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제플린이 다급히 서재로 들어온 날 밤부터 레베카는 앨리스를 향한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제플린은 알리시아와 짐마차보다 빠르게 저택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서재로 뛰어 들어왔다.
제플린은 무엇이든 다급하게 서두르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레베카를 안았을 때 그의 셔츠는 땀으로 젖어 있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가 서재로 뛰어와야 했을까.
저택에 벌어진 단 한 가지의 변수는 레베카뿐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아는 건 앨리스 한 명밖에 없었다.
“마, 마님……, 수, 숨이 막혀…….”
레베카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앨리스가 그녀의 손을 쳐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생각해보면 여태껏 앨리스를 의심하지 않은 게 이상한 일이었다.
레베카의 하녀들은 거의 반년 주기로 바뀌었다.
조금이라도 정을 붙인다 싶으면 제플린은 하녀들을 해고하거나 다른 곳으로 보내 버렸다.
마치 레베카의 편을 한 명이라도 남겨주지 않겠다는 것처럼.
하지만 앨리스는 달랐다.
앨리스는 레베카가 백작가로 온 첫날부터 함께한 하녀였다.
제플린의 사람이 아니라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사실 때문에 판단이 잠시 흐려졌다.
이제는 그 희생조차도 무슨 목적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앨리스가 눈을 까뒤집기 시작할 때가 되어서야 레베카는 손을 놓았다.
레베카는 캑캑거리며 숨을 고르는 앨리스를 차갑게 내려다봤다.
* * *
“도망가.”
목을 잡으며 떨던 앨리스가 놀란 눈으로 레베카를 바라봤다.
당장 찢어 죽이고 싶을 정도로 배신감이 몰려왔다.
하지만 레베카는 차마 그러지 못했다.
앨리스와 함께했던 나날들이 집요하게 떠올랐다.
백작가에서 그나마 행복했었던 기억엔 모두 앨리스가 함께 있었다.
“마님, 그, 그게 무슨…….”
“이미 나에게 신뢰를 잃었으니 제플린이 널 어떻게 할지는 스스로가 잘 알겠지. 마지막 기회를 줄게. 내일 아침에 제플린에게 널 해고하라고 말할 거야. 그러니 동이 트기 전에 도망가.”
앨리스는 서릿발보다 차가운 레베카의 얼굴을 바라봤다.
오랫동안 그녀의 곁에 있었지만, 난생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들켰구나.’
앨리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아직 제플린에게서 받아내지 못한 대금을 세어 보았다.
이렇게 맞고 난 다음 날에 그는 평소보다 더 많은 거금을 주고는 했다.
하지만 레베카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쓸모를 잃은 사냥개들의 최후는 여태껏 많이 보아왔다.
고작 몇 푼 더 받자고 무모하게 굴 필요는 없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순진하고 어리석은 여자. 배신자에게 복수를 할 용기도 없는 건가.
끝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여자였다.
“이유도 묻지 않으시는 건가요?”
“이유를 안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빨리 도망가기나 해.”
“레베카, 당신은 언제나 그런 식이었지요.”
레베카는 말없이 앨리스의 입술을 바라봤다.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처럼 날카롭게 꽂혀 들었다.
앨리스는 광기 어린 눈을 치켜뜨고 레베카를 향해 말했다.
“모든 걸 다 가졌으면서도 누릴 줄 몰라. 누구는 좋아서 가난한 부모를 만난 줄 알아? 네 가문도 보잘것없었다며? 백작님이 거둬줬으면 감사합니다, 하고 지내야지.”
“앨리스, 넌 내가 당한 걸 보고도 그런 말을 하는 거니?”
귀를 막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제 편이라 여겼던 앨리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을 마주하기 무서웠다.
앨리스는 흐르는 피를 닦아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발악하듯 소리쳤다.
“당했다고? 대체 뭐가 그렇게 불만인데? 어여쁘게 여겨주잖아. 그 많은 보석을 쥐여주고 예쁘게 입혀주기까지 하잖아. 내가 너였으면 하는 생각을 하루에 몇 번이나 하는지 알기나 해? 그러니까 첩년한테도 밀리지.”
