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11화 (11/232)

11.

레베카는 멈칫했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빗질하던 칸나의 손이 떨렸다.

“그리고 거기에 레베카 님의 잘못은 없습니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백작은 자세히 모릅니다. 그러니 백작은 아직 레베카 님을…….”

칸나의 빗질이 멈췄다. 레베카가 그녀의 손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상처받은 푸른 눈이 칸나를 쏘아봤다.

“이게 무슨 짓이지? 그런 식으로 내 호감을 사라고 제플린이 시켰나? 쓸데없는 짓이야. 앨리스의 최후를 봤으니 너도 잘 알겠지. 늦기 전에 너도 도망가. 목숨이 아깝다면.”

칸나는 물끄러미 제 손을 잡은 레베카의 마른 손을 응시했다.

그녀의 손은 따뜻했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칸나는 레베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품에서 손수건 한 장을 꺼냈다.

“제 목숨보다 소중히 여겨온 물건입니다.”

레베카는 손수건을 받아들었다. 손수건에는 서툰 솜씨의 장미 자수가 수 놓아 있었다.

잠시 과거를 더듬던 레베카가 눈을 크게 떴다.

“넌……?”

“네. 맞습니다. 레베카 님이 구해주신, 마차에 뛰어든 그때 그 아이입니다.”

칸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 * *

그날은 따뜻한 봄이었다.

하지만 어린 칸나에게는 시린 계절이었다.

도박 빚에 아버지는 칸나를 매음굴에 팔아넘겼다. 뒷골목에서는 주목조차 받지 못하는 흔하디흔한 일이었다.

붉은 벽지와 헐벗은 여자들이 보였다. 독한 향수 냄새와 술 냄새에 어지러웠다.

“너무 말랐잖아!”

“그래도 죽은 애 어미는 꽤 예뻤어. 잘 쳐줘.”

“쯧. 이 정도밖에 못 쳐줘!”

“뭐야?”

아버지와 마담이 흥정하는 틈을 타 칸나는 온 힘을 다해 도망쳤다.

어릴 때부터 배를 곯지 않기 위해 도둑질을 밥 먹듯이 했다. 도망은 자신 있었다.

등 뒤로 고함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획 같은 건 없었다.

그러나 하나뿐인 가족의 손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칸나는 멈추지 않았다. 여러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났다.

골목을 나가 큰 대로로 나갔을 때다.

커다란 마차가 굉음을 내며 멈춰 섰다.

“너! 죽으려고 환장했어?”

마부가 고함을 질렀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흥분한 말이 앞발을 치켜들었다.

화난 마부가 채찍질이라도 할 것 같아 칸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괜찮니?”

하지만 들려오는 건 세찬 채찍 소리가 아니라 상냥한 목소리였다. 눈물이 나도록 달콤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칸나는 눈을 슬며시 떠서 손을 내밀고 있는 레베카를 보았다.

눈부신 한여름의 햇살 같은 금발이 보였다. 사파이어 같은 눈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칸나는 순간 천사가 내려왔나 하고 생각했다.

“내 이름은 레베카야. 세상에나. 너 많이 다쳤구나.”

“칸나! 이년 어딨어!”

아버지의 목소리가 인파를 뚫고 들려왔다. 칸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떨었다.

레베카는 살짝 눈을 찌푸리고 칸나의 아버지를 바라봤다.

어떤 사연인지 대충 가늠한 레베카는 칸나를 번쩍 들어 안았다.

칸나는 깜짝 놀라 버둥거렸다. 무릎에서 줄줄 새는 피가 레베카의 드레스에 묻었다.

“귀, 귀부인! 이러지 마세요! 드레스가…….”

“이렇게 가볍다니……. 걱정하지 마. 고작 드레스일 뿐이야. 그것보다 네가 더 소중하단다.”

고작 드레스라니.

칸나는 아비가 저를 팔려고 했던 값보다 레베카가 입은 드레스가 더 비싸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레베카는 칸나를 마차에 앉히고 마차를 두드렸다.

