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하겠습니다.”
하지만 칸나는 찰나의 생각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리베르타의 사람 중에서도 칸나는 정말 뭐든지 했다. 암살도 제 뜻에만 맞는다면 서슴없이 수행했다.
백작저의 하녀, 특히 레베카의 직속 하녀는 아무나 뽑지 않았다. 출신보다는 출중한 재능이 우선이었다.
때문에 칸나는 오랜 세월 동안 언젠가 제플린의 귀에 자신의 이름이 들어갈 날을 기다리며 온갖 일을 해왔다.
그때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주 쉬웠다.
레베카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칸나의 대답에 움찔했다.
칸나의 눈빛은 어렸을 때처럼 반짝였다.
머뭇거리다가 레베카는 입을 열었다.
“만약, 정말 칸나 네가 내 편이라면…….”
“전 레베카 님의 편입니다.”
따뜻한 말이었다.
레베카는 싱긋 웃었다.
“줄 수 있는 건 많이 없겠지만 나도 네 편이 되어주마. 그러니까 칸나, 날 배신하지 마렴.”
칸나는 슬퍼졌다.
레베카는 절박해 보였다.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아프게 와 닿았다.
동시에 화가 났다.
칸나의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야 할 사람은 레베카여야만 했다.
톡톡-
무언가 창문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칸나가 흘깃 보니 검은 고양이가 창가에 서 있었다.
검은 고양이를 발견한 레베카는 서둘러 칸나를 내보냈다.
칸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레베카의 말을 따랐다.
“휴우.”
레베카는 방문에 귀를 대고 인기척이 없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자 레베카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 창가로 다가갔다.
고양이는 참을성 있게 창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 기다렸지? 네가 레오구나.”
창문이 열리자 레오는 나른하게 하품을 길게 하고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
호기심 있게 이곳저곳을 살피는 레오의 목에는 작은 함이 달린 목걸이가 매여 있었다.
레베카는 레오에게 물을 따라주고, 함에 들어 있던 쪽지를 꺼내 들었다.
쪽지에는 간결하고 힘 있는 문체로 한마디가 적혀 있었다.
<일단 만나서 이야기하지.>
어딘가 율리안스러운 대답이었다.
확답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의 흥미를 끄는 데는 성공한 셈이다.
레베카는 기쁨에 환호성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자축하긴 일렀다.
레베카는 심사숙고한 다음 종이에 글자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곤 작게 쪽지를 접어 다시 함에 넣었다.
레오는 레베카가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의 다리에 몸을 비벼왔다.
레베카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레오를 쓰다듬었다. 갸르릉거리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왔다.
“아주 중요한 쪽지니까 정확히 전달해줬으면 좋겠어.”
레오가 레베카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레오는 훌쩍 창문을 타고 넘어갔다.
모든 고양이는 신의 자식이라 했던가. 신의 자식의 우두머리 격인 레오는 정말로 영리한 고양이었다.
* * *
<이번 주 수요일 세 시에 리베르타 구휼원으로 와주십시오. 최대한 허름한 차림으로 은밀하게 오셔야 합니다.>
“나보고 오라가라하다니, 재밌는 여자야.”
율리안은 레베카가 쓴 쪽지를 읽고서 피식 웃음을 흘렸다.
“레오, 수고했어. 피곤하겠네.”
율리안이 무릎을 치며 레오를 불렀다.
레오는 짐짓 그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지금 심부름 한 번 시켰다고 그렇게 삐진 거야?”
레오는 말없이 그를 등지고 엎드렸다.
율리안은 기가 찬 눈으로 레오를 바라봤다. 영혼이 묶인 고양이와는 생각을 공유할 수 있었다.
다만 상대방이 원치 않는다면 억지로 읽을 수는 없었다.
율리안은 집중해서 레오의 생각을 읽으려 했지만, 레오는 그의 침입을 막았다.
“레오, 어쩔 수 없다고. 이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 너도 잘 알잖아. 다른 고양이한테 시킬 순 없었어.”
