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뚜껑을 여니 뭉텅이로 잘린 금색 머리카락 더미가 보였다.
못하는 일이 없다고 하더니, 칸나는 정말 실력이 좋았다.
제플린이 범인을 영영 못 찾고 엉뚱한 사람에게 화풀이만 해댈 게 눈에 선했다.
레베카는 억울하게 제플린의 미움을 받게 된 사람을 생각하니 조금 양심의 가책이 들었다.
운이 나쁘다면 흠씬 두들겨 맞고 쫓겨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제플린의 사냥개가 새로운 사람으로 채워질수록 레베카에게 더더욱 좋은 일이었기에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새로운 사냥개를 길들이기까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직 충성심이 그리 크지 않은 사냥개가 레베카의 편이 되어 줄지 그 누가 알겠는가.
레베카는 침대 매트리스 밑에 상자를 넣었다.
“아, 일어나셨습니까?”
칸나가 간단한 아침 식사와 세숫물을 들고 들어왔다. 그리고 협탁 위에 상자가 사라진 것을 보더니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일을 잘해주었더구나.”
“아닙니다. 간단한 일이었습니다.”
“이제 자격은 충분히 증명한 것 같네. 오늘 외출할 것 같으니 채비를 좀 해주겠어?”
“옷은 어떤 걸로 준비할까요?”
레베카는 갓 구운 따끈한 빵 한입을 베어 물고는 싱그럽게 웃었다.
“가장 허름한 옷으로.”
* * *
볕이 잘 드는 식당에는 식기를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이따금 분을 못 이긴 제플린이 거세게 상을 내리치는 소리만 들려왔다.
가장 상석에는 제플린이 앉아 있었고, 레베카는 그를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다만 알리시아는 왼편에 앉았다.
‘왜 나는 손님 취급인 거지.’
알리시아는 신경질적으로 자그마한 스테이크를 썰었다.
정식으로 부인이 됐건만 고용인들도 그렇고 제플린까지 객식구 취급을 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레베카가 주는 돈을 받고 도망가는 게 나을 뻔했다.
‘아니지, 아니야. 여기까지 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데.’
알리시아는 레베카의 행색을 흘깃 훑었다.
평소와 달리 수수한 옷차림이었지만 그것 또한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기품이 넘쳐흐르는 레베카를 보며 알리시아는 손톱을 뜯었다.
“한 그릇 더 줘.”
최근 식욕이 왕성해진 알리시아는 스테이크 한 접시를 금방 비우고 손을 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제플린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만 먹어. 너 요새 살쪘어.”
“임신부는 음식을 충분히 섭취해야 하는 거 아시잖아요.”
“넌 평민이라서 모르나 본데, 귀족은 아이를 가져도 그렇게 무분별하게 먹지 않아. 알리시아, 뚱뚱해지면 내쫓을 줄 알아.”
“백작님!”
“시끄러워. 아무래도 신경 거슬려 죽겠는데. 레베카를 봐. 얼마나 우아해. 좀 보고 배우라고. 몇 번을 말하는지, 원. 이래서 평민은…….”
고작 스테이크 한 접시였다. 백작 부인이 되었건만 그것조차 제 마음대로 못 먹었다.
그리고 평민이라는 말은 이제 지긋지긋했다.
알리시아는 시뻘게진 얼굴로 레베카를 쳐다봤다. 아이를 가진 건 자신인데 레베카의 입지는 여전했다.
알리시아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레베카는 태연하게 포크를 놓고 입을 닦았다. 그리고 제플린에게 살포시 다가갔다.
발소리 하나 나지 않는 군더더기 없는 몸짓에 알리시아는 더욱더 열이 뻗쳤다.
“제플린, 너무 그러지 마요. 알리시아는 당신의 첫 아이를 가졌잖아요. 좀 더 먹게 하는 게 어떨까요?”
레베카는 사근하게 웃으며 은근히 그의 팔을 매만졌다.
제플린이 움찔하며 레베카의 손길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우리 아이가 생기지 않아 죄스러웠어요. 그러니 알리시아의 아이만큼은 튼튼하게 컸으면 좋겠어요.”
