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14화 (14/232)

14.

크로아는 거지꼴로 구휼원 앞에 쓰러져 있었다고 했다.

그는 말끝마다 자신이 요하네스가의 집사라고 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당연했다. 그의 행상은 몇 년간 밖에서 노숙하던 사람의 것이었으니, 그가 고귀한 요하네스 가의 사람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종종 그는 알 수 없는 헛소리를 해댔기에 미치광이 취급까지 받았다.

레베카가 구휼원에 숨어들었을 즈음은 기근으로 빈민들이 갑자기 늘어났던 때였다.

그 탓에 구휼원은 한창 인력난으로 허덕이고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리베르타의 사람들은 곱게 자란 레베카가 험한 일을 하는 걸 원치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레베카는 일을 하기 원했다.

결국 그녀의 고집이 이겼다.

레베카는 모두가 대하기 꺼려하던 크로아를 간호하기로 했다.

크로아는 종종 공작의 측근이 아니라면 알 수 없는 일화들을 은연중에 흘리곤 했다.

때문에 레베카는 점차 그가 진짜 요하네스가의 집사였다는 사실을 믿기 시작했다.

당시 율리안은 오랫동안 병석에 있었다. 그래도 역대 요하네스 공작에 비하면 오래 산 편이라고 했다.

하지만 공작의 심복이던 크로아는 그를 포기하지 않았다.

크로아는 공작의 병을 고치기 위해 전국을 떠돌아다녔다. 그러다가 그만 미쳐버렸다.

그는 자신을 지극정성으로 간호해주는 레베카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가 하는 말은 대부분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가끔 크로아는 흥미로운 공작가의 비밀을 그녀에게 말하곤 했다.

공작가와 데프리아 여신의 저주, 공작이 그 저주를 억지로 끊으려고 하다가 병석에 누웠다는 사실, 공작이 끝까지 정체를 숨기고자 했던 하나뿐인 여동생의 이야기까지.

크로아는 종종 말을 하다 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통곡했다.

‘어흐흑. 불쌍한 우리 공작님. 동정으로 돌아가시다니. 이렇게 통탄할 수가 있나! 제가! 이 크로아가! 저주를 풀어드리겠으니……, 커헉, 컥…….’

한 가지 이상한 점은 그가 저주를 푸는 방법을 언급할 때마다 피를 토한다는 점이었다.

마치 말한다는 사실 자체에 저주를 받은 것 같았다.

그래도 레베카는 그를 성심성의껏 돌봤다.

그런데 어느 날 크로아가 열병에 걸렸다. 치솟는 열은 가라앉지 않았다.

크로아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소리쳤다.

‘나, 나는 알아버렸어. 공작가를 구원할 방법을……. 하지만 그 대가로 여신의 분노를…… 그 방법은……!’

크로아는 레베카의 어깨를 붙잡고 저주를 푸는 방법을 줄줄 읊기 시작했다.

서너 번이나 똑같은 말을 반복하던 그는 피를 왈칵왈칵 쏟아내더니 곧 숨이 끊어졌다.

크로아가 죽은 후 레베카는 그가 말했던 비밀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공작가에 알리려고 했다.

하지만 레베카는 제플린을 피해 다니느라 도저히 공작가로 갈 수가 없었다.

아이를 가진 몸으로 도망 다니면서 먹고사는 일은 녹록치 않았다.

허덕이는 삶 속에서 레베카는 요하네스 공작을 차츰 잊어갔다.

그리고 산달이 다가왔다.

아이를 낳은 뒤로는 아이를 돌보고 돈을 버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치열한 삶을 살다 레베카는 제플린의 손에 죽었다.

‘내가 조금만 용기를 냈더라면…….’

가슴께가 찌르르 아파왔다.

제플린이 공작의 장례식에 간다고 했던 게 어렴풋이 기억났다.

제국에서 공작은 단 두 명이었다. 기억상 라트라니스 공작은 그 당시 기운이 펄펄 넘쳤다.

병석에 있던 공작은 율리안뿐이었다.

‘그렇게 오랜 소원을 끝내 이루지 못한 채 결국 율리안은 죽었구나.’

