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5화 (5/232)

5.

그럼 그녀가 사랑스러울까.

증오스러웠다. 당장이라도 목을 분질러 놓고 싶을 만큼 화가 났다.

하지만 레베카는 속내를 감추고 몸을 일으켰다.

“그럴 리가요. 내가 왜 알리시아를 미워하겠어요?”

“이것 보세요. 또 존대를 하시잖아요! 제가 백작님을 빼앗아서 미우신 거죠?”

“빼앗다니. 전 애초에 알리시아에게 아무것도 준 적이 없는 걸요. 하지만 이렇게 제게 사과하러 오는 걸 보니 본인의 행동이 부끄러운 건 줄은 아나 보네요.”

레베카가 싸늘하게 말했다.

알리시아는 잠시 주춤했지만, 곧 기다렸다는 듯이 속사포로 말을 이었다.

“레베카 님, 하늘에 맹세코 정말 어쩔 수 없었어요! 힘없는 하녀가 백작님을 거부할 수 없는 일이잖아요.”

알리시아는 레베카가 쓰러져 있는 동안 연습했던 수많은 변명을 떠올렸다.

마음 약한 레베카가 그녀를 용서할 수밖에 없는 사연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레베카 님! 저도 어쩔 수가 없었어요.’

문득 이전 생에서 자신을 배신한 알리시아가 했던 말이 레베카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레베카는 주먹을 꾹 쥐었다.

“그만.”

“레베카 님!”

“그래서 너에게 다른 선택지를 줬었지. 하지만 이걸 선택한 건 너야. 네가 했던 말대로 넌 어른이니까 네 선택에 책임을 져.”

알리시아가 임신한 걸 안 날 레베카는 알리시아에게 도망가는 걸 권했다.

아담한 집을 구해주고 평생 먹고살 만한 돈을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알리시아는 거절했다. 알리시아가 원하는 건 그런 평범한 삶이 아니었다.

‘죄송하지만 저도 어른이에요. 더 이상 애 취급하지 마세요. 제 아이와 제 인생에 관한 결정은 제가 하겠습니다.’

알리시아는 자신이 한 말을 떠올리곤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당혹스러운 눈길로 레베카를 살폈다.

자신이 평소에 알던 레베카가 아니었다.

레베카는 속눈썹을 파르르 떨기만 해도 제플린보다 더 손쉽게 자신의 부탁을 들어줬다.

‘뭔가 이상해.’

알리시아의 의심스러운 눈빛이 레베카를 훑었다.

그녀의 의중을 알아챈 레베카는 재빨리 낯빛을 바꾸었다.

“이 이야기는 이쯤 해두죠.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서로 적대적으로 지내서 좋을 건 없잖아요. 우리의 남편이 좋아하지 않을 테니까요. 예전처럼은 못 지내겠지만 전 당신과 싸울 생각은 없어요.”

제플린 이야기까지 나오자 알리시아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인정하긴 싫지만 제플린은 레베카를 아꼈다. 레베카를 헐뜯는 말을 할 때마다 되레 혼이 나는 건 알리시아였다.

하지만 시간은 흐른다.

레베카가 늙게 되면 제플린은 그녀에게 흥미를 잃을 것이다.

알리시아는 일단 몸을 사리기로 했다.

레베카는 금방 꼬리를 내리고 제 눈치를 살피는 알리시아를 보고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이렇게 보니 그녀는 조금 영악한 어린애일 뿐이었다. 그런 아이에게 여태껏 놀아났다니.

레베카는 얼굴에 인자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나저나, 지금까지 알리시아가 절 간호한 건가요?”

“네? 아, 그게…….”

“고마워요. 덕분에 이렇게 일어날 수 있었어요. 감사의 의미로 선물을 하나 하고 싶은데. 앨리스, 내 보석함을 가져오겠니?”

레베카의 말에 앨리스가 오른쪽 다리를 절뚝이며 벽장문을 열었다.

그러곤 월계수 잎이 그려진 고풍스러운 보석함 여러 개를 꺼내왔다.

보석함이라는 말에 알리시아의 눈이 반짝였다.

“여기서 하나 골라 봐요.”

레베카는 천천히 보석함을 열었다.

제플린은 레베카의 몸을 치장하는 물건에는 아낌없이 지원했다.

