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어리고 예쁜 카트린느 황녀는 주변 여러 나라에서 탐내는 최고의 신붓감이었다.
하지만 율리안은 거만하게 의자에 앉아 노골적으로 카트린느의 인사를 무시했다.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자히드라는 개의치 않았다.
율리안은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다는 교육을 받고 자라왔다.
황제를 제외하곤 명실상부 제국의 최고 권력자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요하네스 공작가는 한때 신전을 등에 업고 황권을 위협했던 적도 있었다.
선대 공작들에 비하면 언행이 다소 거칠기는 했으나 정치적으로 볼 때 율리안은 점잖은 편이었다.
때문에 자히드라는 율리안의 안하무인인 태도를 너그럽게 이해했다.
게다가 자히드라는 체면치레 따위보다는 이익에 좀 더 관심을 두는 인물이었다.
율리안이 가져올 이득을 생각하면 그의 무례 따위는 몇천 번이고 참아 줄 수 있었다.
그가 매음굴을 밥 먹듯이 드나들고 여성 편력이 심하다는 건 소문으로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이따금 그는 귀족 영애를 혐오한다는 말을 거침없이 쏟아내기도 했다.
황녀인 카트린느가 그와 결혼하면 어떤 취급을 받을지 안 봐도 뻔했다.
카트린느에겐 미안한 소리였지만 그래도 그는 포기할 수 없는 카드였다.
율리안은 연회라면 질색하는 사내였기에 자히드라는 그가 연회에 참석할 수밖에 없도록 가짜 반란군까지 만들었다.
카트린느를 자연스럽게 그에게 소개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렇게 일이 수포가 되게 둘 수는 없었다.
자히드라는 음흉하게 웃으며 카트린느의 손을 잡고 율리안에게 건넸다.
“어때, 아름다운 황녀와 첫 번째 춤을 추지 않겠나?”
율리안은 황제가 내민 카트린느의 새하얀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도움을 청하러 주변을 살폈지만 크로아는 보이지 않았다.
‘또 몰래 담배나 피우러 나갔나 보군.’
이를 아득 깨물고 율리안은 고민에 빠졌다.
마음 같아서는 손을 뿌리치고 이 답답한 곳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자히드라 황제는 신전을 대적할 유일한 존재였다.
율리안은 황제가 싫었지만, 신전은 더더욱 싫었다.
신전에서 매년 벌이는 각종 행사에 요하네스 공작은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했다.
그때마다 자히드라는 기다렸다는 듯 사건을 만들어 율리안이 행사에 참석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황제 자신이 좋자고 하는 일이었겠지만 그 덕분에 율리안이 이득을 본 것도 사실이었다.
‘만약 황녀와 결혼하면 신전도 후처를 들이라고 쉽게 말하진 못할 테지.’
율리안의 시선이 자신에게 머물자 카트린느의 볼에 수줍은 보조개가 떠올랐다.
카트린느는 황제가 율리안과 혼약을 맺으라는 말에 처음에는 망설였다.
그를 뒤따라오는 추문들이 무척 더러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 이렇게 얼굴을 온전히 맞대고 있으니 불구덩이 속에라도 그를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만큼 그는 심히 아름다웠다.
짧은 계산을 마친 율리안이 카트린느에게 손을 뻗었다.
“그럼, 저와 첫 곡을 추시겠습니까?”
자히드라는 그럼 그렇지, 하고 흡족하게 웃었다. 참으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율리안은 카트린느의 진한 장미 향수 냄새에 코를 찡그렸다.
카트린느의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귀에 닿자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이 불현듯 떠올랐다.
‘율리안. 너는 절대 사랑에 빠지지 마라.’
죽어가면서까지 그의 어머니는 어린 율리안에게 저주 아닌 저주를 퍼부었다.
‘잠시 내가 미쳤었나 보군.’
카트린느는 아무 죄가 없었다.
율리안은 그녀에게 사랑을 줄 수 없었다.
공작가의 비밀을 황가의 사람에게 누설할 수는 없으니, 카트린느는 이유도 모른 채 남편의 사랑을 갈구하다 미쳐버릴 것이다.
