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혼인식 (1)
『……뭐? 어딜 다녀오는 길이라고?』
장발의 사내, 요르문간드는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뜩이나 별반 익숙지도 않은 인간의 형체로 폴리모프를 한 상태라 불편한 점이 많아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닌 상태였건만.
동생이라고 데려온 헬이 던진 한마디는 순간 그의 사고를 멍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오빠.』
하지만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헬은 소파에 앉은 채로 테이블에다 발을 떠억하니 올리고서는 손톱에 매니큐어를 바르고 있었다.
『왜……?』
『혹시 귓구멍이 막혔어?』
『…….』
『귀찮게시리. 왜 자꾸 똑같은 말을 하게 만드는 거야.』
요르문간드는 순간 이 말괄량이의 뒤통수를 세게 한 대 후려치고 싶다는 충동이 강하게 들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헬은 여전히 자신의 손톱을 살피기에 바빴다.
루비를 곱게 간 질료를 써서 그런지 검지 손톱이 오늘따라 아름답게 반짝이는 것 같았다.
『공주궁인가 거기 다녀왔다니까.』
『그러니까 거길 대체 왜……!』
『왜긴 왜야. 편지 가져다주려고 간 거지』
요르문간드는 한순간 쏟아져 나오려는 욕지거리를 억지로 삭여야만 했다.
『나 몰라? 헬이야, 헬. 인성교단의 3대 교주라구. 그러니 먼 길 떠나는 오라버님을 위해서 이 정도 챙겨 드리는 건 당연하지 않아?』
아이고, 두야.
요르문간드는 머리를 탁 짚으면서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야만 했다.
애당초 여길 따라오겠다고 고집을 피울 때부터 짐작했어야 했는데.
이 멍청한 동생이 기어코 사고를 치고 만 것이다.
여기가 대체 어디인가?
외뿔부족의 마을이었다.
힘을 쓰는 데 있어서는 신과 악마의 사회들마저도 하수로 여긴다는 괴물들이 살아가는 곳.
호굴, 아니, 용굴(龍窟)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 스리슬쩍 담을 넘어 공주궁에 다녀왔단다.
다름 아닌 이번 혼인식의 주인공이 머무는 거처를!
물론, 공주궁의 손님을 빙자해 그쪽 경비 무사에게 편지만 스리슬쩍 주고 왔다곤 하지만, 거처에서 허락 없이 함부로 움직이는 것은 외뿔부족에 대한 무시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만약 외뿔부족에서 이를 문제 삼으면 어떻게 될는지.
고집 피우기도 몸을 쓰는 것만큼이나 대단하기로 알려진 곳이니만큼, 요르문간드는 외뿔부족이 이를 문제 삼았을 때 대체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아 정신이 어질어질할 정도였다.
그런데 정작 이런 폭탄을 안겨 준 녀석은 태연하기 짝이 없으니.
이 일을 대체 어쩌면 좋을까.
‘가뜩이나 형님도 사라져서는 보이질 않아서 미쳐 버릴 지경인데. 아……!’
형이고 동생이고 어떻게 연우와 엮이기만 하면 이런 꼬락서니가 되고 마는 건지.
요르문간드는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
요르문간드가 좌절의 늪에 빠진 사이.
헬은 새로운 매니큐어를 바르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바빴다.
* * *
-우리 오라버니는요, 인성이 아주 아름다운 분이에요.
편지는 바로 그런 인사말로 시작되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놈들이 있으면 주저 없이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앞통수를 때리시죠. 그렇게 한결같은 분도 어디 없을 거예요.
에도라는 이것이 과연 연우에 대한 칭찬인지 욕인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말투는 연우를 깍듯하게 생각하는 팬인 게 분명한데.
내용은 또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으니.
'아니. 팬은 맞는 거 같긴 한데.’
연우에 대해 이렇게나 잘 알고 있는 걸 보면 긍정적인 쪽인 것 같기는 했다.
다만, 에도라는 그것이 시샘이 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연우를 이만큼 각별하게 생각해 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그 때문일까?
에도라는 연우를 보지 못해서 잔뜩 심통 났던 마음이 한결 풀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마음 한편에 그런 걱정이 들기는 했다.
옛날에는 아이돌이 연애 소문이 나거나 하면 눈을 판 사진을 보낸다거나, 피로 갈긴 혈서를 투서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저주를 퍼붓기도 했었다던데.
