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마님, 백작님께서 기다리십니다.”
하녀의 채근하는 목소리에 레베카는 퍼뜩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레베카는 문을 열고 복도를 천천히 걸어갔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드레스 자락이 부딪혀 사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맞은편에서 알리시아의 방문이 빼꼼하게 열렸다.
알리시아는 열린 문틈으로 레베카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하게 훔쳐봤다.
무척이나 탐욕스런 눈빛이었다.
레베카는 알리시아와 눈을 마주치고 슬쩍 웃어 보였다.
의기양양한 레베카의 웃음에 알리시아의 눈에서 분노의 불꽃이 튀었다.
‘그래, 거기서 네 처지를 깨달아. 그리고 가질 수 없는 걸 욕망해.’
언제나 가기 싫은 파티였지만 이번 연회만큼은 기꺼운 마음으로 참석할 수 있었다.
레베카에겐 뚜렷한 목적이 있었다.
복수를 위한 첫 단추를 꿰맬 기회였다.
* * *
“크로아, 좀 더 쓸모 있는 이야기는 없나?”
율리안은 크로아가 수집한 보고서를 자세히 살폈다.
여느 때와 같이 저주와 관련된 쓸 만한 단서는 하나도 없었다.
정보의 질이 점점 낮아지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율리안은 신경질적으로 책상을 쾅 하고 내리쳤다.
그 탓에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와인잔이 엎어졌다.
율리안의 커다란 맨 가슴에 붉은 와인 방울이 튀었다.
“요새 돈 냄새를 맡은 이야기꾼들이 마구잡이로 몰려와서요. 이상한 놈들을 걸러내는 데만 며칠이 걸린다고요. 그나저나 얼른 옷을 갈아입으셔야지요.”
크로아가 안절부절못하며 손수건을 가져와 율리안의 가슴팍을 따라 흘러내리는 와인을 닦았다.
그의 뒤로 하인들이 검은 연미복을 들고 서 있었다.
율리안이 신경질적으로 흑발을 쓸어올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전쟁에 나가지 않는 거였는데.”
“몸이 근질근질하다며 굳이 나가겠다고 하신 게 누구신데요.”
“말만 전쟁이지, 육탄전은 하나도 없었어. 칼을 빼 들자마자 항복하더군. 딱 봐도 황제가 계획한 게 분명해. 처음부터 뭔가 이상했어. 요즘 세상에 반란군이 있을 리가 없지.”
“뭐 어떻습니까. 그간 공작님께 부은 노력이 가상해서라도 한번 참석해주세요. 이렇게 계속 폐하의 인내심을 자극하다가는 큰일 날 수도 있다고요.”
“큰일? 무슨 큰일? 그 망할 여신이 우리 가문 위에 있는 한, 황제도 못 건드려.”
율리안의 눈이 샛노랗게 반짝였다. 그의 발치에 앉은 검은 고양이 세 마리가 일제히 눈을 치켜뜨고 울었다.
섬뜩한 분위기에 하인들이 주춤거렸다.
크로아는 이 상황이 익숙한 듯 하인의 손에서 셔츠를 빼앗아 들고 율리안에게 다가갔다.
“잔말 말고 어서 입으세요!”
“하아. 또 끔찍한 연기를 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군.”
“그러시면 오늘은 그냥 구색만 맞추다가 돌아오세요. 계획대로 공작님이 아주 난잡하고 더러운 취향을 가진 쓰레기라는 소문은 이미 다 퍼졌으니까요. 듣자하니 오늘 연회에는 공작님이 좋아하는 렝거스산 와인을 공수해 왔대요.”
“그거 하난 마음에 드는군.”
시계를 흘깃 본 율리안은 싫은 소리를 내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크로아가 손가락을 두어 번 튕겼다.
그제야 얼어 있던 하인들이 분주하게 율리안을 치장하기 시작했다.
세간에 알려진 요하네스 공작가는 데프리아 여신의 축복을 받은 존귀한 가문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약간 달랐다.