“리베르타 구휼원으로.”

마차가 부드럽게 움직였다.

아까 고함을 지르던 마부가 모는 거라 믿기 힘든 움직임이었다.

“방금 소리치던 사람은 아는 사람이니?”

칸나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추한 사람이 아버지라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레베카는 그런 칸나의 마음을 알았는지 더는 묻지 않았다.

그리고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칸나의 무릎에 묶어주었다.

“다른 사람에게 선물하러 만든 거였지만……, 그래도 임시방편은 되겠지?”

칸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손수건에 수 놓인 장미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레베카는 칸나의 눈물 자국을 손으로 닦아주었다.

“지금 우리가 가는 곳은 리베르타 구휼원이란 곳이야. 다들 좋은 사람들 뿐이란다. 아까 고함치던 사람은 얼씬도 못하게 해줄게.”

레베카는 이제 괜찮다고, 그동안 고생했다며 칸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칸나는 꿈을 꾸는 것 같아 갈색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더듬더듬 레베카에게 물었다.

“그곳에는 귀부인께서도 계시는 건가요?”

“가끔 방문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나는 마음대로 밖에 나가지 못하는 처지라…….”

레베카는 말끝을 흐렸다. 시선을 떨구고 주먹을 꾹 쥐었다.

칸나는 그 모습이 무척 쓸쓸해 보여 저도 모르게 레베카의 팔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깜짝 놀라 손을 떼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분수도 모르고 더러운 손을!”

하지만 레베카는 칸나의 손을 다시 붙들었다. 그리고 잡은 손을 부드럽게 쓸었다.

“더러운 건 씻으면 그만이잖니.”

칸나는 활짝 웃는 레베카의 따뜻한 미소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락거리는 짙은 초록색 드레스의 감촉. 은은한 향수 냄새. 마차의 창으로 비춰드는 봄 햇살과 그만큼 반짝거리는 레베카의 금색 머릿결.

그리고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온기 어린 손길까지.

리베르타 구휼원에 들어온 뒤로도 칸나는 그 순간을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아니, 잊지 못했다.

제 은인이 백작가에서 불행히 산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 더더욱 그랬다.

때때로 인생에 시련이 찾아왔지만, 오직 그때의 기억 하나만으로 버텼다.

순간의 기억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칸나가 그러했다.

* * *

칸나는 어느새 눈물을 펑펑 쏟아내고 있었다.

“한 번도, 단 한 번도 레베카 님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저를 잊으셨다 해도 상관없어요. 당신이 행복할 수만 있다면 전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레베카는 잠시 할 말을 잃고 칸나의 눈물을 멍하니 바라봤다.

백작 부인이 되어 처음 한 일은 구휼원을 세우는 것이었다.

큰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녀가 외출할 때마다 적선을 베풀다 보니 어느새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들을 수용할 장소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제플린은 구휼원을 만들고 싶다는 그녀의 청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성녀 같다는 평판이 꽤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곳이 리베르타 구휼원이었다.

리베르타 구휼원의 구성원은 대부분 힘없는 어린아이나 여자, 노인들이 주를 이루었다.

레베카를 유혹할 만한 성인 남자는 입소할 수 없었다.

제플린은 기분 좋은 날이면 레베카의 구휼원 나들이를 허락했다.

마음 둘 곳 없던 레베카가 유일하게 애착을 가졌던 곳이었다. 나중에는 그마저도 불가능하게 되었지만.

제플린은 후원금에 인색한 편이었다. 구휼원의 자금은 언제나 모자랐기에 그들은 돈 되는 일이라면 닥치고 했다.

그 사정을 아는 레베카는 항상 미안해하며 보석들을 몰래 팔아 구휼원에 돈을 보태어주기도 했다.

동고동락하는 리베르타의 식구들은 끈끈하게 뭉쳐 일종의 조직처럼 움직였다.

