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그리고…… (1)
“그래도 이제 이걸로 그동안 어떻게 됐던 일인지 얼추 짐작이 가긴 하네요.”
차정우의 말에 천마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이런 식으로 덫을 둘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까.”
왜 그동안 연우의 서책이 없었는지도 알 것 같았다.
그 많은 사건들이 모두 ‘가짜’였으니까.
현실로 기록되지 않은 망상(妄想).
사실이 되지 않았던 일들이기 때문에 그동안 창공 도서관에도 기록이 없었던 것이다.
“오리지널과 가짜 ‘꿈’의 연동이라…… 확실히 칠흑왕이 아니면 절대 못 할 짓이긴 하지.”
칠흑왕의 ‘꿈’은 자칫 세계선에 또 다른 분기를 가져다줄 수도 있다.
그만큼 전 우주에 영향을 끼치는 일이었고, 잘못해 ‘기지개’라도 펴게 된다면 종말을 대거 부를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그래서 그동안 연우는 절대 칠흑왕으로서의 능력을 크게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가짜 ‘꿈’을 오리지널과 병행하면서 진실되게 움직이다가, 마지막에 방향을 확 꺾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른 세계선에 미친 영향은 전무했으니.
그만큼 이제 칠흑왕으로서 능력을 다루는 데 익숙해졌다는 뜻일 터였다.
‘확실히 빨라. 내가 천마의 힘을 완전히 터득하는 데 시간이 제법 걸렸던 걸 떠올려 본다면…….'
천마가 자신이 지닌 권능을 모두 이해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된 건 ‘굴레’를 네 번인가 다섯 번쯤 감았을 무렵부터였을 것이다.
칠흑왕과의 계속된 다툼에 짜증도 많이 났었고, 그 때문에 어떻게 하면 녀석을 영영 재워 버릴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이리저리 단련을 거듭하다 보니 모든 잠재력을 끌어올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자신이 강해지는 만큼 칠흑왕도 자극을 받아 일어나는 시간이 그만큼 빨라져 결국 그게 그것이었지만.
어쨌거나 천마로서도 까마득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을, 연우는 훨씬 더 빠르게 터득하고 있었다.
‘그만큼 초월도 마쳐 간다는 뜻이겠지?’
천마는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면서 자신이 서책을 읽는 시간대에 연우가 이뤘던 칠혹의 변이율을 검색했다.
[칠흑 변이을: 61%]
‘역시. 속도가 다시 급속도로 빨라지기 시작했던 거였어.’
초반에만 잠깐 빠를 뿐, 뒤로 갈수록 굼벵이처럼 느려지기만 하던 칠흑의 변이율이 다시 가팔라지기 시작했다.
이건 절대 쉽게 여길 사안이 아니었다.
‘칠흑왕의 초월이 끝나면…… 그때는 정말 어떻게 되려나?’
천마와 칠흑왕의 오랜 다툼이 끝나고, 이제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그리고 그런 지금, 칠흑왕은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설사 시간대를 모두 초월했다는 천마, 그 자신이라 하여도.
‘거기서 저 별들이 제물이 될 건 불에 보듯 뻔하군.’
다만,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제 장수는? 몇 장 남았지?”
“마지막 장입니다.”
차정우의 말에 천마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열어 보라는 듯.
차정우는 마른침을 삼키면서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 * *
연우는 여전히 죽일 듯이 자신을 노려보는 레굴루스를 보면서 허공에다 가볍게 손을 흔들있다.
좌르르륵-
순간, 레굴루스를 강하게 붙들어 놓고 있던 구속구가 더욱 팽팽해졌다.
“칠흑, 왕……!, ’
촤아아악!
“이 수모는, 내가 어떻, 게든 갚을……!”
녀석의 헛소리 따윈 그냥 무시하며 그대로 영체를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비명 따윈 없었다.
별들의 우두머리라고 불리는 사자자리의 최후치고는 너무나 허망한 결과였다.
파아아아…….
[사자자리가 사망했습니다!]
[별의 조각을 획득했습니다.]
레굴루스가 찢긴 자리.