그저 그런 귀족에 불가했던 요하네스 공작가의 선조는 어느 날 행운의 여신 데프리아의 계시를 받았다.
<나와 내 아이들이 가장 존귀한 대접을 받게 한다면 네 가문에 영원한 부귀와 명예를 주겠노라.>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군과 손을 잡은 선조는 행운의 여신 비호 아래 큰 승리를 거두었다.
새롭게 등극한 황제는 일등 공신 요하네스에게 공작의 작위를 내렸다.
그리고 요하네스 공작의 의견을 들어 데프리아교를 국교로 세웠다.
전국에 데프리아 여신을 찬양하는 신전이 세워졌다.
불길한 동물로 여겨졌던 고양이는 데프리아 여신의 상징으로 이제 행운의 동물이 되었다.
그렇게 요하네스가는 여신의 약속대로 고귀한 가문이 되었다. 부와 명예 그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대가 계속될수록 후대들은 여신의 감사함을 잊었다.
그러다 어느 멍청한 후대 하나가 신전에서 애첩과 놀아났다. 분노한 여신은 저주를 내렸다.
<네 자식은 내가 보낸 아이를 섬기고 한 몸같이 여겨야 할 것이다. 헐값으로 누리던 축복의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몇 개월 뒤 애첩은 사내아이를 낳았다. 유일한 후계자였다.
아이는 건강했으나 아이가 태어난 날 어디선가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고양이를 내쫓으려 하자 아이가 자지러지게 울었다. 고양이가 발을 다치자 아이의 발도 다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작가는 저주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들의 후계자는 여신이 보낸 고양이와 영혼이 묶여서 태어났다.
후계자로 지정된 공작가의 아들은 감정에 따라 변하는 금안을 타고났다.
신이 보낸 고양이는 물도 음식도 필요하지 않았다. 오로지 후계자의 타고난 신성력을 먹고 자랐다.
그 탓인지 공작가의 모든 후계자는 일찍 단명했다.
공작가는 어떻게든 후계를 잇기 위해 후계자가 아주 어릴 때부터 조혼을 시켰다.
첫째 부인이 1년이 지나도 후계를 낳지 못하면 또 다른 부인을 들였다. 후계자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이 사실을 아는 건 교황과 요하네스 공작가의 몇 안 되는 사람뿐이었다.
여신이 보낸 고양이를 보호하기 위해 신전은 요하네스 공작을 종마같이 취급했다.
그렇게 요하네스 공작가의 아이들은 저주와 함께 태어났다.
부귀영화는 계속됐으나 저주도 계속되었다.
율리안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율리안은 역대 후계자 중 가장 강력한 신성력을 타고 났다.
교황은 율리안이 다른 요하네스 공작들보다 수명이 길 거라고 예지했다.
덕분에 율리안은 혐오해 마지않는 조혼을 잠시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조금 있으면 스무 살 중반에 접어든다. 가신들과 신전이 압박을 넣기 시작할 것이다.
율리안은 싫었다. 무고한 여자를 가문의 저주에 끌어들이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요하네스 공작가의 부인들은 대대로 끝이 좋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가 어릴 적 화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나머지 세 명의 부인들은 아버지가 죽고 난 뒤 그만 미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율리안은 그 끔찍한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율리안은 눈을 들어 창문을 바라보았다.
창문 너머로 릴리가 있는 동쪽 별채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보였다.
혹여 율리안이 후계를 남기지 않고 죽더라도 릴리가 낳은 사내아이가 저주를 이어받을 것이다.
저 작은 아이에게 그런 끔찍한 운명을 짊어지게 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내 대에서 끝내야 해…….”
율리안은 평생 동안 기적을 바랐다.
그러나 결코 신에게 기도하지 않았다.
* * *
“발밑 조심해. 레베카.”
마차에서 먼저 내린 제플린이 레베카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플린은 레베카의 자태를 잠시 넋 놓고 바라봤다.