혹시 이것도 그런 종류는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첫 문구만 봐서는 그런 쪽이 아닌 것 같았지만, 그래도 반전(?)이란 건 어디에나 숨어 있기 마련이었으니.
그래서 에도라는 아주 조심히 첫 장을 들췄다.
다행히(?) 그다음 장도 그녀가 걱정하던 부류는 아니었다.
-그런 한결같은 분이 선택하신 분이니, 전 언니도 그처럼 아주 멋진 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아니.
따지자면 오히려 반대였다.
-언제나 외롭게 싸우던 분이셨으니…… 이제 더 이상 그러한 길을 걷지 않길 바라요. 언니가 ### 님의 곁에 항상 함께 있어 주시길 간절히 바란답니다.
모두 하나같이 연우와 에도라의 앞길을 축복해 주는 내용들이었다.
다행이라고, 더 이상 연우가 외롭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안심하며,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동안 웃고 있었으리라.
어쩐지 에도라는 이 편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글쓴이가 어떤 모습을 했었을지가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전 그동안 꿋꿋이 자신의 길만 걸으시던 그분의 모습에서 많은 위안을 받을 수 있었어요. 그분을 향한 응원을 통해 그동안 제가 스스로에게 씌워 뒀던 굴레에서 마침내 벗어날 수 있기도 했고…….
그 뒤에는 자신이 어째서 연우에게 푹 빠졌는지, 왜 그를 응원하게 되었는지 계기를 서술하고 있었다.
같이 웃고, 울고, 떠들고…….
아무래도 헬은 연우의 여정에 자신의 상황을 빗대면서 대리만족을 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니 부디 행복하시길 바라요.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에, 저어어어엉마아아알로 마아아아안야아아악에에에에 우리 오빠가 언니의 눈에 눈물 한 방울이라도 흘리게 만든다면 당장 니플헤임으로 찾아와요! 제가 두 팔 걷어붙이고 언니 편이 되어서 같이 싸워 줄 테니까!
피식.
에도라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는 것을 느꼈다.
비록 얼굴 한 번 본 적 없지만, 어째 아군이 하나 더 생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잠깐만. 그런데 왜 내가 언니라고 불리는 거지?’
저쪽은 최소 수천 년은 산 악마가 아니었나?
에도라는 불현듯 든 위화감에 허리를 쭈뼛 세웠고.
-ps. 사소한 문제는 깊게 생각지 말자구요. 오호호호!
"……."
서신에는 그런 에도라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그럴싸한 추신이 남아 있었다.
피식.
입술 사이로 실웃음이 절로 삐져나왔다.
에도라는 편지를 고이 접어 다시 봉투 안에다 넣었다.
아무래도 이 편지는 평생 쉽게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보물처럼 두고두고 간직해야지.
에도라는 따스해진 마음을 꼭 끌어안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 문득 이런 의문도 들었다.
헬은 분명히 스스로를 인성교단의 3대 교주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1대와 2대는…… 누구지?’
* * *
-마지막으로, 친영(親迎).
드디어 혼례의 모든 과정 중 마지막 과정이 거행될 날이 찾아왔으니.
이날에 신랑은 신부집에 직접 가서 신부를 맞이하고, 혼례를 거행하게 된다.
즉.
오늘이 바로 혼인날이란 뜻이었다.
웅성웅성-
북적북적!
바깥이 너무 소란스럽기만 하다.
마을에서 머물던 하객들뿐만 아니라, 혼인식만이라도 구경하려던 사람들까지 모두 별궁 앞으로 몰린 것이다.
하나같이 신부를 데리러 가는 연우를 구경하기 위한 인파들이 만들어 내는 소음이었지만.
정작 연우에게 그러한 소음들은 전혀 들리질 않았다.
아침부터 혼복을 맞춘다, 머리를 을린다, 얼굴에 살짝 화장을 한다, 눈썹을 빚는다, 정신이 없었던 상황이라 그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 판국이니 원.
“후우……!”
그렇게 바쁘게 시간을 보내다 출발하기 직전이 되니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쿵쾅쿵쾅.
이러다 정말 심장이 탈출이라도 하는 건 아니지?
어젯밤 이미 우황청심환과 수면제까지 먹었음에도, 잠 한숨 자지 못한 상태.
이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바짝 긴장하고 있는지를 쉽게 알 수 있었다.
“많이 긴장되니?”
그러던 그때, 레아가 조심히 다가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어…… 머니.”