레베카는 율리안의 당당한 걸음걸이와 오만한 눈빛을 떠올렸다. 도무지 병석에서 최후를 맞이할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크로아가 제멋대로 떠들어댄 걸 듣기만 한 것이었는데도 레베카는 율리안에게 커다란 빚을 진 기분이 들었다.

한마디만 했었더라도, 하다못해 서신이라도 썼더라면 공작가의 드리운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그걸 빌미로 그를 이용하는 것도 못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마지막 지푸라기였다. 레베카는 그 지푸라기가 간절하게 필요했다.

“레베카 님, 거의 다 도착했습니다.”

칸나가 마차의 커튼을 살짝 젖히며 말했다.

곧이어 마차의 문이 열렸다.

“레베카 님!”

리베르타의 식구들이 모두 나와 레베카를 맞이했다.

따뜻한 환대를 받으며 레베카는 발을 내디뎠다.

푸른 하늘 아래 우뚝 서 있는 리베르타 구휼원이 눈에 들어왔다.

* * *

“다들 잘 지냈어요?”

“레베카 님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다들 밀린 이야기를 레베카에게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모양이었다.

레베카는 쉴 새 없이 재잘거리는 리베르타 식구들을 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와아……, 진짜 예쁘다.”

그러곤 입을 헤 벌리고 레베카를 바라보고 있는 꼬마 하나를 발견했다.

이제 일곱 살쯤 되었을까. 갈색의 바가지 머리가 귀여운 아이였다.

“못 보던 아이인데. 새로 왔니?”

레베카가 아이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구휼원의 원장 글로리아가 그 모습을 보고 싱긋 웃었다.

“새로 온 게 아니라 마가렛의 아이입니다.”

“잭이에요!”

잭이 손을 번쩍 들고서는 자기 이름을 소개했다.

마가렛의?

레베카는 눈을 크게 떴다.

잭이라면 이전 생에서도 알고 지내던 아이였다.

크로아가 죽고 레베카가 구휼원을 나가 일했던 곳이 바로 마가렛의 라본느 살롱이었다.

솜씨 좋은 파티시에였던 마가렛의 살롱은 연신 큰 호황을 이루었다. 거기서 큰 역할을 했던 게 이 아이였다.

잭은 사람들을 기가 막히게 끌어들이는 재주가 있었다.

그땐 꽤 준수한 청년이었는데, 이렇게 어린 그를 보니 레베카는 감회가 남달랐다.

“잭! 잭! 내가 함부로 뛰어가지 말라고 했잖니!”

뒤이어 마가렛이 뛰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마가렛은 사람들에 둘러싸인 레베카를 보더니 멈칫했다.

“레베카 님께 인사드립니다.”

그리고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다.

어느 몰락한 귀족 집안의 여식이라고 했던가. 그녀의 인사는 흠잡을 곳 없이 깔끔했다.

마가렛은 다른 리베르타 사람들과 다르게 레베카에게 데면데면했다.

그건 이전 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웃다가도 레베카를 보면 금세 얼굴을 굳히고는 했다.

레베카를 주방 보조로 고용한 걸 보면 딱히 악감정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녀에겐 언제나 보이지 않는 거리감이 있었다.

리베르타 사람들과 한창 수다를 떨던 레베카에게 글로리아가 속닥였다.

“레베카 님, 손님은 벌써 오셔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레베카가 고개를 끄덕이자 글로리아가 손뼉을 쳤다.

“자자, 레베카 님 귀찮게 하지 말고 다들 할 일 하러 가세요!”

글로리아의 축객령에 다들 못내 아쉬운 소리를 해댔다.

레베카가 가기 전에 꼭 다시 인사를 하겠노라고 약조를 하고 나서야 리베르타의 사람들은 겨우 흩어졌다.

모두가 사라지자 레베카가 글로리아에게 돌아서서 말했다.

“고마워요. 아, 다과는 저희가 준비해 왔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요새 제플린이 후원금을 줄였다고 들었어요. 미안해요.”

“아닙니다. 레베카 님 잘못도 아닌데요. 걱정하지 마세요. 귀족분들이 먹는 비싼 과자는 아니더라도 마가렛이 직접 만든 쿠키로 준비했어요.”