때문에 레베카에게는 당장 쓸 수 있는 현금은 없었지만 값비싼 장신구들과 드레스는 잔뜩 있었다.

이제 막 결혼한 알리시아에겐 없는 물건들이었다.

알리시아는 똑똑한 편이었지만 탐욕 앞에선 가끔 이성을 잃고는 했다.

레베카는 그 점을 기억하곤 반짝거리는 고가의 장신구를 알리시아의 눈앞에 흔들었다.

멍하니 레베카의 손길을 따라 보석함을 훑던 알리시아의 눈길이 어떤 목걸이 앞에서 멈추었다.

“세상에나, 너무 예뻐요!”

다이아몬드가 촘촘하게 장식된 호화로운 목걸이 끝에는 커다란 블루다이아몬드가 달려 있었다.

영롱한 푸른빛을 감상하던 알리시아는 홀린 듯 목걸이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가락 끝이 닿기도 전에 레베카는 얼른 보석함을 닫아버렸다.

그리고 퍽 난감하다는 듯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이게 왜 여기 있지. 미안해요. 이건 제플린이 제게 준 가보라서 선물로 줄 수 없어요. 대신 다른 걸 골라 볼래요? 여기 이 귀걸이도 참 예쁘지 않아요?”

“가보라니요?”

“모르셨나요? 데본셔 백작가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훌륭한 보물들이 참 많아요. 백작 부인은 그중 하나를 받을 수 있답니다. 이건 제플린이 제 눈 색을 닮았다며 결혼식 날 제게 선물했었죠.”

“그럼 저도 받을 수 있을까요?”

탐욕으로 번뜩이는 보라색 눈동자를 보니 저도 모르게 조소가 떠올라 레베카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글쎄요. 백작 부인만 가능한 거라……. 두 번째 부인도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레베카의 말에 알리시아가 인상을 와락 구겼다.

자신도 백작 부인이라 주장하려고 했지만 첫째 부인 앞에서 감히 그 말을 올릴 수는 없었다.

“다들 여기 모여 있었나.”

제플린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알리시아가 환히 웃으며 제플린을 맞았다.

그는 알리시아를 본체만체하고 레베카에게 먼저 다가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 나서야 알리시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등에 키스를 했다.

그 차이를 인지한 알리시아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갔다.

* * *

제플린은 손에 면장갑을 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레베카의 얼굴을 쥐고는 이리저리 살폈다.

“열꽃이 올랐다더니 다행히 흉 진 건 없네. 대신 피부가 푸석거리는 게 거슬리는군. 승전 연회에 가려면 당분간 피부 관리에 신경 쓰라고 일러야겠어.”

“승전 연회요?”

레베카가 묻자 제플린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올렸다. 생각만 해도 짜증이 난다는 얼굴이었다.

“요하네스 공작이 승전고를 울리고 돌아온 모양이야. 그냥 전쟁터에서 뒤졌으면 좋았으련만.”

다소 난폭한 언행에 레베카는 제플린을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이전 생에서도 제플린은 요하네스 공작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알리시아가 들떠서 소리를 질렀다.

“연회라면 파티가 열린다는 말이죠? 저 이런 파티는 처음이에요! 그럼 드레스가 필요하겠네요! 어떤 옷이 좋을까요, 백작님?”

제플린은 신이 나서 조잘거리는 알리시아를 빤히 쳐다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무슨 소리야. 알리시아, 너는 연회에 갈 필요 없어.”

“네?”

“황제께서 마련하신 자리야. 네가 갈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평민 출신 주제에.”

알리시아의 얼굴이 빨개졌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눈가가 떨려왔다.

제플린이 그런 알리시아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았다.

“그런 표정 짓지 마. 대신 네가 좋아하는 보석을 선물해 줄게. 그거 가지고 놀면서 얌전히 집에 있어.”

“그럼 저도 가보를 주세요.”

“가보라고?”

제플린은 침대 위에 펼쳐져 있는 보석함을 바라보았다.

레베카가 난감한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아. 알리시아가 간호해준 게 고마워서 하나 골라 보라고 했어요. 그러다가 실수로 가보를 보여주는 바람에…….”

긴 한숨이 이어졌다.

제플린이 이마를 짚었다.

“알리시아. 이건 백작 부인, 그러니까 첫 번째 부인인 레베카만 받을 수 있는 거야.”