율리안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곧이어 첫 곡을 알리는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 * *
‘오늘은 기분이 안 좋은가.’
제플린과 춤을 추고 있던 레베카는 옆으로 스쳐 지나가는 율리안의 얼굴을 흘깃 쳐다보았다.
율리안은 어여쁜 황녀의 손을 잡고 있으면서도 도살장에 끌려가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레베카가 곁눈질하는 걸 눈치챈 제플린이 레베카의 얼굴을 잡아 자신을 향하게 했다.
“나를 봐야지, 레베카.”
“아, 미안해요. 잠시 어지러워서.”
“이런 자리일수록 처신을 잘해야 해. 당신을 다들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잖아. 당신은 나만 본다는 걸 알려줘야지.”
제플린이 기분 좋게 웃었다.
아름다운 데본셔 백작 부부는 어디를 가나 주목받는 커플이었다.
레베카가 어쩌다 참석한 자리에 입고 나온 드레스는 그해의 유행을 선도하기도 했다.
지금도 레베카의 옷차림을 탐욕스럽게 훑는 이들의 시선이 뜨거웠다.
‘역겨워.’
첫 곡이 드디어 끝났다.
레베카는 제플린과 춤을 추는 내내 그의 얼굴에 침이라도 뱉지 않은 자신의 인내심에 놀라는 중이었다.
* * *
“여기 얌전히 있어.”
또 구석행이었다.
두 번째 곡부터는 남편이 아닌 다른 파트너와 춤을 출 수 있었지만, 레베카에겐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이곳 어딘가에 숨어 있는 제플린의 사냥개가 혹여 레베카에게 남자가 접근하지는 않는지 눈에 불을 켜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오히려 지금은 그런 편이 좋았다.
레베카는 일부러 가장 눈에 띄지 않은 커다란 기둥에 몸을 기대었다.
그리고 귀빈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데 정신을 쏟고 있는 제플린을 확인했다.
레베카는 자신이 기댄 기둥 뒤에 붙박인 듯 서 있는 남자를 흘깃 바라봤다.
율리안 요하네스 공작.
그는 세상 무료한 표정으로 붉은 와인을 들이켜고 있었다.
파티에 참석한 모든 여자가 대놓고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공작을 몰래 훔쳐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흑발에 검은 눈. 밀크 초콜릿을 녹여낸 것 같은 피부.
연미복마저 검은색으로 차려입은 이 거대한 남자는 마치 고고한 한 마리의 흑사자 같았다.
더러운 소문으로 유명한 그였지만 그럼에도 얼굴 하나만으로도 시선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다른 여자들처럼 그에게 관심이 가는 건 레베카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조금 다른 의미에서였다.
레베카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 입을 열었다.
“오늘은 고양이들이 안 보이네요.”
율리안은 와인잔을 입으로 가져가려다가 멈칫했다.
여자들의 추파는 대충 피한 줄 알았다. 하지만 여기까지 쫓아온 여자가 있을 줄이야.
짜증이 밀려왔다.
율리안은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러자 레베카가 빠르게 다음 말을 이었다.
“레오. 그 고양이가 당신과 영혼을 나눈 고양이죠? 나머지 고양이들은 레오가 어디 있는지 숨기기 위한 수단일 뿐이고요.”
율리안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세간에 알려진 건 요하네스 공작가가 신의 사자인 레오를 섬긴다는 사실 뿐이었다. 영혼이 이어졌다는 걸 알고 있는 이는 드물었다.
그는 감히 공작가의 비밀을 알고 있는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러 몸을 돌렸다.
“그만, 저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걸 티 내지 마세요. 감시당하고 있어서요.”
그녀의 말에 율리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사위를 살폈다.
과연, 핑거푸드를 나르는 하인 하나가 이쪽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율리안은 다시 기둥 뒤에 몸을 기댔다.
“당신, 누구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저는 공작님의 저주를 풀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뭐?”
율리안은 하마터면 큰소리를 칠 뻔했다.
그는 다시 목소리를 낮추고 되물었다.
“저주라니. 감히 여신의 축복을 받은 가문에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지?”