율리안은 끙 소리를 내며 이마를 짚었다. 평소에는 쾌활한 레오였지만 한 번 삐지면 풀기가 힘들었다.
‘그 여자, 그때 그 아이와 닮았어.’
순간 레오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레베카의 쪽지를 살피던 율리안은 멈칫하고 레오를 바라보았다. 그가 그때의 일을 꺼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말도 안 돼. 거긴 외딴 숲속이야. 그 여자 봤잖아. 태어나서 수도를 떠난 적도 없어 보이던데.”
‘난 그냥 느낀 대로 말했을 뿐이야. 어쨌든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그럼 다행이다만. 그런데 너, 정말 괜찮겠어? 그 여자의 말이 진짜라면 저주를 풀 수 있어. 그럼 넌…….”
‘괜찮아. 어차피 한 번 버려진 인생이야.’
“넌 꼭 말을 그렇게…….”
‘말 다 했으면 이만 갈게.’
말을 마친 레오는 일어서서 도도하게 걸어 나갔다. 그의 뒤를 검은 고양이 세 마리가 뒤따랐다.
생각을 공유하면서도 대체 저 자그마한 머릿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레베카, 그녀도 그런 점에서 레오와 비슷했다.
이혼을 하겠다니. 그것도 모자라 자신과 결혼까지 하겠다고?
황당한 이야기였지만 동시에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기는 했다.
슬슬 신전에서 연통이 오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안부만 묻는 서신이 전부이긴 했다. 그러나 조금 있으면 신의 사자를 돌볼 후계자를 낳으라는 독촉이 시작될 것이다.
신전에 있어서 이혼녀라는 사실은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데프리아교는 혼인 관계에 있어서는 비교적 자유로웠다.
일부다처제나 일처다부제든 상관없었다. 이혼도 다른 나라에 비해서 유한 편이었다.
국교의 교리는 그러했지만 그래도 대놓고 두 번째 부인을 들이는 경우는 드물었다.
쾌락의 자유를 중요시하는 데프리아교였지만 로탄더스의 전통적인 문화는 보수적인 편이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각종 쾌락적인 일을 즐기기는 했으나 대놓고 드러내는 건 꺼려했다.
체면을 중요시하는 전통과 자유를 추구하는 신앙심이 기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렇기에 요하네스 공작가처럼 후계 문제가 얽혀 있지 않은 이상 대부분의 불륜은 애인 정도로 그쳤다.
제플린이 특이한 경우였다. 십 년 동안 아이가 없었다고는 하나 레베카는 아직 젊었다.
첫째 부인이 아직 젊은데도 후처를 들인다는 건 첫째 부인을 대놓고 무시하는 처사였다.
‘그 새끼는 이혼당해도 싸지.’
옛 생각이 떠올라 율리안은 미간을 좁혔다.
제플린은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병약한 어머니 때문에 율리안은 거의 유모의 손에서 컸다.
유모는 이민자 출신에 투박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유년 시절의 행복했던 몇 안 되는 기억에는 언제나 유모가 있었다.
그런데 제플린은 그런 유모를 무시했다. 그녀에게 대놓고 더럽다고 소리쳤다.
‘인간 말종 같은 놈.’
율리안은 레오가 말해준, 어젯밤 백작저에서 있었던 일을 상기했다.
제 아내에게 벌을 준다는 개념 자체만으로도 황당한 마당에. 그 벌이란 게 눈앞에서 아끼는 사람을 채찍질하는 거라니.
얼마나 악랄한 짓인가.
그것 말고도 얼마나 더한 일을 겪었을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하. 이제야 시체처럼 다니던 게 이해가 가는군.”
율리안은 연회장에서의 레베카를 떠올렸다.
지난밤 숲속에서 봤던 그녀의 얼굴은 헛것이 아니었다.
레베카는 지금까지 율리안이 봐왔던 그녀가 아니었다. 눈은 올곧게 빛나고, 말에 힘이 있었다.
꼭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율리안은 레베카를 생각했다.
그녀의 가냘픈 목선과 폭포처럼 흘러내리던 빛나는 금발. 부드럽지만 강단 있는 음성. 그리고 놀라울 만큼 얇았던 허리.