레베카는 눈을 내리깔았다.
제플린은 레베카의 떨리는 속눈썹을 보면 항상 마음이 약해졌다.
“좋아. 반 접시 정도 더 가져다줘.”
“안 먹어요!”
알리시아는 나이프를 집어 던졌다. 빈 접시가 요란하게 울렸다.
굴욕적이었다.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첩은 사랑받아야 하지 않는가. 질투에 눈이 멀어 패악을 부리는 건 본부인에게나 어울렸다.
볼멘 얼굴로 레베카를 노려보는 알리시아에 제플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알리시아!”
레베카는 제플린의 팔을 한 번 더 매만졌다.
부드러운 손길에 제플린은 잠시 주춤했다.
“너무 열 내지 마세요. 임신하면 예민해진다잖아요. 그나저나 당신, 머리가 이렇게 된 김에 아예 짧게 자르는 게 어때요?”
“머리를 자르라고?”
“네. 예전부터 생각했는데, 짧은 머리도 잘 어울릴 것 같아서요. 좀 더 남성미가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당신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레베카가 눈웃음을 지었다.
제플린은 어느새 넋 놓고 그녀의 모습을 보았다.
레베카는 그를 잘 알았다. 지금 어떤 부탁을 해도 그는 들어줄 것이다.
“오늘 잠시 외출할까 하는데, 허락해 주시겠어요?”
“어디로?”
외출이란 말에 제플린은 인상을 찌푸렸다.
레베카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그의 팔을 주물렀다.
“구휼원이요. 정기적으로 갔는데 요새 좀 뜸한 것 같아서요.”
“그래서 그런 이상한 옷을 입은 거야?”
“네. 마음에 안 드세요? 아무래도 굳이 차려입고 갈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요.”
“그렇지. 애먼 놈들한테 눈길을 끄는 것보다는 거지꼴로 다니는 게 더 낫겠어. 그래, 갔다 와.”
알리시아는 기가 찬 눈으로 레베카의 행동 하나하나를 쳐다봤다.
저런 행동은 자신이 여급으로 일할 때 팁을 한 푼이라도 더 받기 위해 했던 짓이었다.
레베카가 하니 조금 달라 보였지만 어쨌든 근본은 천박한 짓이었다.
‘이럴 줄 알았지. 역시 곰인 척하는 여우였어.’
레베카는 식당을 나섰다. 그리고 나서기 전에 알리시아를 향해 슬며시 비웃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곧 식당 쪽에서 접시가 세차게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알리시아가 집어던진 모양이다.
레베카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젠 당신이 놀아날 차례야. 제플린 데본셔.’
* * *
“공작님! 이 로브랑 저 로브 중에 뭐가 더 마음에 드시나요? 브로치는 이게 좋겠죠?”
크로아가 로브와 장신구들을 늘어놓고 율리안에게 말했다.
율리안은 읽던 책에서 눈을 떼지도 않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허름하게 하고 오라고 했잖아. 아무런 장식도 없는 로브면 충분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공작가의 체면이 있지요. 게다가 언제부터 남의 말을 그렇게 잘 들으셨어요? 그 여자의 협박에 이리 쉽게 넘어가시다니.”
“그 여자라니. 말조심하지. 공작 부인이 될 사람이야.”
크로아는 기가 막혀서 입만 뻐끔거렸다.
율리안은 연회에 돌아온 뒤부터 레베카가 마치 공작 부인이 된 것처럼 굴었다.
어제는 온종일 전 공작 부인의 웨딩 베일을 찾느라고 넓은 공작 성을 다 뒤졌더랬다.
“흠. 그래도 머리 정도는 손질하고 가는 게 낫겠어.”
율리안은 책을 소리나게 덮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거울을 보며 머리를 이리저리 넘겼다.
꽤 즐거워 보이는 모습에 크로아는 할 말을 잃었다. 여태껏 첫사랑 한번 해본 적 없는 순진한 공작이었다.
반면에 레베카는 남자 다루기에 능숙한 미모의 여성이었고.
