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859화 (859/862)

59화. 혼인식 (4)

“어떤 빌어먹을 새끼가, 감히!”

무왕은 분노했다.

아가레스와 펜리르가 난장을 부리긴 했어도, 사실 그는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때에 따라서는 부족장의 명령에도 농담 따먹기 하듯이 장난을 심하게 치는 부류가 외뿔부족 아니던가.

그러다 보니 두 사람의 난장은 어 디까지나 ‘있을 수 있는’ 일의 영역에 지나지 않았다.

아니, 축제는 시끌벅적할수록 좋다는 평소의 지론을 가진 만큼 오히려 속으로는 환영하기도 했다-물론,  당사자인 딸은 아주 싫어하는 얼굴이었지만.

하지만.

사회자인 라플라스에게 해를 끼쳤을 때부터.

그의 심사는 틀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선이라는 것이 있다.

이렇게 기쁜 날에 누군가의 비명 소리는.

폭력만큼은.

없어야 하지 않는가 말이다……!

무왕은 팔걸이를 치며 자리에서 벌떡 입어났다.

그리고 소맷자락을 걷어붙이면서 이 일의 원흉이라 할 수 있는 오딘을 향해 몸을 날리려는데.

파아아앗-

별안간 무왕의 사각지대를 교묘하게 노리면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사자자리 레굴루스의 오른팔, 데네볼라였다.

“……감히!”

무왕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면서 손날을 바짝 세워 몸을 그쪽으로 돌렸다.

그는 늘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으로 넘쳐흐른다.

실력만 두고 따져 본다면 올포원도 자신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이렇게 자신을 상대로 암습이나 가하는 치졸한 수를 모욕이라 여겼다.

하물며.

지금은 초월을 이루면서 〈별〉이 되지 않았던가?

저 맞은편에 앉아 있는 크로노스보다도 자신이 더 뛰어날 것이라 생각되는 판국에 이런 작자는 뭘 하는 놈인지는 몰라도 단매에 때려죽여야 했다.

무왕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팔극권 - 비기 단천〉

차아아앙!

그런데 손날과 검이 충돌한 순간, 무왕의 생각은 바뀌고 말았다.

‘버틴다고? 나를 상대로?’

아무리 자신이 자세를 갖출 시간이 부족했다고 해도 이렇게 막힐 공격이 아니었던 것이다.

“과연. 무(武)의 왕(王)이라더니. 오만한 이름을 쓸 자격이 없는 건 아니군.”

데네볼라가 한쪽 입술 끝을 비틀었다.

그 순간, 무왕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인형처럼 아무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얼굴.

언제나 여유 가득한 미소를 짓고 있던 그에게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물론, 그마저도 이제는 내려놔야겠지만.”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데네볼라는 잘도 헛소리를 지껄이면서 검을 잇달아 휘둘렀다.

촤촤촤촤-

순식간에 수십 개의 궤적이 허공에 그려지면서 무왕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그 모습이 마치 유성우가 작렬하는 것처럼 보였으니.

무왕은 앞선 서너 개만 옆으로 치워 버릴 뿐, 나머지는 손도 대지 못하고 있었다.

피식!

그 모습을 보면서 데네볼라는 가볍게 웃고 말았다.

칠혹왕의 스승이며 탑의 세계에서 최고를 논하니 마니 한다기에 그래도 일말의 기대를 하고 있었건만.

고작 이런 공격 앞에서 저렇게 굳어 버리는 꼬락서니를 보고 있으려니, ‘그럼 그렇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이게 당연한 거긴 했다.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지녔다고 해도, 결국 이 #0이라는 하나의 세계선에서나 먹히는 실력.

사자자리를 따라 수많은 세계선을 넘나들면서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문명을 먹어 치워 온 데네볼라에 비할 바는 아니었던 것이다.

우물 안의 개구리라고 해야 할까?

그래도 죽기 전에 우물 밖에 하늘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줬으니, 눈을 감고 나서도 나에게 감사할……!

‘무슨……?’

하지만 데네볼라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유성우와 같은 공격 앞에서 어쩔 줄 몰라 방황해야 할 무왕이 도리어 그쪽으로 몸을 날렸기 때문이었다.

너무 두려운 나머지 자살이라도 하려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리고 잠시 후, 데네볼라는 자기도 모르게 두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무왕이…… 공격을 ‘통과’하고 있었다.

마치 유령이라도 되는 것처럼.

정확하게는 궤적 하나하나가 무왕에 닿기도 진에 각도가 조금씩 꺾여 다른 곳으로 튕겨 나거나, 그냥 지나치고 있는 거였다.

마치 세계의 모든 법칙이 그를 중심으로 뒤틀리기라도 하듯.

