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당장 집으로 돌아가!”
제플린은 마차 안으로 거칠게 레베카를 구겨 넣었다.
평소 그녀의 몸을 애지중지하던 그가 이렇게 저를 함부로 대하는 걸 보니 화가 많이 나긴 한 것 같았다.
잔뜩 일그러진 제플린의 얼굴을 보자 레베카는 기분이 좋아졌다.
조금만 더 그가 고통에 몸부림쳤으면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정도는 시작에 불과했다.
“알겠어요.”
“알아? 뭘 안다는 거야! 다른 놈 품에서 시시덕거리니 좋았어? 집에서 얌전히 기다려. 오늘 일의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
제플린은 세차게 마차의 문을 닫았다.
레베카는 긴 숨을 내쉬며 푹신한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열기가 아직 남아 볼이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제플린과 춤을 출 때는 느껴 본 적이 없는 희열이었다. 레베카는 율리안과 춤을 추는 내내 마음을 내비치지 않으려 갖은 애를 써야만 했다.
왈츠가 이토록 유혹적인 춤이었나 다시금 생각했다.
“참 크고 단단했지.”
율리안의 너른 가슴팍을 떠올리며 레베카는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하지만 곧 손을 들어 두 뺨을 살짝 내리쳤다.
“정신 차려!”
레베카는 이미 생을 한 번 겪은 후였다.
새파랗게 어린 남자의 미인계에 말려들 만큼 자제력이 없지 않았다.
이런 것 따위에 휘둘려서는 안 됐다.
레베카는 주먹을 꽉 쥐었다.
* * *
멍하니 있던 율리안은 곧 정신을 퍼뜩 차리고선 레베카의 뒤를 따라 뛰어나왔다.
하지만 이미 레베카를 실은 마차는 떠나고 간 뒤였다.
“남의 것은 탐내는 게 아니야, 애송아.”
율리안이 떠난 마차를 바라보고 있자 제플린이 증오로 가득 찬 살기를 풍기며 그에게 다가왔다.
그의 기세에 주변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하인들이 주춤하며 물러섰다.
하지만 율리안은 그저 덤덤히 제플린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눈에 제플린의 위협은 늙은 고양이가 갸르릉거리는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물건이 아닌데 어떻게 당신 소유라는 거지.”
제플린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이 어린…… 건방지게!”
“왜. 늙은이 취급이라도 해주기를 바라는 건가. 내세울 게 나이밖에 없나 보군. 그럼 친히 불러 드리지요. 백작 아저씨.”
아저씨란 말에 제플린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제플린은 주먹을 부들거리며 여유롭게 빙글거리는 율리안을 노려봤다.
키악!
어느새 검은 고양이들이 몰려와 율리안의 발치에 섰다. 그리고 제플린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고 하악질을 했다.
“이런. 착하지, 얘들아. 나쁜 사람은 맞지만 여기서 추태를 보이면 우리만 손해야.”
율리안은 제 검은 머리를 쓸어올렸다.
위험한 노란 눈동자가 새까만 머리칼 밑에서 번뜩였다.
따듯한 봄날이었건만 그의 주위에는 겨울날의 북풍이 찾아든 것처럼 스산한 공기가 퍼져나갔다.
그는 마치 사냥을 위해 몸을 웅크리고 있는 것 같은 한 마리의 수사자 같았다.
제플린의 그런 율리안을 보고 본능적으로 몸을 움찔 떨었다.
그리고 제가 겁먹은 걸 도무지 인정하지 못하겠는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다신 레베카에게 접근도 할 생각 마. 그 여잔 내 아내고, 내 소유야.”
제플린은 경고 섞인 한마디를 남기고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다급하게 발을 놀리던 그는 잠시 멈춰서더니 여러 번 재채기를 했다.
율리안은 그런 그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몇 번 찼다.
‘어디 두고 보라지.’
