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사실 발라리아 해안의 저택도 절대 팔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애타게 찾던 그림 작품 중 두 점을 그가 가지고 있었다.
두 점만 얻으면 완성되는 작품이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율리안에게 저택을 넘겨주었다.
‘꼴에 작품을 알아보는 눈은 좋군. 하지만 레베카는 절대 갖지 못해.’
제플린은 의도적으로 레베카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율리안은 단단하게 레베카를 잡은 제플린의 낭창한 손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율리안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제 아내는 이만 데려가죠.”
제플린은 서둘러 레베카를 끌고 연회장의 가운데로 갔다. 은연중에 승리감이 비쳐들었다.
레베카는 내 것이다. 너 따위가 감히 넘볼 수 없는.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오늘따라 레베카가 더더욱 사랑스러웠다.
그는 레베카를 바싹 자신의 쪽으로 붙였다. 그리고 어깨와 이마에 키스를 퍼부었다.
레베카는 헛구역질을 간신히 참는 중이었지만 남들 눈에는 그저 다정한 한 쌍으로 보였다.
데본셔 백작 부부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신나게 입방아를 찍어 내렸다.
“어쩜, 백작님은 자기 부인에게 저렇게 다정하실까.”
“그럼 뭐해요. 거의 집 안에 갇혀 있다시피 하며 사는데.”
“그야 당연하지. 부인이 제국 제일의 미녀인걸. 나라도 집에 가둬두고 아무도 못 만나게 하겠어.”
“글쎄요. 전 최고의 미녀는 두 번째 부인이라 생각하는 걸요. 알리시아라고 했던가? 저번에 살짝 봤는데 눈이 부시더군요.”
“제기랄, 백작은 복도 많군. 그나저나 두 번째 부인은 참석하지 않았나? 얼굴 한번 구경하고 싶었는데.”
“무슨 낯짝으로 여길 오겠어요. 평민 출신인데다가 말이 부인이지, 사실 첩이나 다름없는…….”
마음껏 떠들어 대던 좌중은 백작 부부에게 성큼성큼 다가가는 율리안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모두의 시선, 특히 황제의 시선까지 자신에게 모인 걸 확인한 율리안이 입매를 비틀었다.
제플린도 키가 큰 편이었지만 율리안은 그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있었다.
제플린이 불쾌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더 할 말이 있으신가?”
“아니, 백작에게는 할 말이 없지. 내 용무는 이쪽에 있어.”
율리안이 허리를 굽혀 레베카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레베카, 저와 한 곡 같이 추시겠습니까?”
그는 의도적으로 데본셔의 성을 떼고 레베카의 이름만을 다정하게 불렀다.
옆에서 주먹을 쥐고 있는 제플린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연회장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다들 입을 벌리고 율리안과 레베카를 번갈아 쳐다봤다.
레베카는 손을 뻗은 율리안과 눈을 마주치고 잠시 숨을 멈추었다.
이전 생에서는 그와 딱히 접점이 없었다. 만났다고 하더라도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게 전부였다.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흑안이 레베카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샅샅이 살펴보고 있었다.
총기가 흐르는 그의 눈빛과 대조적으로 눈 밑에 드리운 검은 그림자는 그가 지독한 권태와 절박감에 시달리고 있다는 걸 잘 보여주고 있었다.
레베카는 그의 위태로울 정도로 날카로운 턱 선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거세게 뛰는 가슴을 도무지 진정시킬 수 없었다.
더러운 추문에도 그를 따르는 영애들이 왜 그렇게 많았는지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그는 위험했다. 잠시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새하얗게 변하다니.
자칫하다간 말려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절해, 레베카. 상종할 가치도 없는 작자야.”
하지만 강하게 어깨를 잡는 제플린의 손아귀 힘에 레베카는 곧 정신을 차렸다.
이건 다시는 없을 기회였다. 지금 공작의 손을 잡아야 했다.
