었다는 거.”

칠흑왕은 각 ‘굴레’에서 집행자를 선정하여 종말을 일으킨다.

당대 집행자로 선택되었던 것은 연우였고, 메타트론과 바알은 그가 각성할 때를 대비해 언제든 나설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그런데…… 갑자기 자네의 존재가 다른 곳으로 옮겨진다 싶더니 기질이 전혀 달라지더란 말이지. 원래 그랬던 것처럼. 그때 받은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허!”

바알은 연우가 칠혹왕, 그 자체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에 받은 충격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현재 이 시간대에 있는 그로서는 그토록 고대하던 순간이 갑자기 찾아온 것으로만 보였으니까.

“자네의 인생, 우리가 들어볼 수 있겠나?”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숨길 것이 없다는 듯이.

아니, 설사 그런 것이 있더라도 이들 두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털어놓아야만 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우주의 안정과 평화만을 바랐던 숭고한 영웅들이었으니까.

* * *

“……그렇게 된 겁니다.”

“으으으음."

연우는 두 사람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칠흑왕이 된 과정.

‘굴레’를 감게 된 계기.

혼인식이 끝난 뒤에 별의 조각을 찾아 나설 것이란 계획까지도.

바알은 팔짱을 끼며 깊은 고심에 잠겼다.

메타트론이 처음으로 입을 연 건 바로 그때였다.

“……그럼 여기서 할 수 있는 질문은 총 두 가지겠군요.”

달그락.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은 것뿐인데.

그는 어쩐지 주변의 공기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첫째. 당신과 대적하였다던 이블케, 그 친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리고 또 다른 집행자 후보였던 하르마니아의 문제도 있을 텐데요.”

연우가 가볍게 웃으면서 그 말에 대답했다.

“관리국의 목적이 무엇인지 잊으셨습니까?”

“목적……? 아!”

메타트론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뒤늦게 이해를 하고 가볍게 탄성을 터뜨렸다.

관리국은 시스템의 대변인들이다.

시스템이 직접적으로 수행하지 못하는 일들을 대신 행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시스템의 총괄 권한을 지니고 있는 연우는 저들에게 어떻게 인식될까?

“칠혹왕의 자아로서 가지고 있던 능력은 모두 회수해 뒀습니다. 관리자 자격도 박탈해 뒀고요. 그렇다면 그 결과는 불에 보듯 뻔한 일 아닐까 싶습니다만.”

칠흑왕의 자아도, 최고 관리자도 아닌 이블케라?

천마의 얼굴이라는 위치도 있다지만, 천마가 자신의 분신들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다는 건 웬만한 고위 신격들이라면 다 알고 있는 사실.

사실상 천마의 얼굴로서 갖고 있던 힘도 상당수 상실한 상태일 것이다.

거기에 이블케는 그동안 흑막처럼 살아오며 관리국 내에서 두려움과 함께 증오도 많이 샀던 존재.

그리고 조직 내에서 그의 위치를 바라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정적(政敵)들이 이블케를 가만히 둘까?

이블케의 성격상 잠자코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테니, 단순히 끌어내는 정도로만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이블케의 편을 들어주는 이들도 적잖게 있을 테니까.

메타트론의 머릿속에 한순간 반 토막이 난 채로 내분이 일어난 관리국의 모습이 그려지는 것만 같았다……!

“……인성.”

메타트론은 언젠가 연우의 권속이 그를 가리켜 했던 말을 떠올리고 말았다.

그는 이내 손을 들어 가볍게 자신의 입술을 두들겼다.

“이런 실수.”

“……눈매가 웃고 계시는 게 전혀 그렇게 보이시지 않습니다만.”

“착각입니다.”

“그거 아십니까? 주먹 앞에서는 모두 진실을 토로하게 된다는 거요.”

“……그런 면모는 어째 조부님과 성격이 아주 비슷하신 것 같군요.”

“집안 내력이라는 게 어디 가는 건 아니니까요.”

저렇게 뻔뻔하게 말을 잘하는 것도 어찌 우라노스와 똑같을 수 있는 건지.

메타트론은 슬쩍 창 너머로 서 있는 건물을 바라보았다.

저곳에는 부활한 크로노스도 머물고 있다.