크로아는 율리안이 이용당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 부인이 그렇게 예뻤습니까? 네? 말도 안 되는 말에 그렇게 홀라당 넘어가 버리실 만큼요!”
머리를 매만지던 율리안이 멈칫했다.
크로아의 얼굴을 빤히 보던 율리안의 입가에 돌연 장난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설마 지금 질투하는 건가? 네 취향이 그런 줄 짐작은 했다만. 크로아,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임자 있는 몸이라. 게다가 우리는 나이 차가 좀 많이 나지 않나?”
“대체 뭔 소릴 하시는 거세요! 저는 그저 자나 깨나 순진한 공작님을 걱정하고 있는 충신일 뿐입니다! 그 레베카인지 뭔지 여튼 그 부인, 뭔가 수상합니다. 꿍꿍이가 있을 거라고요.”
율리안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더니 크로아를 빤히 쳐다봤다.
“진짜로 내가 순진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크로아는 찔끔하며 고고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율리안을 올려다봤다.
유약하고 예민한 성미였던 역대 공작들과는 달리 율리안은 대담한 면이 있었다.
타고난 듯 그는 어릴 때부터 과묵했다.
애답지 않게 그는 울지도 않고 떼 한번 쓰지 않았다.
항상 화가 난 얼굴로 입을 앙다물고 매서운 눈을 치켜뜨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크로아의 눈에는 그 모습이 금방 깨질 것처럼 위태로운 유리 조각 같아 보였다.
크로아는 그런 그가 항상 마음에 쓰였다.
그렇기에 그는 레베카를 더더욱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공작님을 상처 입히면 가만 안 둬.’
* * *
크로아는, 따지자면 율리안의 먼 친척이었다.
하지만 고귀한 요하네스의 성은 여신의 선택을 받은 후계자만이 물려받을 수 있었다.
요하네스의 성을 물려받는 대신 크로아의 선조들은 요하네스 공작의 집사가 되기로 했다.
대대로 크로아의 집안은 공작가에 내린 저주를 풀 방법을 오랫동안 찾아왔다.
크로아는 선조들도 찾아내지 못한 걸 생판 처음 보는 외부인이 알고 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그것도 태어나서 고생이란 걸 해본 적 없을 것 같은 그 레베카 데본셔면 더더욱.
그녀의 사정이 딱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왜 하필 우리 공작님을 꼬드기냔 말이야.
크로아는 이 꺼림칙한 계약 결혼을 뜯어말리고 싶었지만 율리안이 결심한 이상 말릴 방법이 없었다.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네가 왜.”
“공작님의 냉철한 두뇌가 돼야지요.”
“지금 네가 나보다 영특하다고 하는 건가? 크로아, 오늘따라 굉장히 거슬리게 하는군.”
“공작님은 머리보다 몸이 먼저 나가는 건 본인도 잘 아시잖아요. 저번에도 열 받아서 상단주의 이 하나를 부러뜨리셨으면서. 저는 그 백작 부인…… 아니, 레베카 님의 신변이 걱정돼서 가는 거라고요.”
크로아는 뻔뻔한 태도로 율리안이 입은 것과 똑같은 밋밋한 갈색 로브를 뒤집어썼다.
율리안은 기가 차서 혀를 찼지만 딱히 막아서진 않았다.
자신이 레베카에게 손댈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은근슬쩍 걱정이 들었다.
‘유모가 항상 성질 좀 죽이라고 소리치고는 했었지.’
율리안은 대답 대신 침묵으로 크로아의 동행을 허락했다.
크로아는 거울 앞에 서서 머리에 왁스를 조심스럽게 바르는 율리안을 바라봤다.
로브를 뒤집어쓰면 어차피 엉망이 될 머리인데 왜 저렇게 열성인지 모를 일이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그 여자의 속셈이 뭔지 제대로 파악해야겠어.’
* * *
구휼원으로 가는 마차 안에서 레베카는 공작가에 내린 저주에 대해 생각했다.
레베카가 요하네스가의 저주에 대해 알게 된 건 정말 우연이었다.
이전 생에선 백작가에서 도망치자마자 잠시 구휼원에 숨어 살았다. 그리고 거기서 크로아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