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다과회 (5)
-혼례의 세 번째 단계, 납길(納吉).
라플라스가 가져온 사주단자는 인연을 의미하는 붉은 실로 꽁꽁 묶여 있었다.
예부터 외뿔부족에서 홍선(紅線)은 월하노인이 연정을 품은 두 남녀의 발목을 연결할 때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렇게 연결된 남녀는 절대 헤어지지 않으며, 평생토록 백년해로하게 된다는 것이다.
크로노스는 그것을 받고 괜히 울컥해 눈시울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 다.
차마 실을 풀지 못하겠던지 손이 달달 떨리는 게 보였다.
“……마누라.”
“왜 그래?”
“나, 못하겠다……."
“으이그. 하여간, 참. 유별이야, 유별.”
레아는 그런 남편이 귀엽다는 듯 가볍게 웃었다.
신왕으로 있을 때에는 그렇게 패도적이고, 수하들 사이에서도 개차반으로 유명했던 양반이 정작 자식 일에서는 이렇게 감정적이니 웃음이 절로 나왔던 것이다.
바깥에서 보이는 모습과 달리, 이런 가정적인 면모 때문에 자신이 더더욱 이 사람을 사랑하게 된 건지도 모르겠지만.
“이봐, 남편. 우리 아들 어디 사라 지는 거 아니다? 누가 보면 진짜 먼 길 떠나는 줄 알겠네. 원하면 얼마든지 볼 수 있는데.”
“그래도……! 흐끅.”
“우리가 없어도 어련히 알아서 잘 살았던 아이잖아. 그러니까 아이로만 생각하면 안 돼. 품에 안을 게 아니라 훨훨 날 수 있도록 풀어 줘야지.”
“알아. 내가 이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우리 아들이면 충분히 잘한다는 거…… 그래도……!”
“에휴! 남자도 나이 들면 그렇게 눈물이 많아진다더니, 우리 남편이 딱 그 꼴이네? 아들 장가보내는 데도 이 정도인데, 막둥이가 시집가겠다고 하면……!”
“안 돼애애애앳!”
크로노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레아는 자기도 모르게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크로노스를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손수건으로 눈물을 홈치고 있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크로노스의 얼굴은 흉신악살처럼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마치 전성기 시절의 신왕이라도 되돌아온 것 같았다.
“그게 누군지 몰라도 죽여 버린다! 죽여 버릴 거야아아앗! 아니다, 아니야. 우리 막둥이랑 만나기 전에 미리 없애 버리자. 연우에게 말해서 "굴레’를 좀 앞으로 당기면, 어떤 빌어먹을 놈팡이 새끼인지 알 수 있……!”
저대로 뒀다간 두 눈에서 분노의 불길이 잔뜩 쏟아져 나올 기세였다.
레아는 못 말린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사주단자를 묶고 있던 붉은 끈을 풀어 내용을 살폈다.
그리고 미리 해체해 놓았던 택일단자와 같이 비교해 날짜를 확인했다.
납길은 바로 여기서 괜찮다 싶은 날짜를 정해 신랑 측에서 신부 측으로 다시 소식을 전달하는 행사를 의미했다.
레아는 여전히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다 삿대질을 하면서 '막내딸의 미래 사위 암살 계획’을 짜고 있는 크로노스는 그냥 무시하고, 정성스레 날짜를 적은 종이를 다시 붉은 끈으로 매듭지었다.
“라플라스.”
『옛썰! 아니, 옛퀸!』
레아의 그림자가 불쑥 올라오면서 라플라스가 반듯하게 경례 자세를 취하며 나타났다.
조금 전까지 바깥에서 다른 혼세팔신들과 어울리고 있었다고는 생각지도 못할 만큼 재빠른 움직임이었다.
라플라스는 이 집안의 최고 권력자가 누군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거 좀 전달 부탁할게.”
『조금 전과 같이 제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무슨 일이 있더라도 기필코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겠습니다용!』
괜히 쓸데없는 포부를 밝히며 단자를 받으려는데, 갑자기 레아가 건네던 그것을 도로 거둬들이면서 굳은 얼굴이 되었다.
“아니. 그러지 마.”
『예, 예……?』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다치지 마. 그 어떤 중요한 일이라고 해도 라플라스, 너의 건강과 안전보다 중요한 건 없으니까.”
『마, 마님……!』
순간, 라플라스의 두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영겁의 세월을 살면서 자신에게 이런 따뜻한 훈계를 주었던 사람이 있었던가!
가슴이-물론, 근육으로 잔뜩 뒤덮여 크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처음으로 콩닥콩닥하고 뛰었다.
“알았어, 몰랐어?”
레아는 끝까지 대답을 듣겠다는 듯, 엄중한 태도를 놓치지 않았고.
『며, 명심하겠습니다용!』
라플라스는 다시 군기가 바짝 든 채로 경례 자세를 취했다.