그리고 마차에 기대어 있는 크로아를 향해 걸어갔다.
“헉! 고, 공작님!”
이제 막 세 번째 담뱃불을 붙이고 있던 크로아가 다가오는 제 주인을 발견하고는 서둘러 불을 껐다.
“크로아. 내가 담배 끊으라고 했지. 그러다가 폐 다 망가진다고 의사가 그랬잖아.”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라서요. 그나저나 무슨 일 있었어요? 데본셔 백작이 왜 저렇게 화가 난 거래요?”
율리안은 자신의 어깨에 묻은 금색 머리카락 한 올을 발견하고는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그리고 한참을 쳐다봤다.
“크로아.”
“네?”
“아무래도 나, 결혼할 것 같다.”
“아, 그러시구나. 예?!”
크로아는 경악에 찬 얼굴로 율리안을 바라봤다. 이건 또 무슨 신박한 농인가 싶어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그런데 상대가 유부녀야.”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있는 크로아의 표정을 보고 율리안은 크게 웃었다.
레베카가 내민 제안은 불쾌할 수도 있는 이상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율리안은 불쾌하기는커녕 그녀를 한번 믿어보고 싶었다. 아무런 근거도 없는 생각이었다.
그가 바라던 기적이 찾아온 것일까.
‘레베카…….’
율리안은 속으로 레베카의 이름을 여러 번 되뇌었다.
* * *
톡- 톡- 톡-
레베카가 책상을 규칙적으로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연회장에서 홀로 돌아온 뒤로 레베카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앨리스는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지만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이래 봬도 레베카를 오래 모셨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재빨리 눈치챌 수 있었다.
“앨리스.”
왜 다르게 느껴지는 걸까 곰곰이 고민하던 앨리스는 레베카가 세 번을 불러서야 가까스로 고개를 들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니.”
“아, 죄송해요! 내일 마님께서 입을 드레스는 뭐가 좋을지 생각하느라…….”
“그래. 그런데 오늘은 평소처럼 재잘거리지 않는구나. 내가 왜 연회에서 일찍 돌아왔는지 궁금하지 않니?”
앨리스는 미끼를 잡은 물고기처럼 냉큼 질문을 해댔다.
“왜 일찍 돌아오셨어요?”
레베카는 앨리스의 떨리는 눈가를 보고선 픽하고 웃었다. 어딘가 섬뜩한 웃음이었다.
평소의 상냥한 레베카의 웃음이 아니었다.
레베카는 와인잔을 들었다.
언제 임신할 줄 모르기에 그녀는 최소한의 술만 마셔야 했다.
하지만 오늘은 제정신으로 도무지 버틸 수 없을 것 같아 무리하게 과음을 했다.
“마님, 술은 이제 그만 드시는 게…….”
“오늘 요하네스 공작이 내게 춤을 신청하더구나.”
“세상에나!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춤을 췄지. 황제 폐하께서 친히 명령하셨거든.”
앨리스는 입을 틀어막았다.
제플린이 그녀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앞날이 예상됐다.
앨리스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어, 어떠셨어요? 설레셨나요? 공작님은 멋지신 분이라고 들었어요. 저도 그 광경을 보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니까 그때 레베카 님은 어떤 기분이…….”
퍼붓는 앨리스의 질문 세례에 레베카는 더는 와인을 입가에 가져가지 않았다.
레베카는 대답 대신에 앨리스를 빤히 쳐다봤다. 얼핏 레베카의 눈에 눈물이 고인 것 같았다.
“마님……?”
밖에서 제플린의 분노에 찬 고함이 들려왔다.
“레베카! 레베카! 레베카!”
“드디어 그가 왔구나. 준비해야지?”
레베카는 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기우였던가.
레베카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앨리스에게 괜찮다고 싱긋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앨리스는 석연치 않았지만 자신도 레베카를 따라 무릎을 꿇었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제플린이 들어왔다. 술 냄새가 확하고 풍겨왔다.