레베카는 제플린이 눈치 못 챌 정도로 조심스럽게 자히드라 황제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에게 애처로운 눈빛을 잠시 보내다 이내 고개를 떨구었다.
물빛 어린 그녀의 벽안을 발견한 자히드라는 순간 움찔했다.
제플린은 애처가였지만 동시에 아내에게 무섭도록 집착하고 있었다.
남의 가정사라 애써 무시하고 있었지만 요하네스 공작이 끼어든다면 말이 달랐다.
자히드라는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을 돌렸다.
제플린은 친황제파였다. 율리안이 그의 아내에게 관심이 있다면 그건 큰 약점이 될 수 있었다.
게다가 미녀를 곤궁에서 구하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자히드라는 크게 웃었다.
“데본셔 백작! 부인을 너무 끼고 도는 것도 보기에 좋지 않아.”
“하지만, 폐하! 이자는 무례하게도…….”
“어디가 무례한지 모르겠군. 첫 춤은 이미 자네와 추지 않았나. 보아하니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아내가 다른 남자와 춤을 춘 적이 없다지? 한 번쯤은 괜찮지 않나. 허락해 주게.”
이 사태를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던 관중들이 수군거렸다.
사교계에 발을 잘 내딛지 않는 레베카의 일로 안 좋은 소문들이 돌고 있던 참이었다.
제플린은 침음을 삼켰다.
황제가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하는 건 도리가 아니었다.
제플린은 여유롭게 미소 짓는 율리안을 살기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알겠습니다. 대신 단 한 곡뿐입니다.”
“아니, 글쎄, 나는 백작이 아니라 여기 숙녀분께 허락을 구한 건데.”
레베카는 제플린의 눈치를 보는 척했다. 제플린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레베카는 천천히 율리안의 손을 잡았다.
부드러운 제플린의 손과 대조적으로 그의 손은 커다랗고 거칠었다. 하지만 따뜻했다.
“영광입니다. 레이디.”
율리안은 레베카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는 레베카를 미혼의 영애인 것처럼 대했다.
제플린은 황궁을 불태워 버릴 기세로 두 사람을 노려봤다.
두 번째 곡이 시작되었다.
다른 사람들도 춤을 추었지만 율리안과 레베카를 쳐다보느라 다들 스텝이 엉망이었다.
“그래, 이제 어디 한번 말해봐. 거래라는 게 뭔지.”
레베카는 허리를 감싸는 그의 손을 신경 쓰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제플린 이외의 남자와 이런 식으로 접촉하는 건 처음이었다. 긴장한 탓에 목이 뻣뻣하게 굳었다.
“제가 하려던 말은…….”
레베카는 무심코 율리안을 올려다봤다가 그의 눈동자를 보고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의 눈이 찬란한 황금빛으로 변해 있었다.
율리안은 흥미로운 사냥감을 보듯 그녀의 다음 말을 채근하고 있었다.
레베카는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 과거에 자신이 당했던 일들을 떠올렸다.
곧 미친 듯이 뛰던 맥박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레베카는 눈을 뜨고 입을 열었다.
“이혼하겠습니다.”
“뭐……?”
“그러니 저와 결혼해 주세요.”
* * *
레베카의 풍성한 드레스는 감미로운 음악에 따라 차르르 펼쳐졌다가 다시 모였다.
레이스가 스칠 때마다 빼곡하게 박힌 비즈들이 탄성을 자아낼 정도로 눈부시게 반짝였다.
거대한 덩치와 다르게 율리안의 몸짓은 가벼웠다. 그는 레베카를 능숙하게 다루었다.
사람들의 무수한 눈빛이 무도회장을 휩쓰는 레베카와 율리안에게 쏟아졌다.
레베카가 제플린과 함께일 때는 닮은 외양 때문인지 남매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 지옥에서 올라온 것 같은 검은 사내와 천상에서 내려온 것 같은 하얀 여인은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잘 어울렸다.