희뿌연 서광을 내뿜는 조각이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무왕에게도 준 바가 있었던 별의 조각이었다.
연우가 그쪽으로 손을 활짝 펼치자, 별의 조각이 저절로 손아귀로 달려 들어왔다.
그리고.
[꿈의 세계가 허물어집니다!]
쿠르르……!
연우를 둘러싼 세계가 아래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 쓰임새가 다했으니, 꿈꾸기를 멈춘 것이다.
무너져 버린 꿈 대신에 그 자리에 나타난 것은 모든 시간이 정지된 세계, 오리지널이었다.
세계는 혼인식의 하이라이트, 신랑 신부 맞절의 타이밍에 멈춰져 있었다.
레굴루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던 바로 그 시각에 세계가 분리되었던 것이다.
연우는 볼에 연지곤지를 찍은 채로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에도라를 애틋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면서 몸을 반대로 돌리려 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날에 한숨은 왜 쉬는 거냐? 아직도 기분이 덜 풀렸어?”
연우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무왕이 약지로 귓구멍을 후벼 파면서 혀를 쯧쯧 차고 있었으니까.
“뭘 그렇게 놀라? 왜? 이 위대하신 스승님이 움직이는 게 그렇게 신기하더냐?”
연우는 그렇노라고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인위적으로 모든 걸 정지시킨 세계가 아니던가.
우주의 확장도 멈춰버린 만큼, 제아무리 뛰어난 격을 지닌 신격이라 해도 ‘황’이 아니고서야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무왕은 잘도 움직이는 것이 불편함은 느끼고 있을지언정, 딱히 큰 부담을 느끼지는 않는 것 같았다.
‘아직 격도 완전하지 않으실 텐데……!’
현재 무왕의 상태가 영혼이 거의 없는 사념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정말이지 대단한 의지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연우의 놀라움을 느꼈던지, 무왕이 피식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 스승님이 대단했던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뭘 새삼스럽게. 푸하하핫!”
무왕은 한참 동안 웃음을 터뜨리다가 갑자기 뚝 그치면서 연우를 바라봤다.
착 가라앉은 시선에는 씁쓸함이 잔 뜩 배어났다.
“손에 쥐고 있는 거. 내게 주고 바로 떠나려 했던 거지?”
“……역시 귀신이십니다.”
연우의 입가에 씁쓸함이 걸렸다.
“지금 상태가 귀신인 건 맞지 않나?”
“계속 그 상태로 계시지 않게 하려고 가려는 겁니다.”
연우는 레굴루스의 별 조각을 얻으면서 이미 그 안에 담겨 있던 모든 사념을 읽어 들인 상태였다.
그 덕분에 그는 별들이 머무는 터전, 허수세계(虛數世界)로 넘어가는 방법을 알 수 있었다.
‘문’을 열 수 있게 된 것이다.
다만, 이는 상당한 제약이 있는 만반의 준비를 필요로 했다.
허수세계는 천마와 칠흑왕으로 대표되는 법칙이 통용되지 않는 전혀 다른 이세계(異世界).
당연히 그곳으로 넘어가려면 칠흑왕으로서의 힘이 대부분 봉인될 수밖에 없었다.
그냥 차연우라는 의념만을 밀어 넣는 것이다.
어쩌면 아무것도 없는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거기서 죽는다면?
칠혹왕의 육체는 그대로 남아 있을지언정, 차연우라는 자아는 삭제되고 말겠지.
그래서야 ‘굴레’를 수도 없이 굴려 대던 옛날로의 회귀일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호시탐탐 연우를 노리려 들 게 분명한 별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세계에서 전쟁을 치르려는 것이니……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연우는 허수세계로 넘어갈 예정이었다.
이미 앞서서 무왕에게 말했던 대로, 그래야 별의 조각을 모두 끌어모아 부활을 완성할 수 있을 테니까.
다만, 그 위험도를 최대한 숨기고, 무왕과 에도라 등이 '눈치’를 채기 전에 다녀올 생각이었다.
이렇게 강제로 시간대를 정지시켜 놓은 상태로 허수세계를 다녀온다면.