리베르타의 사람을 건드리면 다 같이 몰려가 흠씬 두들겨 팼다. 그게 안 된다면 지나가다 돌이라도 맞게 했다.

개개인으로는 약한 자들이었지만 뭉쳤을 때는 강했다. 그들은 가족 이상의 관계였다.

레베카는 알지 못했다.

꽁꽁 뭉친 리베르타 사람들 가운데에 레베카 자신이 서 있다는 사실을.

피가 이어지지 않은 그들을 이어주는 건 레베카였다.

각자 사연은 달랐지만, 대부분이 레베카의 도움을 받은 자들이었다.

칸나도 그런 리베르타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도박 빚으로 저를 매춘굴에 팔아넘겼죠. 그때 제 나이는 겨우 열 살이었습니다. 저는 필사적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레베카 님 마차 앞에 뛰어들었습니다.”

기억이 났다.

레베카는 칸나가 건넨 손수건을 바라보았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레베카는 제플린에게 처음으로 직접 만든 손수건을 선물했다.

자수에는 영 소질이 없었기에 서툴렀지만 그래도 정성을 다했다.

하지만 제플린은 레베카의 선물을 비웃었다.

‘형편없군. 레베카,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은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쓰레기 같은 선물을 할 리가 없지.’

그 말을 듣자마자 백작저에서 도망쳤어야 했다.

하지만 레베카는 그러지 못했다. 그러기엔 그때 제플린을 너무나 사랑했다.

그게 사랑이라고 믿던 때였다.

그날 레베카는 답답한 마음에 구휼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깡마른 여자아이를 만났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아이의 눈빛만은 생생했다. 레베카는 아이를 마차에 태웠다.

아이의 무릎에서 피가 흐르는 걸 발견한 레베카는 제플린에게 선물하려던 손수건을 상처에 묶어주었다.

“지금 당장 저를 믿어달라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저를 써주십시오. 제플린을 죽이라면 죽이겠고, 첩의 다리를 분지르라면 그러겠습니다. 당신의 편이 되고 싶습니다.”

칸나는 결연한 표정으로 레베카를 올려다봤다.

레베카의 가슴이 쿵쿵 뛰어왔다.

앨리스가 가버리고 그녀가 온 게 과연 우연일까? 정말 내 편이 되어준다는 걸까.

레베카는 지금 당장이라도 칸나의 손을 잡고 그러겠노라고 말하고 싶었다.

죽을 만큼 믿고 싶었다. 따뜻한 품이 필요했다.

하지만 섣부르게 믿을 수 없었다.

앨리스의 표독스러운 마지막 표정이 계속 아른거렸다.

레베카는 입술을 앙다물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서 무릎을 꿇고 있는 칸나의 손을 잡고 일으켰다.

“넌, 지금 제플린의 사람이지.”

“백작의 사주를 받아 들어오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레베카 님의 곁에 있기 위함이었습니다. 전 죽어도 그 자식의 사람은 되지 않을 겁니다.”

“아니. 넌 제플린의 사람이 되어야 해.”

“예?”

“정녕 네가 나를 돕고 싶다면 제플린의 신임을 얻어. 그리고 내 눈과 귀, 여차하면 발까지 되어줘. 하지만 그 전에 네가 내 편이라는 증명을 해야겠지.”

“말씀만 하십시오.”

레베카는 방 안을 서성였다. 빗질하던 중이라 긴 머리카락이 그녀의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칸나는 황홀한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잠시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레베카가 좋은 방도가 떠올랐는지 고개를 들었다.

“제플린의 머리카락을 잘라 와. 이왕이면 엉망진창으로 자르면 더 좋고.”

“머리카락을……, 말입니까?”

제 몸을 끔찍이 여기는 제플린이 레베카 하나 속이겠다고 머리카락을 쉬이 내줄 리는 없었다.

거의 불가능한 임무였다. 여기서 물러나면 적당히 패물을 쥐여주고 내보낼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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