배시시.
레아는 그제야 표정을 풀고 웃었다.
“그래. 이래야 우리 착한 라플라스지.”
레아는 귀엽다며 라플라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손길이 너무 따스해서 라플라스는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서 흐물흐물 녹아 버릴 것만 같았다.
『이 라플라스! 앞으로 평생토록, 아니, 영원토록! 마님의 충성스러운 토끼가 되겠습니다용!』
“그렇게까지야. 그냥 지금까지 해 온 것처럼 앞으로도 우리 가족들을 곁에서 잘 지켜 주면 된단다.”
『알겠습니다용! 그럼 라플라스, 마님의 분부에 따라 또 다녀오겠습니다용! 출겨-억! 푸쉬쉬쉬!』
라플라스는 다시 예의 그 과장된 동작으로 장난을 치면서 밖으로 나가 버렸다.
레아는 녀석이 문을 빠져나갈 때까지 계속 손을 혼들어 주었다.
그러다 남편이 경탄 섞인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우리 마누라…… 대단하다. 대체 어떻게 저놈을 저렇게 구워삶을 수 있는 거야? 비결이라도 있나?”
“비결은 무슨. 다른 사람들과 행동이 조금 다를 뿐이지, 속은 얼마나 착한 아인데.”
"……."
행동이 ‘조금’ 달라?
누가? 라플라스가?
빡빡이 머리에 토끼 귀를 단 저놈이?
대체 어딜 봐서?
크로노스는 한순간 자신이 알고 있던 단어의 정의가 그새 바뀌었나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레아의 눈이 여전히 순수한 것을 보고 떨떠름하게나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말이 농담이 아니라, 진심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렇게 순수하고 착한 심성을 지니고 있으니, 저토록 괴팍한 놈도 감화되어 다스릴 수 있는 걸까…….
크로노스는 진지하게 레아의 위대함을 곰곰이 되짚어 보았다.
* * *
-네 번째, 납징(納微).
-다섯 번째, 청기(請期).
납길은 신랑 측에서 혼례 날짜를 알리는 것, 납징은 날짜가 결정되었으니 혼례 전에 두 가문의 교류로 예단과 예물을 교환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청기는 두 가문이 이만큼 가까워졌으니,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혼인 허락과 날짜를 확인하는 절차였다.
다만, 세 가지 모두 비슷한 측면이 있어서, 외뿔부족에서도 행사는 거의 같이 이뤄진다고 했다.
크로노스 측과 무왕 측 간에 많은 인사들이 왔다 갔다 하는 동안.
축제는 계속해서 크기를 더해 갔다.
‘육례’라고도 불리는 혼인식의 여섯 절차가 차근차근히 진행되고 있다 보니 기간도 그만큼 늘어날 수밖에 없는바.
‘주요 왕족의 혼인식은 거의 한 달 넘게 이어진다’는 말도 있을 정도여서 축제가 언제 끝날 거라는 기약도 없었다.
그렇다 보니 처음에는 사정이 여의치 않아 외뿔부족 마을에 방문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던 이들도 일정을 정리해 방문이 가능했고.
설사 청첩장을 받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축제 기간에는 마을의 문호를 열어 놓는다는 발표가 있었기 때문에 외뿔부족의 생활상이 궁금했던 이들도 하나둘씩 방문해 오는 중이었다.
그로 인해 무왕이 있는 무궐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크로노스가 있는 별궁 일대도 인산인해를 이뤘다.
탑 내에서도 거의 신화처럼 남아 있던 크로노스와 레아의 귀환이 널리 알려진 데다가, 현재 탑의 최고 지배자라 할 수 있는 연우가 머무는 곳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올림포스의 주요 신들은 ‘가족’의 자격으로 별궁 내전(內殿) 구역 일부에 머물렀고.
아르티야의 멤버들은 ‘친지’ 자격으로 외전(外殿) 구역을 따라 숙소를 배정받은 상태였다.
그렇다 보니 크로노스는 올림포스의 신들과 해후를 가지느라 정신이 없어서 다른 내빈객들은 맞이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 때문에 먼발치에서나마 크로노스와 연우를 한 번 보려 했던 이들은 대부분 별다른 소득도 없이 별궁 바깥에서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다.
하지만 개중에는 그냥 별궁 구경이나 해 보자는 식으로 찾아오는 이들도 있었으니.
그중 한 명이 바로 사자자리였다.
“별것 없군.”
사자자리는 사자 갈기처럼 머리를 한껏 늘여 놓은 독특한 인상을 하고 있었지만, 딱히 이렇다 할 특색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몸을 잘 단련한 초보 구역의 플레이어로만 보일 뿐.
이는 사자자리의 특성 중 하나인 '잠복(潛伏)’이 발동된 까닭이었다.
마치 사냥에 나서기 전까지 깊이 잠들어 있는 사자처럼.