“다 알고 있습니다. 영혼이 연결된 고양이가 죽으면 당신도 죽는다는 걸. 그리고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저주라는 걸. 당신이 저주를 풀기 위해 이야기꾼들을 모으고 있다는 것도.”
“글쎄, 난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극소수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새어나갈 수도 있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어지간한 정신머리가 아니고서야 그런 말을 하고 다닐 멍청이는 없었다.
요하네스 가문이 저주받았다는 말을 내뱉는 것만으로도 신성모독으로 끌려갈 수 있는 일이다.
이 정체 모를 여자는 어디선가 이상한 말을 주워듣고 자신에게 접근하려는 게 분명했다.
누가 보낸 거지?
황제? 아니면 라트라니스 공작의 장난질인가?
“그럼 이건 어떨까요. 변태 정력가로 유명한 공작님이 동정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율리안은 하마터면 와인을 내뿜을 뻔했다. 이 여자는 낯부끄러운 이야기를 음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온갖 추문으로 감싸고 계시지만 사실은 그 누구보다 깨끗한 순결을 지니고 계시지 않습니까. 애초에 후계를 남기기 싫어하시는 분이니 당연한 일이지만요.”
율리안은 더는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밀려드는 혼담을 거절하기 위해 공들여 만든 소문이었다.
그런데도 자신의 딸자식을 들이미는 미친 부모들이 생각보다 많아 실패한 거나 다름없었지만.
그래도 이건 크로아를 제외하고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최근 라트라니스 공작이 소문의 진의를 의심하는 듯했지만 아직 그에게 사실을 밝히지는 않은 상태였다.
“이쯤 되면 제 정체가 궁금하시겠지요. 거래하고 싶습니다.”
“거래라니?”
“그건…….”
레베카는 말을 하다 말고 멈추었다. 저 멀리서 제플린이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저와 춤을 추신다면 알려드리지요.”
“하. 결국 그게 목적이었나? 내 옆자리를 한번 꿰차려고?”
“그것 또한 저와 춤을 추시면 알게 되실 겁니다. 황제 앞에서 제게 춤 신청을 해주십시오. 반드시 모두가 지켜보는 곳이어야 합니다.”
“거절한다면?”
“그렇다면 공작님은 저주를 없앨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를 놓치게 되시겠죠.”
“좋아. 이제 말해. 네 이름이 뭐지?”
“제 이름은 레베카 데본셔. 데본셔 백작의 첫 번째 부인입니다.”
뜻밖의 이름에 율리안은 흠칫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레베카, 오래 기다렸지? 라트라니스 공작이 계속 말꼬리를 물고 늘어져서 말이야.”
제플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율리안은 이제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율리안의 시선이 닿은 끝에는 미소를 머금은 레베카가 서 있었다.
그녀의 깊고 푸른 눈이 올곧은 시선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율리안이 레베카를 빤히 쳐다보자 제플린이 미간을 모았다.
“무례하시군요. 남의 아내를 그런 식으로 바라보다니.”
제플린이 심기 불편한 음색으로 말하자, 율리안은 그제야 레베카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아, 백작. 존재감 없는 인상이라 그런지 눈에 안 띄어서 미처 눈치를 못 챘군.”
‘이 어린 자식이!’
제플린은 대놓고 자신을 하대하는 그를 향해 이를 악물었다.
제플린과 율리안은 첫 만남부터가 최악이었다.
‘꺼져! 이 추한 게!’
이제 막 문장을 구사하기 시작한 율리안이 제플린에게 했던 첫 말이었다.
제플린은 태어나서 지금껏 단 한 번도 추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러니 순수한 눈망울의 어린아이가 한 말은 그에게 트라우마처럼 각인되었다.
제플린은 아직까지도 가끔 그날의 꿈을 꾸고는 했다. 지독한 악몽이었다.
제플린이 율리안을 싫어하는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율리안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버릇이 없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예의범절에 대해 함부로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황제도 그의 앞에선 쩔쩔맸다.
제가 세상의 왕인 듯 구는 거만한 태도가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자가 자신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 있었으니 제플린은 율리안만 생각하면 치를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