‘말도 안 돼!’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현상에 데네볼라가 본능적으로 몸을 물리려 했지만.

“내려놔야 할 건.”

이미 무왕은 그보다 빠르게 앞에 다다르고 있었다.

“네놈의 대갈통이겠지.”

데네볼라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이미 무왕이 우악스러운 손으로 그의 얼굴을 잡아 바닥에다 내리꽂고 있었으니까.

콰아아아앙!

데네볼라의 머리통이 반쯤 박살 나 피가 허공으로 튀었다.

저항?

반격?

그런 건 시도할 겨를조차 없었다.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 그딴 건 무쓸모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물론, 그런 일이 숨을 쉬듯 아주 당연한 무왕에게는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쿵!

무왕은 아직 숨이 붙어 있는 데네볼라에게는 더 이상 신경 쓰지도 않고 하객석으로 뛰어들었다.

더 이상 자신과는 손을 나눌 자격 따윈 없다는 듯.

그리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오딘과 마주할 수 있었다.

“이제야 오는군.”

오딘의 음산한 웃음과 학께.

끼아아아!

끔찍한 귀곡성이 무궐 전체로 퍼져 나갔다.

* * *

한편.

“어디지?”

판트는 무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어느 건물의 용마루에 서서 전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말라흐의 대천사와 르 인페르날의 마왕들이 바쁘게 뛰어다니며 아스가르드의 신들과 격전을 벌이고 있었지만.

정작 판트는 그런 것에는 전혀 눈길을 주지 않고 있었다.

“분명히 원흉이 있을 텐데?”

먼 미래에서 넘어온 판트는 무왕에 이어 외뿔부족의 최대 전성기를 열었다고 평가를 받을 만큼 뛰어난 판단력과 실력을 자랑했다.

단, 이때의 판단력은 지모가 뛰어나다거나, 판세와 사람을 읽는 능력이 특출하다거나 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었다.

감(感).

그는 철저하게 동물과 같이 아주 예리한 자신의 직감에 의존하는 편이었다.

행운에나 위기에나, 쉬지 않고 작동하는 직감은 항상 그에게 옳은 길을 제시해 주었으니.

바로 그러한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오딘 따위가.

아스가르드 정도로는 절대 이번 일을 획책하지 못한다고.

분명히 배후에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그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그걸 찾아 제거해야만 이 혼란 역시 조금이라도 빨리 해결될 텐데…….

판트는 동생의 한 번뿐인 혼인식을 이딴 식으로 엉망으로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무언가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뭐지?’

하객들이 분주하게 도망치거나 싸우기 바쁜 혼란한 연회장 사이로, 누군가가 조용히 걷고 있었다.

저벅.

저벅…….

마치 주변의 혼란과 자신은 전혀 관계없다고 주장하듯, 여유롭기 그지없는 발걸음.

그러면서도 어느 누구 하나 거기에 위화감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

아니,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다는 표현이 옳은 것 같았다.

판트, 그마저도 전체적으로 예의주시하지 않았더라면 절대 찾지 못했을 정도였으니까.

저놈이다.

판트는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그쪽으로 몸을 날렸다.

“으랏차차차차!”

쐐애애액-

우렁찬 기합소리와 함께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자, 그놈도 걸음을 잠깐 멈추고 판트를 올려다봤다.

사자 갈기처럼 긴 머리를 아무렇게나 흩트려 놓은 것이 인상적인 사내, ‘사자자리’ 레굴루스는 의외라는 듯 두 눈을 크게 뜨며 호쾌하게 웃었다.

“파하하핫! 죄다 쓰레기밖에 없나 싶었었는데. 그래도 그럭저럭 쓸 만한 놈이 있긴 있었군?”

판트는 저 시건방지기 짝이 없는 아구통부터 부숴 버려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혈뢰를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쿠르르르릉-

엄청난 천둥소리와 함께 핏빛 뇌기가 터지면서 레굴루스의 머리 위로 작렬하려던 그때.

지이이잉-

판트는 순간적으로 뒷골을 싸늘하게 만드는 오한을 느꼈다.

그가 황급히 몸을 옆으로 돌리는 건 거의 동시였다.

콰아아아앙-!

반의반의 반도 안 되는 호흡 전까지만 해도 그가 있던 공간이 갑자기 폭발했다.

혈뢰마저 말끔히 사라질 정도로 어마어마한 충격파.

컥.

판트는 거칠게 튕겨 나 바닥에 아무렇게나 구르고 말았다.

“오, 그걸 피해? 생긴 건 둔하게 생겨 놓고, 감은 제법 살아 있나 보군?”

판트는 먼지투성이가 된 채 억지로 일어났다.

즐거워하는 레굴루스를 보는 그의 얼굴이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자존심이 상한 것도 상한 것이지만…… 정신적 충격도 큰 상태였다.