사냥에 나서더라도 도약하기 전까지는 그 커다란 덩치가 움직여도 발걸음 소리 하나 나지 않는 것처럼.
잠복은 사자자리를 뛰어난 사냥꾼으로 만들어 준 가장 큰 특징이었다.
그리고 그건 그의 좌우 양쪽에 시립해 있는 수하들도 마찬가지였다.
사자는 무리 생활을 하며, 수사자 아래에 있는 암사자들도 모두 뛰어난 사냥 실력을 자랑했다.
그렇기에 실력을 숨기고 있는 그들은 여태껏 어느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고 여기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연우가 별을 노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겁 없이 그의 턱 아래까지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연우와 그 주변의 사람들을 관찰해 본 결과, 사자자리가 내린 결론이 바로 그러했다.
겁먹었던 것과 다르게 크게 신경 쓸 것이 되지 못한다고.
그리고 대동한 두 수하, 데네볼라와 알기에바도 같은 생각이었던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여태껏 그들이 본 인물은 아주 많았다.
올림포스의 신들, 아르티야의 멤버들, 메타트론과 바알…… 하지만 그들 중 사자자리의 눈에 띄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나마 아테나쯤이 데네볼라와 알기에바가 신경 쓸 정도였다고 해야 할까?
그마저도 사자자리의 눈에 찰 정도는 아니었다.
혼세팔신이라며 나타난 ‘밤’의 존재들이 있긴 했다만…… 글쎄?
‘알려진 신화가 어마어마해서 혹시나 하는 기대를 했었는데. 역시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지.’
그나마 사자자리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든 놈을 꼽으라 한다면, 경계의 거주자를 말할 수 있을 터였다.
아니, 한 명 더 말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크로노스.
단언컨대, 그는 이미 전성기 시절 때보다 훨씬 강하면 강했지 약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사자자리에게 위기감을 느끼게 한다거나, 경계심이 들게 만들지는 못했다.
그 때문에 사자자리는 자신이 스스로 예상했던 것보다 얼마나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강한지를 객관적으로 판별할 수 있었다.
덕분에 자신감도 가득했다.
‘이런 놈들을 거느린다고 해 봤자, 칠흑왕도 어쩌면 별것 없을 수 있겠군.’
물론, 칠흑왕이나 천마는 당장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들과 결착을 내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을, 그리고 보다 많은 힘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단언컨대 그 시간이 그리 많이 필요하지는 않을 거라는 게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흠, 이대로 그냥 되돌아가기에는 조금 아쉬운데.”
원래의 목적이었던 정탐은 이제 끝났다.
하지만 너무 쉽게 마무리되어 그런지 사자자리는 조금 더 자극적인 뭔가를 해 보고 싶다는 욕심이 불쑥 들었다.
이대로 허수세계로 되돌아가 봤자, 또 한동안 깊은 잠에만 빠져 있게 될 테니까.
이왕 나온 김에 할 수 있는 건 모조리 하고 가야 하지 않겠나.
겸사겸사 칠흑왕의 주 자아의 얼굴도 볼 수 있으면 좋을 테고.
부활했다는 첫 번째 별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혼인식의 과정은 이제 몇 개나 남았지?”
사자자리가 던진 질문에 데네볼라가 고개를 숙이면서 대답했다.
“이제 마지막 절차만 남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마지막 절차라…… 거기서 혼인식이 있다는 거지?”
사자자리의 한쪽 입술 끝이 한껏 말려 올라갔다.
“혼인식을 망치고 만 새신랑의 얼굴이 어떨지, 분노가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지 궁금한걸? 후후후.”
“준비하겠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데네볼라와 알기에바는 구체적인 명령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그대로 조용히 자취를 감췄다.
별궁을 바라보는 사자자리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궁금해, 아주……."
* * *
“공주님.”
“왜?”
샤락.
에도라는 보고 있던 책의 페이지를 넘기다 말고, 집사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밑은 살짝 퀭하게 내려 앉아 있었다.
혼인식이 거행되기 전까지 연우를 만나서는 안 된다는 영매의 통보를 받고, 북받쳐 오르는 울화를 어떻게든 다스리고 있는 중이었다.
가뜩이나 계속 사람 기다리게 만드는 게 특기인 연우인데, 가까이 있는 와중에도 볼 수 없게 만드는 빌어먹을 전통이 짜증 나던 차였다.
“저 공주님을 찾아오신 손님이 이걸 전달해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그냥 열어 보면 아실 거라고……."
집사는 면적이 넓고 높이는 낮은 상자를 내밀었다.
에도라는 이게 뭔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가 뇌물이라도 주려는 걸까?
그런 생각에 뚜껑을 연 그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안에 손수 예쁘게 쓴 편지가 하나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 님 팬클럽 ‘인성교단’의 3기 클럽장 헬이 새신부님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