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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4화 (4/232)

4.

늦은 밤, 앨리스는 한스를 데리고 주방으로 사라졌다.

레베카는 앨리스의 손짓을 보고 얼른 삼층으로 올라갔다.

끼익-

문 여는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레베카는 숨을 죽이고 서재 안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하아…….”

이전 생에서도 들어온 적이 없던 서재였다.

레베카는 문 앞에서 잠시 서재를 쭉 둘러봤다.

서재는 완벽한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었다.

양쪽으로 빼곡히 들어찬 책들은 세어 보지 않아도 개수가 정확히 똑같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강박적인 성격의 제플린다운 서재였다.

레베카는 까치발을 들고서 조심스럽게 책상으로 다가갔다.

카펫의 각도가 미세하게 틀어지기만 해도 제플린은 단번에 알아차릴 게 뻔했다.

잠겨 있을 줄 알았던 책상 서랍이 손쉽게 열렸다.

마치 누가 읽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서랍 안에 들어 있는 서류들은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레베카는 서류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서류를 꺼내 보았다.

철자 순으로 정리된 서류의 이름을 훑던 레베카는 그 자리에서 굳었다.

낯익은 이름들이 어지럽게 머릿속에 들어왔다.

레베카는 떨리는 손으로 그중 하나를 꺼내 들었다.

<오벨리아>

레베카 오벨리아.

레베카 데본셔가 되기 전 그녀의 이름이었다.

친정과 관련된 서류를 넘기던 레베카는 소스라치게 놀라 후들거리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녀의 숨이 점점 거칠어졌다.

“맙소사…….”

서류에는 제플린이 오벨리아가를 금전적으로 어떻게 고립시켰는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날짜를 보니 그가 레베카에게 청혼하기 몇 년 전부터 시작된 계획이었다.

이제야 오래된 의혹이 풀렸다.

오벨리아가는 역사가 깊기는 해도 그리 유명한 가문은 아니었다.

그래도 비옥한 영지와 다달이 들어오는 수입이 있어 전대를 통틀어 재정에 허덕인 적이 없던 가문이었다.

그런 오벨리아가가 한순간에 폭삭 망해버렸다. 인위적인 개입이 있지 않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레베카는 서류를 찢어질 듯 세게 그러쥐었다.

서류에는 제플린이 부유했던 친정을 단 몇 년 사이에 파산하게 만든 방법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이 개자식이…….”

제플린은 레베카를 새장 속에 완벽히 가두기 위해 그녀의 주변부터 정리하고 있었다.

레베카는 익숙한 이름이 적힌 다른 서류들도 다급하게 집어 들었다.

어릴 적부터 친했던 친구들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내용을 읽은 레베카는 다시 한번 입을 틀어막았다.

<나, 다이아나 주드리앙은 사는 동안 레베카 데본셔를 만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제플린은 친구들의 약점을 잡고 레베카로부터 멀어진다는 서약을 받았다.

서류를 손에 든 레베카의 손이 벌벌 떨렸다.

떠나는 친구들을 보고 자기혐오에 시달리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친구들이 연락을 받지 않는다고? 거봐. 당신은 가끔 사람을 짜증 나게 하는 구석이 있다고 내가 누누이 말했었지. 인내심이 부족한 친구를 원망해야지 어쩌겠어. 하지만 걱정 마. 당신에겐 내가 있으니까.’

과거 제플린이 쏟아내던 폭언이 귓가를 맴돌았다.

레베카는 휘청거리며 책상 모퉁이를 짚었다.

눈물이 쉴 새 없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가 자신을 옭아매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백작저에서 도망쳤다.

하지만 그 때문에 관계없는 주변 사람들까지 고통을 받았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장인어른 말이야, 또 돈을 달라고 하시더군. 처제의 데뷔탕트가 있다고 말이야. 당신의 집에는 데뷔탕트를 치를 돈도 없어? 언제까지 나에게 의지하시려는지……. 하지만 레베카, 난 다른 남편들과는 달라. 내 부인이 이토록 말을 잘 듣는데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어.’

“아악!”