단순히 감지되는 격만 보더라도 이미 전성기 시절, 신왕의 격을 복구한 게 분명한바.

칠흑왕과 신왕이 함께 이 우주를 돌아다닌다?

‘……종말이 따로 없군.’

이쯤 되면 과연 ‘굴레’가 멈추게 된 것이 옳은 일인가 진실로 걱정될 수밖에 없는 수준이었다.

메타트론은 더 이상 깊게 생각하기를 거부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이제 이 탑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칠흑왕?”

“그대로 놔둘 생각입니다.”

“그대로 놔둔다……?”

“칠흑왕의 본체를 강제로 누르고 있을 구속 장치는 필요할 테니까요.”

순간, 메타트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바알이 뒷말을 덧붙였다.

“별들을 찾아 허수세계(虛數世界)로 넘어갔을 때에 뒤통수 맞을 걸 대비하려는 거군?”

“뒤통수라는 건 어디까지나 제가 때리는 거라야지, 남들에게 맞는 건 질색입니다.”

바알은 어벙한 얼굴이 되어 메타트론을 돌아보며 말했다.

“……저거 진짜 우라노스 손자 맞는 거 같은데?”

“우라노스와 크로노스의 완성형이라는 게 보다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3대가 인성 파탄자라니……."

이제는 바알마저도 이 우주의 미래에 대한 걱정이 슬슬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연우로서는 그런 그들의 반응이 떨떠름했지만.

“하여간 네가 별의 조각을 찾아 여기저기를 누비고 있을 때, 다른 놈들이 텅 빈 본체에 함부로 손을 쓰지 않게끔 지켜봐 달라는 것이겠지?”

“그렇습니다.”

“탑이 칠흑왕의 본체…… 르’뤼에를 계속 구속하고 있을 테니 혼자서 날뛸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될 것이고, 만약에 별들을 포함해 딴생각을 품은 이런저런 어중이떠중이들이 접근한다고 해도 그것들만 막으면…… 어?”

바알은 어떤 생각에 미쳤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이상한데? 르’뤼에에 접근을 하려면 자연스레 탑에 접근할 수밖에 없잖아? 그럼 그 속에 갇히게 될……!”

바알은 말을 하다 말고 손으로 얼 굴을 덮고 말았다.

“……트랩이군.”

“치즈 냄새를 맡고 꼬여 든 쥐는 족족 잡아야지 않겠습니까?”

바알은 이제 연우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어중이떠중이들 중 아마 상당수가 별일 것이다.

포식에 포식을 거듭해 온 놈들만큼 힘에 대한 갈증이 심한 자들도 없을 테니.

그러니 잠시간 연우가 자리를 ‘비우게’ 된다면, 귀신같이 칠흑왕의 본체로 몰려들 게 분명했다.

연우는 바로 그러한 기회를 노리려는 것이다.

탑에 한 번 갇히게 되면, 제아무리 뛰어난 최고위 신격이라고 해도 100층을 통과하지 못하는 한 절대 빠져나갈 수 없으니까.

그러니 가만히 앉아서 별의 조각들을 여럿 회수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바알은 그러한 연우의 생각이 질릴 따름이었다.

아무리 별들을 엮어 내기 위한 덫을 설치한다고 해도, 설마 제 본체를, 그것도 칠흑왕의 육체를 미끼로 던질 생각을 하는 인간이 어디 있단 말인가!

'아니, 그런 생각을 할 줄 아니 지금 저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건가.’

어쨌거나 여러 가지 이유로(?) 두려움을 부르는 존재인 것이다.

“여하튼 탑으로 흘러들어온 이들을 제압하고 통솔할 만한 존재들이 필요하겠군요. 여태까지 그러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메타트론의 말에 바알의 표정이 구겨졌다.

“이제야 좀 쉴 수 있게 되었나 했더니, 또 그 고생을 하라고?”

연우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마 조부님의 친구인 두 분을 제가 그렇게 막 부려 먹기야 하겠습니까?”

“충분히 그럴 것 같은데?”

“설마요.”

연우의 미소가 짙어졌다.

“같이 부려 먹혀질 동료들을 붙여 드리겠습니다.”

“거봐! 내 이럴 줄 알았지!”

바알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투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말투와 달리 정말 싫어하는 투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궁금해하는 것에 가까워 보였다.