“마가렛이 만든 거면 맛은 확실히 보장되었겠군요. 그럼 더 사양하지 않을게요.”

레베카가 싱긋 웃자 글로리아의 주름진 얼굴이 활짝 폈다.

그녀는 레베카에게 자그마한 도움이라도 줄 수 있어 퍽 기쁜 모양이었다.

“그럼 이쪽으로.”

레베카는 글로리아를 따라가면서 제플린이 호위 명목으로 붙여준 로버트를 흘깃 보았다.

칸나가 넌지시 일러준 바에 의하면, 그는 몇 달 전부터 레베카의 사냥개로 배정되었다고 했다.

생각해보면 이전 생에서도 레베카의 반경 안에는 항상 로버트가 있었다.

제플린이 내린 명령으로 레베카의 곁에 있었을 뿐인데 흠모한다는 터무니없는 누명을 써서 죽여버리다니.

‘아마 쓸 만큼 쓰고 버렸던 거겠지.’

레베카는 조금 측은한 마음으로 로버트를 쳐다봤다.

하지만 눈을 마주친 그가 레베카를 향해 싱긋 웃자 다시 생각을 다잡았다.

사람 좋게 웃고 있었지만, 그는 레베카의 일거수일투족을 꼼꼼하게 지켜보고 있을 터였다.

그는 지금 적이었다.

레베카가 구휼원을 방문할 때를 제외하고는 구휼원에는 사냥개가 없었다.

집 밖에서 기어 다니는 벌레를 신경 쓰지 않듯 제플린은 구휼원에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통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래서 레베카는 다른 구휼원 식구들 모르게 글로리아에게만 넌지시 손님이 방문할 거란 말을 흘렸다.

글로리아는 율리안을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친척 정도로 알고 있을 것이다.

제플린이 평소에 레베카의 외출을 엄격하게 관리한 걸 알았으니 글로리아도 이 은밀한 만남을 쉽게 납득했다.

율리안의 정체가 누군지, 목적이 뭔지는 칸나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칸나를 믿지 못한다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아직은 조심해야 할 단계였다.

레베카가 헛기침하자 칸나가 눈치껏 로버트에게 다가갔다.

“여기 스콘이 아주 일품인데 드시러 가지 않겠어요?”

“스콘 좋지! 혹시 커피도 있을까?”

의외로 로버트는 순순히 칸나를 따라갔다. 그는 콧노래를 부르기까지 했다.

태연한 모습이 오히려 더 수상쩍었다.

레베카는 로버트의 뒷모습을 잠시간 응시했다.

그는 이따금 레베카에게 할 말이 있는 듯 그녀를 보면서 입을 벙긋거리고는 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말이 흘러나오는 경우는 없었다.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내였다.

“레베카 님!”

글로리아가 손짓했다.

레베카는 숨을 한번 깊게 들이마시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 * *

“무례합니다! 감히 공작님을 기다리게 하다니요!”

크로아는 초콜릿이 박힌 쿠키를 우적우적 먹으면서 불만을 토로했다. 그리고 갑자기 목이 막혔는지 연신 콜록거리며 가슴께를 두들겼다.

율리안은 인상을 찌푸리며 크로아에게 차를 건넸다.

“그렇게 불평만 해댈 거면 왜 따라왔어. 게다가 불평만 늘어놓는 것 치고는 너무 잘 먹는 것 같은데.”

크로아는 차 한잔을 벌컥벌컥 마시더니 숨을 돌렸다. 그리고 한숨을 폭 내쉬었다.

“정말, 정말로 이 말도 안 되는 계약을 맺으실 생각이세요?”

율리안은 크로아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시선을 내렸다.

“썩 나쁜 조건은 아니잖아.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꾼들의 소문을 모으는 거나, 수상한 여자와 계약 결혼을 하는 거나 신뢰할 수 없다는 점에선 다를 게 없어. 크로아, 난 이 빌어먹을 저주만 끊어낼 수 있다면 뭐든지 할 거란 걸 잘 알고 있잖아.”

“부인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요? 그럴 가능성이 크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율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크로아를 향해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끌어올렸다.

익살맞은 그 미소에 크로아는 잠시 주춤했다.

“속아주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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