“앨리스. 말을 가려서 해. 난 지금 당장이라도 널 죽일 수 있어.”
“죽여 봐! 못 죽이잖아. 넌 언제나 순진하고 착한 백작 부인이니까. 그 위선도 작작…….”
깡!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하녀 한 명이 세숫대야를 앨리스의 머리통에 그대로 후려쳤다.
방금까지 제플린과 함께 있던 하녀였다.
경쾌한 쇳소리와 함께 앨리스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하녀는 표정 변화 없이 공손하게 레베카에게 허리를 굽혔다.
“레베카 님, 목욕물이 준비되었습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레베카는 갑작스레 등장한 하녀를 바라봤다.
하녀는 앨리스의 머리채를 잡았다.
“이 버러지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손에 찌그러진 세숫대야를 들고 앨리스를 질질 끌고 밖으로 나갔다.
문이 조용히 닫혔다.
레베카는 쓰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 * *
“기회를 줬는데…….”
방금 그 하녀는 분명 제플린의 사람일 게 분명했다.
하긴 그렇게 소란을 떨었는데 모르는 것도 이상했다.
이제 앨리스는 어떻게 되는 걸까.
온갖 끔찍한 상상들이 머릿속을 지나쳤다. 그리고 동시에 헛웃음이 나왔다.
지금 상황에서도 앨리스를 걱정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레베카는 앨리스가 했던 말들을 곱씹었다. 참았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제 완전히 혼자야.’
레베카는 짐승처럼 울었다.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고통을 예상했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더 이상 이곳에 자신의 편이 없다는 사실이 무겁게 그녀를 짓눌러왔다.
레베카는 무릎을 끌어안았다.
지독하게 외로웠다.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새장에 갇혀 있던 옛날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무기력하게 제플린이 주는 먹이에 의존하던 그 시절로.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목욕물이 다 되었다던 하녀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레베카는 이제 울지 않았다.
달빛마저 구름에 가렸다. 암흑이 흐르는 방 안에서 레베카는 심해 같은 눈을 조용히 깜빡였다.
그녀는 갓 태어난 제 아이를 달랬던 것처럼 자신의 어깨를 도닥거렸다.
“쉬이……. 그만 울고 단단해져야지…….”
레베카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유채꽃이 꽂힌 화병을 들었다.
자신을 바라보던 율리안의 눈빛처럼 유채꽃은 화사한 금빛을 뽐냈다.
레베카는 창가에 화병을 놓았다.
순간 구름이 걷혔다. 만월이 환히 비춰들었다.
달빛이 레베카의 온몸 구석구석에 내려앉았다.
그러자 그녀의 몸 안에 여태껏 숨죽이고 있던 어떤 것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레베카는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읊조렸다.
“단단해질 거야. 레베카, 너는 단단해질 거야. 반드시 단단해져서 바위를 부숴버릴 거야.”
시린 달빛이 눈에 부셨다. 아무것도 손에 쥔 게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레베카를 안심시켰다.
그녀는 이제 더는 잃을 것이 없었다.
그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 * *
앨리스의 머리칼을 잡고 끌던 칸나는 계단 앞에서 멈춰 섰다.
그러더니 쯧 하고 혀를 한 번 차고는 앨리스를 그대로 들쳐 매고 계단을 내려갔다.
‘지금까지 그런 취급을 당해 오신 겁니까.’
한발 한발 옮기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네가 돈이면 뭐든 다 한다는 심부름꾼이냐.’
제플린의 사람이 찾아왔을 때 칸나는 기뻐 날뛰고 싶었다.
그동안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
제플린이 칸나에게 약조한 돈은 그녀가 여태껏 만져본 것 중에 가장 많은 액수였다.
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못한 돈을 준다고 하더라도 칸나는 기꺼이 일을 수락했을 것이다.
이곳에 들어오는 것은 칸나가 평생을 품고 살아온 소원이었다.