제플린이 손수 고른 장식품으로 치장한 그녀는 찬사가 부족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새하얀 연미복을 입은 제플린을 잠시 물끄러미 응시하던 레베카는 순순히 그의 팔에 손을 올렸다.
제플린은 기다란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진 결혼반지를 보고 잠시 추억에 빠졌다.
제플린이 열일곱이 되던 생일날, 데본셔 백작가에는 성대한 파티가 열렸다.
눈이 펄펄 내리던 날이었다.
지루한 파티에 잠시 발코니로 나온 제플린은 그때 처음으로 레베카를 보았다.
열 한 살의 레베카는 뺨이 발갛게 타오를 정도로 눈밭에서 신나게 뒹굴고 있었다.
눈사람을 쌓아 올리던 레베카는 제플린과 눈을 마주치자 환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순간 제플린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과 닮은 레베카의 얼굴에 마음을 빼앗겼다.
‘저 소녀와 결혼하면 얼마나 아름다운 아이가 태어날까.’
아름다움이야말로 삶의 의미라는 교육을 받고 자라온 제플린이었다.
단조롭게 흘러가던 그의 인생에 처음으로 목표란 게 생겼다.
제플린은 그때부터 레베카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갖은 노력 끝에 그는 결국 레베카와 결혼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가 원하는 모습대로 레베카를 만드는 건 만만치 않았다.
레베카는 그의 예상보다 똑똑하고 고집이 셌다.
하지만 그녀 못지않게 제플린은 인내심이 강한 편이었다.
그는 근 십 년을 공들여 그녀를 철저하게 고립시켰다. 그리고 자신에게만 온전히 기대게 만들었다.
알리시아를 데리고 온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였다.
레베카가 젊고 아름다운 알리시아와 비교하며 더더욱 절망에 빠지기를 원했다.
그렇게 자꾸 자신을 의심하고 더더욱 아름다움에 매달렸으면 했다.
‘이제 아이만 낳으면 돼. 나를 닮은 아이를.’
레베카의 얼굴에 홀려 그녀를 흘깃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제플린은 흡족하게 웃으며 화려한 샹들리에가 반짝이는 연회장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는 지금 이 순간 레베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꿈에도 모른 채였다.
* * *
“내 자네의 소문은 익히 들었네, 요하네스 공작.”
자히드라 황제의 옆자리에서 담소를 나누던 율리안은 낭랑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붉은 머리를 틀어 올린 젊은 여인이 그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황제가 반색하며 여인을 그에게 소개했다.
“아, 율리안. 자네는 처음 보겠지. 카트린느 황녀라네.”
황녀라고?
율리안은 얼굴을 붉히는 카트린느를 무심하게 훑었다. 그리고 자히드라를 쳐다봤다.
자히드라는 꽤나 기대에 찬 눈으로 자신과 카트린느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율리안은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하, 영감탱이. 속이 훤히 다 들여다보이는군.’
오랜 세월에 걸쳐 로탄더스 제국의 신권은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해졌다.
고위 귀족 중 대다수가 교황의 사람이었고 민심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국무회의에서 결정된 정책을 추기경이나 교황이 검토하는 게 당연한 관례처럼 자리 잡았을 정도였다.
원래 요하네스 공작가는 신전의 편이었다.
하지만 율리안이 공작이 된 이후로 공작가는 황제와 신전 사이에서 애매한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다.
전대 황제는 속수무책으로 신전의 꼭두각시 노릇을 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자란 자히드라 황제는 어릴 때부터 황권을 강화할 계획을 차근히 세워왔다.
그런 그의 눈에 율리안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처럼 보인 건 당연했다.
신전은 여신의 축복을 직접 받는 요하네스 공작 앞에선 맥을 못 추었다.
때문에 율리안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그는 신전을 견제하는 훌륭한 도구가 될 것이었다.
율리안을 제 편으로 들이는 데에는 정략결혼만큼 좋은 게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