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네?”
크로아의 반문에 율리안은 자그맣게 신음을 내며 딱딱한 의자에 등허리를 기대었다.
“나는 여태껏 한 가지 목표만을 위해 살아왔어. 솔직히 말하면 이제 조금 지쳤어. 자그마한 희망에라도 기대고 싶은 심정이야. 레베카, 그 여자를 완전히 믿는다는 건 아냐.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믿지 않을 이유도 없더군. 그 여자가 우릴 이용하는 것처럼 우리도 이용하면 되는 거야. 적어도 그 여자와 혼인 관계를 유지하는 동안은 다른 죄 없는 여자가 희생하는 일은 없을 거 아니야.”
“…….”
그래도 크로아는 탐탁지 않은지 입을 꾹 다물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율리안이 느긋하게 다리를 꼬았다.
“대체 뭐가 그리 걱정인지 모르겠군. 잊었나 본데, 나는 요하네스 공작이야. 어리고 잘생기고 돈까지 많지. 황제도 내 앞에서는 어쩌지 못해. 몇 년 동안 그녀의 손에 놀아난다 해도 내게 치명적인 결과가 생길 거라 생각해? 그저 짧은 찰나의 유희였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야. 그리고…….”
율리안은 크로아를 빤히 쳐다봤다.
“내가 속고 있는 동안 네가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잖아. 내가 그녀에게 놀아나는 동안 크로아 네가 저주를 풀 방법을 찾아낼 거란 걸 믿고 있어. 그렇지 않나?”
무한한 신뢰가 담긴 시선이 집요하게 크로아의 얼굴을 응시했다.
크로아는 문득 율리안이 처음으로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의 순간을 떠올렸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조차 흘리지 않았던 그였다.
그런 율리안이 유모가 땅에 묻힐 때 커다란 눈물방울을 흘렸다.
거칠게 눈물을 닦던 소년은 크로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내 편은 너뿐이야. 크로아 체니스터.’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크로아가 어린 율리안을 보필했던 건 단지 가문의 업이라는 책임감에서였다.
하지만 그가 내미는 자그맣고 다부진 손을 잡은 이후로 크로아는 율리안에게 진심으로 충성을 바치기로 맹세했다.
짧은 생이더라도 그를 최대한 행복하게 만들어주리라 다짐했다.
크로아는 대답할 말을 골라내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겨우 끄덕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레베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 벌써 와 계셨군요.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니, 별로 기다리진 않았어.”
율리안은 인사와 함께 레베카의 차림새를 쳐다보았다.
화려하게 치장하지 않은 그녀가 조금 낯설어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평소보다 생기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율리안은 잠시 넋을 놓고 레베카를 바라보았다.
율리안에게 짧게 인사를 하던 레베카의 시선이 순간 붙박인 듯 멈춰 섰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을 탐색하는 크로아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붉은 기가 감도는 갈색 머리에 싱그러운 초록색 눈동자. 그리고 항상 쓰고 있던 동그란 안경까지.
젊어 보이긴 했지만 그는 레베카가 알고 있던 크로아였다.
순간 먹먹한 기분이 들어 레베카는 율리안이 앞에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크로아를 빤히 쳐다봤다.
그런 레베카의 노골적인 눈빛에 그녀를 노려보며 기선 제압을 하려 했던 크로아는 오히려 당황하고 말았다.
율리안은 심상치 않은 레베카의 시선을 느끼고는 그녀에게 물었다.
“둘이 아는 사이인가? 크로아, 설마 네가 공작가의 비밀을 레베카에게 흘린 건 아니겠지?”
율리안의 말에 크로아는 펄쩍 뛰었다.
“아니요! 하늘에 맹세코, 저는 오늘 저 부인을 처음 보았습니다!”
레베카는 아차 싶어 크로아를 바라보던 눈길을 거두었다.
오늘같이 중요한 날에 감정에 휩쓸리는 건 금물이었다.
레베카는 표정을 가다듬고 은은한 미소를 띠었다.
“그럴 리가요. 공작님, 저도 저분을 처음 뵙습니다. 입가에 쿠키 부스러기가 묻었기에 쳐다봤을 뿐입니다.”
레베카의 말에 크로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크로아는 입가를 손을 탈탈 털어내고 몰래 레베카를 흘겨봤다.
정말 마음에 들지 않은 여자다.
율리안은 그제야 찡그렸던 미간을 곧게 펴고는 웃었다.
“크로아, 그러게 작작 먹으라고 했잖아. 그래, 이제 레베카가 왔으니 크로아는 나가 있도록.”
“네?”
“따라와도 좋다고 했지, 계약하는 데 끼워주겠다는 말은 안 했어.”
“하지만 공작님!”
“명령이다. 우리는 지금 중요한 계약을 해야 하니 잠시 나가 있어.”
크로아가 반항하자 율리안이 눈을 치켜떴다. 그의 눈이 금안으로 변하기 직전이었다.
결국 크로아는 밖으로 내쫓기듯 나갔다.
자식 키워봤자 소용없다더니, 서러움에 눈물이 핑 돌았다.
‘우리라니! 공작님! 우리라는 표현은 저에게만 쓰셨잖아요!’
* * *
율리안은 매몰차게 문을 닫았다.
밖에서 크로아가 꿍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자리에 앉았다.
이곳에 도착한 내내 레베카의 흠을 잡느라 안달이 난 크로아였다.
율리안은 그를 데려온 걸 계속해서 후회했다.
크로아를 이 방에 계속 뒀다간 레베카와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사사건건 꼬투리를 잡을 게 분명했다.