그의 뒤로 하녀 두 명이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레베카는 상자를 발견하곤 눈을 찌푸렸다.
제플린은 얌전하게 무릎 꿇은 레베카를 내려다봤다.
“잘못을 알긴 아나 보군.”
“예. 제가 잘못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없던 일이 되지 않아! 내가 얼마나 수치를 당했는지!”
제플린이 손을 내밀자 하녀가 그의 손에 흰 장갑을 씌워주고 채찍을 쥐여줬다.
“안 돼요! 제플린! 제발!”
레베카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말리려 몸을 뻗었다. 하지만 곧 두 명의 하녀가 레베카를 저지했다.
“주인을! 잘못! 모셨으면! 그만큼! 책임을! 져야지!”
그의 채찍은 사정없이 앨리스의 등으로 떨어졌다. 채찍을 휘몰아치는 소리가 적막한 저택 안을 가득 메웠다.
제플린은 절대 레베카의 몸에 폭력을 쓰지 않았다.
대신 그녀가 아끼는 사람들을 학대하면서 그녀의 정신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오랫동안 그녀의 몸에 새겨졌던 공포가 레베카의 몸을 뒤흔들었다. 하지만 레베카는 결코 눈을 감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을 양분으로 삼을 것이었다.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꺼내 보고 또 꺼내 볼 거라고 레베카는 다짐했다.
“잘못했어요! 제플린! 다시는 다른 남자를 쳐다보지도 않을게요. 제 실수였어요. 그러니 그만해요. 제발!”
레베카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의 발에 매달렸다. 이 악마 같은 짓을 멈출 방법을 레베카는 알았다.
이전 생에서 이십여 년의 세월을 그의 부인으로 살았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제플린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 손바닥 위에 올라온 건 제플린이었다.
레베카의 예상대로 제플린은 손을 멈췄다.
그리고 엎드려 흐느끼는 레베카를 바라봤다.
그는 방금까지의 살기 어린 얼굴을 거두고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레베카에게 속삭였다.
“진작에 그러지 그랬어. 그랬더라면 내 셔츠가 피로 더럽혀지지 않았을 거 아니야. 예쁜 것도 죄야, 안 그래? 앞으로 그런 버러지가 달라붙으면 딱 잘라서 거절해. 알겠지? 나의 어여쁜 부인.”
레베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하다며 바닥에 엎드렸다. 겁에 질린 척 어깨를 떠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제플린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하녀에게 채찍을 건넸다. 그리고 들으란 듯이 크게 이야기했다.
“오늘은 레베카가 더럽혀졌으니 알리시아의 방으로 가야겠어. 저 하녀를 치료하고 레베카를 씻기도록.”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다.
하녀들은 목욕물과 의사를 준비하러 밖으로 나갔다.
방문이 세차게 닫혔다.
레베카는 가련한 눈빛을 거두곤 무심한 표정으로 볼에 묻어 있는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쓰러져 있는 앨리스에게 다가갔다.
“앨리스, 많이 아팠지?”
“아니에요. 마님만 무사하실 수 있다면 전 상관없어요.”
“앨리스…….”
레베카는 앨리스를 품 안에 안고 그녀의 얼굴을 가만가만 쓸었다.
앨리스의 입가로 미미한 웃음이 퍼졌다.
아무리 맞아도 목숨만 부지하고 있으면 괜찮았다. 앨리스는 오늘도 밥값은 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 앨리스의 미소를 보고 있던 레베카의 얼굴이 점점 굳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웃었어?”
“예?”
레베카는 앨리스를 차갑게 내려다봤다. 그리고 손을 앨리스의 목 근처로 가져다 댔다.
레베카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앨리스의 숨이 점점 가빠졌다.
앨리스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제 목을 조르고 있는 레베카의 손을 내려다봤다.
“백작이 채찍을 들었을 때 왜 웃었냐고 물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