황제는 물론이고 연회장에 모인 모든 사람이 레베카와 율리안의 춤사위를 눈으로 좇았다.
제플린의 분노만 아니었다면 두 사람이 하루 종일 춤을 췄으면 할 정도로 황홀한 광경이었다.
차분히 박자를 밟는 발걸음과는 달리 율리안의 눈은 묘한 흥분감과 호기심으로 고양되어 있었다.
레베카는 그의 집요한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당돌하게 눈꼬리를 올렸다.
“로맨틱한 청혼이 아니란 걸 압니다만, 공작께 나쁜 조건은 아닐 겁니다.”
“이유는?”
“곧 신전에서 압박이 들어올 테지요. 신부를 들이라고요.”
“그런 건 또 어디서 들었어.”
“출처 같은 건 지금 우리의 계약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제가 당신의 신부가 되겠습니다. 저와 결혼하게 된다면 공작님이 우려하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결혼 생활 동안 저는 공작님께 털끝 하나 손대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당연히 사랑을 갈구하거나 후계가 태어나는 일도 없을 거고요. 한마디로, 껍데기만 부부인 관계가 되자는 겁니다.”
‘지금 나에게 손을 대고 싶다고 해서 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율리안은 한 줌도 되지 않는 레베카의 허리를 내려다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원하는 건 그게 다인가?”
레베카는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춤은 절정에 다다랐다. 율리안은 레베카를 번쩍 들어 올렸다.
레베카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가벼웠다.
예상보다 너무 높게 들어 올려 버린 탓에 율리안은 당황했다.
주변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레베카의 금발이 율리안에게 쏟아져 내렸다. 마치 금빛 폭포가 자신을 덮치는 것 같았다.
율리안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허공에서 레베카가 불타는 눈으로 그에게 속삭였다.
“백작가를, 데본셔 백작가를 무너뜨릴 힘을 주세요. 그럼 제가 당신을 구원해 드리겠습니다.”
레베카는 다시 땅으로 내려와서 그의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율리안이 눈을 가늘게 좁히며 그녀의 낯빛을 살폈다.
흐트러짐 없는 눈빛을 보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걸 어떻게 믿지.”
“믿으셔야 할 겁니다. 절박하시잖아요. 어린 여동생을 저주에서 구해내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의 손을 잡은 채로 레베카는 말려 있는 몸을 멀리 풀었다. 양팔만큼의 거리가 벌어졌다.
릴리의 존재까지 안단 말이야?
율리안은 당혹스럽게 레베카를 쳐다봤다.
그녀의 시선은 처음처럼 여전히 올곧게 자신을 향해 있었다.
‘구원이라니.’
그는 레베카의 팔을 끌어당겨 다시 자신의 품으로 불러들였다. 레베카는 순순히 그에게 말려 들어왔다.
율리안은 레베카의 허리를 단단하게 잡았다. 레베카의 낭창한 허리가 젖혀 들었다.
이제 곧 춤이 끝날 것이다. 그럼 둘만의 대화도 이게 끝이었다.
율리안은 초조해졌다.
조금만 더 그녀와 대화를 하고 싶었다.
“지금 당장 답을 달라고 하진 않겠습니다. 결단을 내리시거든 백작가로 레오를 보내주십시오. 제 방은 이층 동편에 있습니다. 창가에 노란 꽃을 두겠습니다.”
율리안은 놀란 눈으로 레베카를 바라보았다.
레베카는 다시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리고 사르르 입꼬리를 올렸다.
허를 찌르는 아름다운 미소에 율리안은 주춤했다.
“신의 사자인 레오와 말이 통하신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
“레베카!”
곡이 끝나자마자 제플린이 허겁지겁 그녀에게 달려왔다. 그리고 레베카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의 인내심은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제플린은 이미 체면을 차릴 정신이 아니었다.
“그럼, 이만.”
레베카는 군더더기 없는 작별 인사를 건네고 떠났다.
율리안은 멍하니 레베카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