“너, 너 뭐야! 이거 놔! 놓으라고! 레베카 님! 살려주세요!”
이제 막 정신을 차렸는지 앨리스가 소리를 지르며 버둥거렸다.
칸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앨리스를 잡은 팔에 더더욱 힘을 줬다.
거센 악력에 앨리스가 비명을 질렀다.
“더러운 입에 그 이름 함부로 올리지 마.”
“뭐라고?”
앨리스는 멍하니 칸나를 내려다봤다.
칸나는 정원을 지나 빛의 전당 앞에 우뚝 섰다. 전당의 입구를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문을 열어줬다.
“백작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빛의 전당 한가운데는 눈을 비단 천으로 가린 데프리아 여신상이 그 위용을 뽐내며 서 있었다.
데프리아 여신상은 두 손에 커다란 십육면체 주사위를 들고 있었다.
여신상의 시선은 제 발밑에서 일어나는 일에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허공을 향했다.
커다란 여신상을 확인한 앨리스는 희게 질렸다. 그녀는 이곳에서 자신이 어떤 일을 겪을지 잘 알고 있었다.
칸나는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앨리스를 내던졌다.
앨리스는 칸나의 발을 잡고 빌었다.
“미안해! 제발, 지하로는 데려가지 말아줘. 원하는 게 뭐야? 다 줄게. 그러니까 제발…….”
“끝까지 시끄럽군. 조용히 시켜.”
어둠 속에서 제플린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칸나는 그를 흘깃 보더니 앨리스의 목 뒤를 세게 내리쳤다.
의식을 잃어가는 앨리스의 눈동자에 공포가 떠올랐다.
쓰러진 앨리스를 보고 제플린은 흡족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시키지 않은 일을 왜 하는 거야. 너, 칸나라고 했나?”
“네.”
“생각보다 쓸 만하군. 앞으로 일만 잘해주면 네가 원하는 건 다 안겨주지. 다만, 주제넘은 짓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겠지?”
“네.”
“군더더기 없는 점도 마음에 들어. 이번엔 옥타비오가 괜찮은 개를 구해다 줬군. 좋아. 내일부터 넌 앨리스 대신 레베카의 하녀가 돼라. 그녀의 마음, 몸짓, 단어, 눈빛 모든 것을 나에게 보고해야 할 거야.”
칸나가 고개를 숙였다.
제플린이 손뼉을 두어 번 치자 건장한 사내가 앨리스를 안아 들었다.
칸나는 지하로 내려가는 제플린의 뒷모습을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 * *
날이 흐린 탓에 레베카는 조금 늦잠을 잤다. 그녀의 기분처럼 우중충한 아침이었다.
“일어나셨습니까. 오늘부터 마님을 모시게 될 칸나라고 합니다.”
레베카는 칸나를 가만히 훑었다. 어젯밤, 앨리스의 머리통을 갈기던 그 하녀였다.
참 빠르기도 하지. 앨리스의 대체물이 이렇게 금방 구해지다니.
검은 머리에 갈색 눈.
칸나는 콧잔등에 점이 하나 있는 것 말고는 눈에 띄는 구석이라고는 없는 평범한 여자였다.
레베카는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그녀를 스쳐 지나간 하녀 중에 칸나라는 이름은 없었다.
‘또 미래가 바뀌었어.’
레베카는 잠자코 칸나의 수발을 받았다. 흠잡을 곳 없는 솜씨였다.
‘앨리스는 서툰 점이 많았지.’
지난날을 떠올리던 레베카의 눈앞이 뿌옇게 변했다.
‘앨리스는 어떻게 되었을까. 죽었을까? 죽었겠지. 저 칸나라는 아이는 내가 앨리스의 정체를 눈치챈 걸 말했을까. 그럼 곤란해지는데…….’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아직 요하네스 공작에게선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 공작에겐 며칠 기다리겠다고 했지만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레베카는 습관적으로 손을 꽉 쥐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던 칸나가 입을 열었다.
“앨리스는 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