“왜요! 저도 백작 부인이에요! 정식으로 결혼식도 올렸잖아요!”

“그건!”

언성을 높이려던 제플린은 레베카를 흘깃 바라봤다. 그러더니 알리시아의 팔을 세게 잡아끌었다.

“연회에 가려면 레베카는 안정을 취해야 해. 일단 밖으로 나가서 이야기하자.”

“아파요! 이거 놔요!”

“잠시만요!”

밖으로 나가려던 두 사람을 레베카가 불러 세웠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신혼여행에서 왜 이렇게 일찍 돌아오신 거죠?”

알리시아가 제플린을 원망스러운 얼굴로 쏘아보며 말했다.

“왜겠어요. 여기 계신 고고한 백작님께서 고작 그림 몇 장에 소중한 추억이 깃든 별장을 공작에게 팔아넘겼기 때문이죠.”

“알리시아! 건방진 그 말투는 대체 뭐야!”

제플린은 알리시아를 질질 끌고 밖으로 나갔다. 닫힌 문 너머로 알리시아의 불만에 가득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편, 레베카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요하네스 공작이라면…….’

* * *

“너무 아름다우세요!”

거울 앞에 선 레베카를 보며 앨리스가 감탄을 내질렀다.

하녀장 그레이스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레베카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제플린은 레베카를 남 앞에 보이기를 좋아했다.

마치 아름다운 작품을 여기저기에 자랑하는 것처럼 레베카를 끼고 다녔다.

다만 그건 제플린과 동행할 때만 가능한 일이었다.

어떤 남자도 그녀에게 다가오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심각한 의처증이란 소리를 들어도 제플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레베카는 제플린의 보물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눈으로만 감상해야 했다.

레베카를 만질 수 있는 건 오직 그, 제플린뿐이었다.

푸른 드레스에 박힌 비즈들이 반짝거렸다.

레베카는 목걸이 끝에 달린 큼지막한 블루다이아몬드를 만지작거렸다.

원래라면 함부로 착용하지 않았던 물건이지만 알리시아를 자극하려 일부러 걸쳤다.

‘나도 꽤 예뻤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불혹을 앞둔 중년의 부인이었다.

백작저를 나온 뒤로 고생을 한 터라 그녀의 얼굴은 많이 망가진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은 자글거리던 주름과 흉터는 온데간데없고 깐 달걀처럼 매끈하고 뽀얀 피부가 거울에 비쳤다.

짙푸른 바다를 빼다 박은 듯한 벽안에는 총기가 돌았고, 항상 엉켜 있던 금발엔 부드러운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이 무렵의 레베카는 알리시아와 자신의 외모를 비교하면서 지독한 자기혐오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알리시아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디 가서 주눅 들지 않을 만큼의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언제나 현재의 자신이 가장 끔찍한 법이라는 건가.’

레베카는 새삼 자신을 타박하며 흘려보낸 세월이 아까워졌다.

그렇게 한참 동안 젊은 날의 자신을 더듬어보던 레베카는 예전의 기억 하나가 떠올라 손을 멈추었다.

그날 밤, 제플린은 거하게 취해 있었다.

원래 잠자리가 정해진 날에는 술을 마시지 않는 그였지만 제플린은 어쩐지 과음을 한 상태였다.

의무적인 정사를 끝내고 레베카를 찬찬히 살펴보던 제플린은 그녀의 눈가에 그어져 있는 주름 하나를 발견했다.

제플린은 주름을 가만히 만지작거리다가 냉소적으로 말했다.

‘흠이 생겼군.’

제플린은 그대로 침대를 빠져나와 잘 자라는 인사도 없이 방문을 쾅 닫고 나갔다.

이후로 그는 의무적으로 관계를 맺어야 하는 날을 제외하곤 절대 그녀를 찾지 않았다.

이 일은 일종의 계시와도 같은 순간이었다.

홀로 있는 밤마다 레베카는 상념에 빠져 지난날을 차근차근 곱씹었다.

그리고 그동안 사랑인 줄 알았던 것이 그저 장식품에 쏟는 애정 그 이상도 이하도 되지 않는단 걸 깨달았다.

그 사실을 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플린이 그토록 원했던 아이를 가지게 된 걸 알게 됐다.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아이의 존재를 들키기 전에 레베카는 감옥 같은 백작저에서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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