이제야 보였다. 사위가 두 번째 부인을 들이는 데도 아무 저항도 할 수 없었던 부모님의 찢어지는 마음이.

서류 종이가 이리저리 휘날렸다.

레베카는 종이가 제 발에 밟히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오열했다.

그에 대한 증오가 하늘만큼 불어났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레베카는 눈물범벅인 얼굴을 들었다.

열린 문으로 한 사내가 다급하게 들어왔다. 제플린이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제플린은 마구잡이로 휘날리는 서류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짓이지, 부인?”

* * *

“제플린 데본셔! 대체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야!”

레베카는 제플린의 얼굴에 서류를 집어 던졌다. 제 앞으로 날아오는 종이를 제플린은 슬쩍 피했다.

“위험하잖아. 종이에 내 얼굴이 베이면 어쩔 뻔했어.”

그는 바닥에 떨어진 서류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아아, 이거. 별거 아니야.”

“별거 아니라니? 내 집안을 망가뜨리고 친구들을 협박한 게 별 게 아니야?”

“레베카. 말은 똑바로 해야지. 이건 다 당신을 위한 거야. 애초에 그 친구들은 당신과 어울릴 만한 애들이 아니었어. 그리고 집안을 망가뜨렸다는 건 조금 억울한데?”

“가까이 오지 마!”

레베카의 말에도 제플린은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부들부들 떠는 레베카를 껴안았다.

레베카가 격렬히 저항했지만 그럴수록 그녀를 안은 제플린의 팔이 점점 더 옥죄여왔다.

“내가 가장 아끼는 당신을 그렇게 대할 리가 있겠어? 나는 장인어른을 도와준 거야. 당신이 돈이 돌아가는 이치를 잘 몰라서 그래. 난 장인어른에게 투자할 돈을 빌려드린 것밖에 없다고.”

레베카는 기가 차서 제플린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푸른 눈이 잔인하게 빙글거렸다.

이전 생의, 이맘때쯤의 레베카였다면 그의 말에 쉽게 속아 넘어갔을 테다.

하지만 백작저에서 도망친 뒤로 레베카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뒤였다. 뻔한 사기 수법쯤은 눈치챌 수 있었다.

그는 사기꾼 사업가를 고용해 오벨리아 자작에게 접근시켰다. 그리고 자작은 사기꾼에게 투자하고 큰돈을 잃는다.

그때쯤 제플린이 구세주처럼 나타나 자작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돈을 빌려준다.

자작은 돈을 되찾기 위해 또다시 제플린이 짜놓은 가짜 사업에 투자한다.

그렇게 해서 빚은 점점 늘어났다.

웬만한 가문은 감당할 수 없을 액수의 빚이었다.

레베카는 꽉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버지의 잘못이 하나도 없다고 할 순 없었다.

하지만 궁극적인 원인은 제플린에게 있었다.

그가 작정하고 속이려 들었으니 사람을 쉽게 믿는 아버지가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던 게 당연했다.

모든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레베카는 제플린의 뺨을 후려갈길 기세로 눈을 쳐들었다.

그녀의 이성은 이미 절절 끓어오르는 분노 속에 파묻혔다.

레베카는 온갖 저주의 말을 퍼부으려고 입을 뗐다.

하지만 이어지는 제플린의 말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둘째 부인을 들인 것 때문에 이런 식으로 반항하는 건 알겠는데 얌전하게 구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러면 앨리스, 죽여버린다?”

제플린은 잘 벼려진 칼보다 날카로운 세 치 혀를 잔인하게 놀렸다.

앨리스가 위험할 거란 말에 레베카의 어깨가 힘없이 떨궈졌다.

앨리스는 하나밖에 없는 그녀의 편이었다. 또다시 자신 때문에 그녀가 죽는 일을 번복할 순 없었다.

“자, 대답해야지. 내 사랑스러운 부인.”

“알겠어…….”

“좋아. 오늘 일은 넓은 아량으로 한 번만 눈감아주지.”

제플린은 레베카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백작님, 알리시아 마님이 도착하셨습니다.”

문밖에서 하인이 소리쳤다.

제플린은 레베카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레베카는 비척거리며 그를 따라갔다.