연우가 삐거덕대면서 고개를 그쪽으로 돌렸다.
그는 뭐라고 대답하기 위해 입술을 벙긋거렸지만, 선뜻 목소리를 내지는 못했다.
“너무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단다. 다들 한 번쯤은 겪는 상황이니까.”
“하지만……."
“오호호. 너는 그래도 괜찮은 거야. 네 아빠는 말이지, 결혼식 날 아침에……!”
“스토오오읍! 임자!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크로노스가 도중에 뛰어들며 레아의 말허리를 허겁지겁 끊었다.
아쉽네. 다음 기회에 말해 줄게.
레아가 던진 말에 크로노스는 크게 손사래를 쳤다.
“아무 일도 없었다니까 그러네!”
“그 흑역사는 나중에 직접 듣겠습니다.”
“그래. 꼭 그러렴.”
“아아악!”
연우는 관자놀이를 쥐어뜯는 크로노스를 보면서 가볍게 웃고 말았다.
그리고 덕분에 긴장이 많이 가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이렇게 해 주시기 위해 직접 찾아오신 게 아닐까.
두 분께는 항상 감사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후우……!
그렇게 다시 한 차례 숨을 고르고 난 뒤.
연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발하시죠.”
* * *
뿌우우우-
마치 뱃고동을 연상케 하는 뿔피리의 우렁찬 소리와 함께.
덜그럭, 덜그럭-
쿵쿵쿵.
갖가지 음악 소리를 내는 대취타 (大吹打)의 악대를 거느린 채로, 연우가 별궁을 떠나 본궁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구경 나온 하객과 인파들이 그 뒤를 따라붙었다.
“오, 오오오!”
“드디어!”
“신랑이 움직인다!”
그동안 라플라스의 행차만을 구경했었기 때문에 진짜 신랑의 등장은 여러모로 많은 관심과 흥미를 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외뿔부족의 전통의상을 멋들어지게 갖춰 입은 연우의 모습은 경건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으니.
최소한 그의 겉모습만 두고 본다면, 긴장한 사람이라 생각하기 힘들 정도였다.
“크! 인물 하나는 역시 멋지구만.”
“헤븐윙의 인물이야 원래 유명하지 않았었나?”
“하긴 여자 플레이어들 여럿 울렸었지……."
몇몇 플레이어들은 헤븐윙에게 첫사랑을 빼앗겼던(?) 아픈 과거사를 떠올리며 피눈물을 줄줄 흘리기도 했다.
그러다 누군가가 그런 질문을 던졌다.
“어? 그러고 보니까 그동안 헤븐윙 본 사람 있나?”
“그러게? 난 못 본 것 같은데.”
“어? 어어? 나도, 나도! 비숫한 사람도 못 봤어.”
“쌍둥이 형제라며? 부모도 조카도 인척도 다 모였는데, 형 혼인식에 동생이 안 오는 게 말이나 되나?”
“무…… 슨 일이라도 있나?”
“예끼, 이 사람아! 명색이 아르티야의 수장에다가 올림포스의 신들까지 있는데 일은 무슨 일이 있으려고?”
“그, 그렇지? 하하, 하하하!”
알 수 없는 불안감에 가득 찬 대화가 어디선가 흘러나왔지만, 그것은 곧 인파의 함성에 묻혀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말마따나, 형의 혼인식에 참석하지 못한 쌍둥이 동생은 드높은 천상에서 책자를 통해 혼인식을 지켜보고 있었다.
기나긴 침묵이 흐른 뒤.
『……뭐가 좀 이상한데?』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바로 샤논이었다.
『혼인식이라고? 나나 한령은 아무 말도 못 들었는데? 부도 마찬가지 고……!』
샤논이 그동안 아무리 인성, 인성, 노래를 불렀다지만, 연우는 절대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을 버리거나 잊을 사람이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칠흑왕의 주 자아가 될 수도 없었을 테니.
문제는 세샤와 크로노스, 레아 등의 ‘시선’에는 연우의 혼인식이 보이는 반면에.
‘황’인 차정우와 천마의 ‘시선’에는 그것이 보이지 않았었다는 점이다.
어불성설.
그 말이 이만큼 잘 어울릴 수도 없으리라.
결국 샤논 등의 시선이 저절로 차정우와 천마에게로 돌아가고.
"……."
"……."
두 사람은 거짓말처럼 입술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