이들에게는 아주 짧은 찰나에 불과할 테니까.
걱정을 살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최대한 조용히 다녀오려던 계획이 초장부터 엎어지고 말았다.
역시 스승님이시라고 해야 할까?
정말이지 상식선에서 생각을 하면 안 될 것 같은 분이셨다.
“굳이 간다는 거, 말리지는 않으마. 네게도 생각이 다 있을 테니까.”
무왕은 굳이 연우를 말리지 않았다.
아니, 애당초 막을 생각이 없었다.
부활하고 싶다는 개인적인 욕심 때문이 아니라, 그만큼 제자인 연우를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치지 않고 무사히 돌아을 것이라는 절대적인 믿음.
그것이 너무나 강렬하게 느껴졌기에 연우는 무겁게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러고는 손에 쥐고 있던 별의 조각을 무왕에게 건네주었다.
레굴루스를 포함해서 그가 데려왔던 데네볼라와 알기에바까지, 총 세 개의 조각이 빛줄기가 되어 무왕에게로 고스란히 흡수되었다.
츠팟!
무왕이 빛무리에 잠기며 기운을 갈무리하기 위해 두 눈을 감는 동안.
연우는 조금 전부터 이쪽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크로노스에게도 고개를 숙였다.
무왕보다 늦긴 했어도, 아버지도 시간의 제약에서 깨어 있던 것이다.
“다녀올게요, 아버지.”
“……내가 같이 갈 필요는 없겠느냐?”
“저도 충분히 잘합니다.”
“그래. 알았다. 몸조심하고. 며늘아기는 사돈댁과 함께 내가 잘 살피고 있으마.”
크로노스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서 붉어지는 눈시울을 슬쩍 홈쳤다.
최대한 의젓한 척 굴려고 해도 감정을 다스리는 게 쉽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연우는 스승과 아버지에게 작별 인사를 끝내고 잠시간 눈을 감았다.
허수세계로 입장하고 나면, 메타트론과 바알에게 주어진 시간 제약도 같이 풀릴 것이다.
그런다면 그들 두 사람은 약속대로 혼세팔신과 함께 탑의 세계로 돌아가겠지.
거기서 덫을 마련해 두고, 르’뤼에를 노리고 찾아오는 별들을 모조리 잡아 둘 것이다.
설사 그게 아니더라도 이쪽 세계에 대한 걱정은 크게 없었다.
또 다른 자신이.
분신과 같은 혈육이 여기 있을 테니까.
“정우, 이거 보고 있지?”
연우는 창공 도서관에서 자신을 관찰하고 있을, 혹은 있‘었’을 동생의 얼굴을 떠올렸다.
“형 올 때까지 잘 지키고 있어라. 네 형수한테 찝쩍대는 놈 없게 주변 감시도 잘하고.”
입가에 살짝 장난기 섞인 미소가 어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파아아앗!
연우의 몸이 빛무리에 잠겼다가 사라졌다.
마치 이 세상에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 * *
“……아주 마지막까지 자기 멋대로예요. 하여간.”
탁!
차정우는 보고 있던 책자를 덮으면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연우의 행방을 알 수 없었을 때부터.
자신만 쏙 빼놓고 혼인식을 시작했을 때부터 설마설마했건만.
결국 그 설마가 제대로 사람을 잡은 셈이었다.
자리를 비운 동안 뒷수습은 자신더러 알아서 하라는 꼴이 아닌가.
자신을 혼인식으로 부르지 않았던 것도, 허수세계로 가겠다고 말하면 붙잡힐 게 뻔하니 먼저 줄행랑을 치기 위함이었다.
하여간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한결같은 건지.
차정우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검지로 꾹꾹 누르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이미 물은 엎질러졌으니…… 형을 강제로 끄집어낼 수도 없으니까 우선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떠올려 보자.’
차정우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형이 이번 일로 노리는 건 총 두 가지야.’
머리가 팽팽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첫째는 별의 조각을 모으는 것.
둘째는…… 차정우의 두 눈이 차갑게 빛났다.
‘초월을 완성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