“백작님, 왜 그렇게 다급하게 뛰어가신 거죠? 어라, 레베카 님?”

이제 막 저택 안으로 들어온 알리시아가 삼층 난간에 제플린과 함께 서 있는 레베카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짐을 실은 마차가 이제 막 저택 앞에 도착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레베카는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왜 돌아온 거지?’

분명 기억상으로 제플린과 알리시아는 일주일간 신혼여행을 갔다.

이전 생에서 알리시아가 일곱 개의 선물을 가져와 속을 긁었기에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미래가 바뀌었다.

‘왜지? 내가 결혼식에서 일찍 돌아온 것 때문에?’

로비를 훑던 레베카의 눈길이 하인에게 붙들린 앨리스에게 맞닿았다.

앨리스는 레베카를 안심시키려는지 활짝 웃어 보였다.

그 미소에 레베카는 힘없이 휘청이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앨리스를 지켜야 했다. 저 다정한 미소를 또다시 잃을 수는 없었다.

레베카는 제플린의 어깨에 손을 올리곤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렸다.

“소란을 피워서 죄송해요. 제가 어리석었네요. 당신의 깊은 마음도 모르고.”

“사람이니까 실수를 할 수도 있지. 아아, 앨리스는 걱정 마. 가볍게 훈육만 하고 돌려보내 줄 테니. 그래도 주인을 잘못 모신 벌은 받아야 하잖아?”

제플린이 비죽 웃었다. 그리고 하인들을 향해 손짓했다.

앨리스는 반항도 하지 않고 하인을 순순히 따라갔다.

그녀의 뒷모습에 레베카는 견딜 수 없게 슬퍼졌다.

* * *

다음 날부터 며칠 동안 레베카는 크게 앓았다.

열이 펄펄 올랐지만 아무도 이유를 알아내지 못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 처음 본 건 그녀를 간호하고 있던 알리시아였다.

“깨어나셨군요!”

알리시아가 서둘러 의사를 불렀다.

의사가 이제 괜찮다고 말하자 알리시아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에요! 레베카 님이 잘못되시는 줄 알고 어찌나 마음을 졸였던지.”

한창때의 알리시아는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레베카는 그런 알리시아를 잠시 감탄 어린 눈으로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알리시아는 언제나 저런 식이었다.

속에서 일렁이는 욕망을 상냥한 웃음 뒤에 숨기고 있었다.

알리시아는 철저히 자신의 이득에 따라 움직였다.

이전 생에서 알리시아가 자신의 도망을 도왔던 이유도 첫째 부인의 자리를 탐내서였다.

그런 알리시아의 이기적인 면모를 레베카는 과거에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차마 알리시아를 미워할 수 없었다.

알리시아가 친근하게 굴어올 때면 무장해제 된 듯 레베카는 마음을 열어버렸다.

레베카는 알리시아가 가시로 만든 인형인 줄 알면서도 기꺼이 끌어안았다.

쓰리고 아플지언정 외롭지는 않았으니까.

그렇게 레베카는 몇 번이나 알리시아의 계략에 넘어갔다. 그때는 그게 계략이란 것도 몰랐다.

아까운 하녀들의 목숨을 여러 번 잃었다. 남편과 방을 빼앗겼다. 보석과 드레스들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자책했다.

제플린은 그렇게 약해진 레베카를 제멋대로 휘둘렀다.

이렇게 따지고 보니 알리시아와 제플린은 자신을 괴롭히기 위한 모든 조건을 갖춘 환상의 파트너였다.

대체 이전 생의 자신은 뭘 믿고 알리시아에게 거처를 알려주었을까.

후회가 스멀스멀 레베카를 덮쳐왔다.

예전의 나쁜 버릇이 다시 반복되려고 하자 레베카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아니야. 자책하지 말자.’

레베카는 마음을 다시 바로잡았다.

돌아와서 가장 먼저 한 다짐은 자책하지 않는 것이었다.

나쁜 건 모두 제플린이었다. 레베카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알리시아는 대답 없는 레베카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곤 떨리는 목소리로 고개를 푹 숙였다.

“레베카 님은 제가 미우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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