한평생 평화와 균형을 위해 살아온 인생이 아니던가.

갑자기 자유롭게 살라고 하니, 오히려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막막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전과 일의 성향은 비슷하지만, 난이도는 별달리 어려워 보이지는 않는 일을 맡긴다고 한다.

당연히 귀가 솔깃할 수밖에.

하물며 ‘동료’를 붙여 준다면 이전 처럼 심심할 일은 없을……!

“그 붙여 줄 동료가 누굽니까?”

메타트론도 궁금했던지 질문을 던졌고.

연우는 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들었다.

“불렀으니 지금 올 겁니다.”

“뭔……! 무, 뭐야 이거?”

바알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말고 갑자기 사위를 짓누르는 엄청난 압박감에 두 눈을 크게 떴다.

꾸우우우-!

대기를 타고 전해지는 소리가 아닌 영혼, 저 밑바닥에 위치한 심연을 자극하는 울음소리.

그 의미가 무엇인지 모를 리가 없었기에, 바알은 황급히 바깥쪽으로 나섰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 그는 볼 수 있었다.

“이런 미친……!”

바알은 자기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고 말았다.

하늘이…… 칠흑색으로 서서히 물들고 있었다.

그러면서 하늘을 뒤덮으며 나타나는 안개와 수많은 촉수 더미들.

“저건 대체……!”

“저, 저게 왜 여기 나타나!”

“타계의 신이다! 타계의 신이 집단으로 나타났어!”

놀란 것은 바알만이 아니었다.

연우의 혼인식을 축복해 주기 위해 찾아왔던 수많은 손님들 모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안’쪽 존재들에게는 온통 기괴하게만 보이는 형태를 갖춘 ‘밖’의 존재들.

미지와 공포를 부르는 타계(他界)의 신들이 강림하려는 것이다!

[‘검은 풍요의 요신’이 아버지의 부름에 기괴한 음색으로 답변합니다!]

[‘이름 없는 안개’가 아버지의 이름을 외치며 몰려옵니다!]

['불결의 근원’이 어머니가 될 분에게 잘 보여야 한다면서 오랜만에 몸을 씻었노라고 뽐냅니다!]

[‘춤추는 녹색 불길’이 아버지의 혼인을 축하한다면서 덩실덩실 춤을 추며 모습을 비춥니다!]

[‘멸망을 노래하는 자’가 아버지를 위해 노래 한 곡조를 뽑아 보겠다며 목을 가다듬습니다!]

……

[혼세팔신을 비롯한 여러 타계의 신들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밤(녹스)’이 피어납니다!]

타계의 신들은 존재 하나하나가 웬만한 행성보다도 월씬 큰 크기를 자랑하는바.

그렇기에 여기에 모습을 비춘 것은 저들의 아주 자그마한 국소 부위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저들이 내뿜는 존재감은 어마어마했다.

과거에 기어 다니는 혼돈 하나만 나타나도 모두가 식겁했던 것을 감안한다면, 혼세팔신이 모조리 나타난 지금의 상황은 도저히 말도 안 나오는 상태일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때, ‘밤’이 피어난 자리로, 거대한 눈이 활짝 열렸다.

['경계의 거주자’가 하나뿐인 아버지에게 경배를 바칩니다.]

“설마 동료란 것들이……?”

연우가 말없이 웃어 보이자, 바알은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자기도 모르게 욕지거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젠장.

억겁의 세월 동안 저들과 원수로 살아왔던 그로서는 도저히 예상치 못한 인선이었다.

“……이봐, 메타트론.”

"예. 말씀하세요, 바알.”

“정정한다. 저놈, 우라노스보다 더한 또라이야.”

“동의합니다.”

메타트론이 씁쓸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그때.

쿠쿠쿠쿠……!

이번에는 갑자기 정반대 쪽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일어나 우뚝 서는 것이 보였다.

험악한 인상을 지닌 토끼가 우락부락한 근육을 뽐내면서 몸집을 부풀리고 있었다.

[‘극권의 군주’가 아버지를 위한 근육 쇼를 선사합니다!]

『오홍흥홍. 이 귀염둥이 라플라스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어용!』

라플라스.

그는 관심을 빼앗기는 것을 죽어도 싫어하는 관심 종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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