‘들어 올렸을 때 엄청 가벼웠었지.’
여자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사람이라면 가질 수 없는 가벼움이었다.
‘굶기는 게 분명해.’
율리안은 혀를 끌끌 차며 레베카가 공작 부인이 된다면 일단 밥부터 먹여야겠다고 다짐했다.
율리안은 타고난 미식가였다. 요하네스 공작가에는 제국에서 가장 솜씨 좋은 요리사들이 여럿 있었다.
* * *
제플린 데본셔 백작의 아침은 항상 똑같이 흘러갔다.
오전 6시에 하녀가 들어와 커튼을 젖히고 세숫물을 두고 조용히 사라졌다.
눈을 뜬 제플린은 아침 햇살을 만끽하다가 간단한 세안을 마치고 향수를 가볍게 뿌린 다음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침실과 이어진 거울의 방에 들어가 정확히 한 시간 동안 거울 의식을 치렀다.
사면이 거울인 방 안에서 제플린은 헐벗은 채로 자신의 온몸 구석구석을 살폈다.
모든 미의 산물을 사랑하는 그는 인간, 특히 아름다운 여성을 최고로 쳤다.
하지만 이례적으로 그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남자가 있었다.
그건 바로 자신, 제플린 데본셔였다.
대대로 데본셔 백작 부인의 자리는 미인만이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런 강박적인 혈통의 결정체가 바로 제플린이었다.
그의 금발이 부드럽게 휘날렸다. 옅은 하늘빛 눈동자는 햇빛이 부서지는 물결을 연상하게 했다.
전체적으로는 미소년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높게 솟은 콧대와 강인한 입매는 단단한 사내의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섬세하게 조각된 것 같은 그의 몸도 아름다움에 일조했다.
제플린은 기분 좋게 허밍을 부르며 여느 때처럼 거울 방으로 들어갔다. 우중충했던 어제와 달리 오늘은 날씨가 무척 좋았다.
아름다운 두 명의 부인과 피크닉이라도 가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햇볕에 얼굴이 타면 안 되니 특수 제작한 파라솔을 챙겨야 했다.
머리를 쓸어올리며 거울을 쳐다보던 제플린은 멈칫했다.
아직 잠이 덜 깬 건가 싶어 방을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다.
“아아아악!”
끔찍한 고함이 거울에 반사되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제플린의 기사들이 허겁지겁 뛰어 들어왔다.
“백작님! 무슨 일이십니까?”
“내 머리……, 내 머리가!”
귀밑에서 찰랑거려야 할 그의 금발이 형편없이 잘려져 있었다.
제플린의 더벅머리를 본 한 기사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웃음을 참으려고 필사적으로 입 안쪽 살을 깨물었다.
“누구야! 어떤 새끼가 이런 짓을 한 거야! 너야?”
제플린은 웃음을 참고 있는 기사의 멱살을 붙잡았다. 건장한 그가 제플린의 손에 속절없이 끌려갔다.
“아,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감히…….”
제플린의 살기 어린 눈동자를 보고는 기사는 다시는 웃지 않았다.
그의 관자놀이를 타고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어제 경비 섰던 새끼들 다 불러와!”
* * *
레베카는 위층의 소란에 문을 살짝 열었다.
제플린의 흥분한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알리시아도 궁금했는지 방문 밖을 나와 위를 쳐다보고 있었다.
지나가던 하인을 붙잡고 자초지종을 묻던 알리시아는 레베카와 눈이 마주치자 허겁지겁 문을 닫고 들어갔다.
그 꼴을 보던 레베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제플린이 연회장에 레베카만 데려간 이후로 알리시아는 비교적 얌전하게 지냈다.
분명 뭔가 꿍꿍이가 있을 터였다.
레베카는 그 꿍꿍이가 무엇일지 어렴풋이 예상이 갔다.
제플린의 비명을 기분 좋게 음미하다가 레베카는 방으로 들어왔다.
협탁 위에 작은 나무 상자가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