‘아버지…… 와 비슷할 정도라고?’

단 한 번의 충돌에 불과했지만.

아니, 그나마 이쪽은 제대로 공격을 먹여 본 것도 아니었지만.

판트는 오랜 전투 경험으로 레굴루스의 ‘수준’을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녀석에게 조금 전의 공격은 아주 간단한 몸풀이에 불과할 뿐.

만약 정면으로 부딪치면 몇 초 버티지 못하고 죽을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별〉이 된 지금의 무왕과 견주어도 절대 부족하지 않을 것 같았다.

더군다나 찌릿, 찌릿, 하게 살갗을 따끔거리게 만드는 녀석의 기백은 아주 살벌했다.

‘어디서 이런 놈이……!’

판트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웃어?”

레굴루스는 뜻밖의 반응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태껏 그와 마주한 이들의 반응은 둘 중 하나였다.

공포에 질려 굳어 버리거나, 고개를 숙이고 복종을 맹세하거나.

백수의 왕, 사자 앞에서 응당 보여야 할 당연한 자세였기에 레굴루스는 여태 거기에 의구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단연코 저렇게 즐거워 죽겠다는 듯 히죽 웃는 놈은 처음 보는 거였다.

“파하하하하! 이제 정말 맞부딪쳐 볼 만한 놈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걸 걱정할 필요가 없겠어!”

파지지지직!

콰르르릉-

판트를 둘러싼 혈뢰가 다른 어느 때보다 아주 크게 충전되었다.

강적을 만났다는 기쁨이 더해진 결과였다.

〈혈뢰 - 비기 만뢰(萬雷)〉

세계를 오로지 핏빛 뇌기로 가득 채워서 태워 버린다는 비기가 개방되면서 판트는 어느새 뇌정구(雷庭球)에 둘러싸여 형태도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콰콰콰쾅!

발을 내디딜 때마다.

몸을 내달릴 때마다.

옷자락이 펄럭일 때마다.

뇌정구가 대기와 마찰열을 일으킬 때마다 일어나는 천둥소리는 귀가 떨어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주 요란했다.

그러면서도 일렁이는 대기와 엄청난 고열은 웬만한 초월자들조차 단숨에 찢어발길 것처럼 위협적이었다.

“미친놈이군. 네가 상대하고 와라, 알기에바.”

레굴루스는 직접 상대해서는 귀찮아지기만 할 게 분명하다는 생각에 자신의 왼팔을 불렀다.

파아아앗-

그러자 레굴루스의 옆쪽 공간이 뒤틀린다 싶더니 다른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문사 차림에 눈을 두건으로 가리고 있어 포악한 레굴루스와는 전혀 상반된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 사내였다.

끼이이익!

알기에바의 소맷자락이 혼들리면서 튀어나온 좁은 형태의 검신이 마치 손톱으로 유리를 긁는 듯한 끔찍한 소리를 내면서 만뢰와 충돌했다.

쿠쿠쿠쿠…….

데네볼라와 오딘은 무왕과.

알기에바는 판트와 결전을 벌이는 사이.

레굴루스는 이제 원 상태로 되돌릴 길이 요원해 보이는 연회장을 쓱 훑어보다가 정중앙을 바라봤다.

거기엔 연우가 착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어여쁜 새신부는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어 사라진 뒤였다.

에도라에게 딱히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에, 레굴루스는 차라리 잘되었다며 씩 웃었다.

방해꾼은 없는 것이 편했으니까.

“칠흑왕. 아둔한 어둠. 태초 이전의 혼돈…… 오리지널에서는 차연우. 맞지?”

“그렇다면?”

“파하하! 다행이군. 그거 아나? 내가 널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그동안 다들 피해라, 피해라, 걱정만 많아서 오히려 꼭 내 눈으로 한 번 확인해 보고 싶더라고. 그래서 이렇게 직접 찾아왔지.”

레굴루스의 입꼬리가 크게 말려 올라갔다.

“기뻐해도 좋다고? 내가 워낙 엉덩이가 무거워서 말이야. 웬만해서는 엉덩이를 떼는 법이 없거든. 그만큼 네가 보고 싶었다는 뜻이지.”

“그래. 기쁘군. 기쁘고말고.”

“오! 너도? 너는 또 왜? 이 몸이 그쪽도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했나? 음? 그래도 나름 이름을 잘 숨기고 살았다고 생각하는데.”

“네깟놈 이름 따위 내 알 바는 아니고.”

연우의 미소는 어딘지 모르게 차가워 보였다.

마치 먹이를 눈앞에 둔 맹수처럼.

“난 그저 스승님께 드릴 선물이 넝쿨째 굴러들어와서 기쁠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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