생각만 해도 피로가 몰려왔다. 내쫓는 게 편했다.
율리안은 간소하지만 깔끔한 응접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군. 데본셔 백작가의 소유라고 했던가?”
“네. 제가 만들었지만 제플린의 소유지요.”
레베카는 씁쓸하게 웃다가 금방 얼굴을 폈다.
“하지만 곧 그것도 빼앗아 올 예정입니다.”
“좋은 생각이긴 하다만. 어떻게?”
레베카는 싱긋 웃었다. 그리고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런 사소한 일은 차차 이야기하도록 하죠. 일단 대략적인 계약서입니다.”
율리안은 말없이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글씨체가 꼭 레베카 같아서 잠시 웃음이 나왔다. 유려하지만 어딘가 경직되어 있었다.
<1 율리안 요하네스 공작은 레베카 데본셔의 이혼을 적극적으로 돕는다.
2 율리안 요하네스 공작은 데본셔 백작가를 무너뜨리는 레베카 데본셔의 계획에 최소한의 투자를 해야 한다.
3 타인에게 들키지 않는 선에서 상대방의 동의 없이 언제든 자유연애를 할 수 있다.
4 계약 기간은 제플린 데본셔 백작이 죽을 때까지이며 요하네스 공작이 위 사항을 모두 지켰을 경우, 레베카 데본셔는 요하네스 공작가의 저주를 풀어야 한다.>
짧은 내용이었지만 율리안은 꽤 오랜 시간 동안 계약서를 살폈다.
그가 계약서를 훑는 걸 기다리던 레베카는 초조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는데.”
“예, 말씀하세요.”
“이혼했으면 그만이지, 왜 백작가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거지? 제플린은 또 왜 죽여.”
“그저……, 개인적인 원한이라 말씀드리고 싶군요. 그것 또한 때가 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레베카는 넌지시 율리안의 눈을 피했다.
어차피 율리안과 자신은 필요에 의한 관계였다.
서로 원하는 것을 주고받으면 그만이니 굳이 내밀한 속 이야기까지 구구절절 말할 만큼 친밀하게 굴 필요는 없었다.
레베카는 더는 캐묻지 말라는 듯 말없이 차를 홀짝였다.
율리안은 한쪽 턱을 괴고는 레베카를 지그시 바라봤다.
‘다른 꿍꿍이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데…….’
율리안은 나이가 어렸지만 사람 보는 눈은 그 누구보다 정확한 편이었다.
그는 요하네스 가문에 연줄을 대려는 각종 모략가와 사기꾼들을 어릴 때부터 보아왔다.
‘봐라, 율리안. 저 사람은 방금 눈을 피했지? 뭔가 숨기는 구석이 있다는 의미란다.’
그의 어머니는 어린 율리안을 무릎에 앉혀 두고 아버지와 독대하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분석하며 사람 보는 눈을 길러주었다.
공작 부인의 사후에도 율리안은 처세술 위주로 교육을 받았다.
덕분에 열다섯이란 어린 나이에 공작이 되었어도 사기를 쳤으면 쳤지 당한 적은 없었다.
생각에 잠긴 율리안의 침묵이 길어졌다.
레베카는 조그맣게 헛기침을 하더니 말을 이었다.
“하지만 공작님께 해가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일종의 투자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일은 제가 다 할 테니 공작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더러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예. 손 더럽힐 일은 없을 겁니다. 그저 제게 공작 부인이라는 울타리와 금전적인 지원만 제공해 주시면 됩니다. 물론 공으로 받을 생각은 없습니다. 무엇을 빌려주시든 몇 곱절로 갚아드리죠. 데본셔 백작의 전 재산 정도면 되려나요?”
터무니없는 발언이었지만 어쩐지 율리안은 레베카가 해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근거는 없었다. 그저 본능적인 직감으로 느껴졌다.
자신의 근거 없는 믿음이 어이가 없어 율리안은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미친 건가? 아니면 저 여자가 이상한 주술이라도 쓰고 있다거나.’
게다가 여태껏 자기더러 무언가를 해달라는 사람은 많았어도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사람은 처음 봤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가 동했다.
“뭐, 좋아. 그대 말대로 난 손해 보는 게 없으니. 그나저나 한 가지를 고쳤으면 하는데.”
“네? 어떤……?”
“여기 3번 문항 말이야. ‘상대방의 동의 없이’란 부분이 좀 걸리는군. 어쨌든 부부가 된 마당에 그래도 다른 사람을 만나겠다면 동의는 받아야 하지 않겠나?”
레베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문항은 율리안을 위해 레베카가 나름 고심해서 쓴 것이었다.
레베카는 재혼이었지만 율리안은 초혼이었다.
게다가 크로아에게 듣자 하니 이전 생에서 혹여나 후계자가 생길까 봐 죽을 때까지 연애 한번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이젠 달랐다. 레베카가 저주를 풀 방법을 알고 있으니 그가 또래 영애들과 사랑을 싹틔워도 괜찮았다.
그리고 레베카가 알기론 남자들은 구속을 싫어했다.
제플린마저도 레베카가 질투를 하거나 다그치는 모습을 조금이라도 보이면 눈살을 찌푸리곤 했다.
곰곰이 율리안의 저의를 추리하던 레베카는 결론을 내렸다.
‘날 배려해 준 건가……?’
레베카는 이혼하는 이유를 그에게 제대로 알려준 적이 없었다.
그러니 율리안은 제플린의 외도를 이혼의 계기라 추측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의 불륜에 복수심을 품는 여자는 흔했다.
율리안은 레베카의 입장을 생각하고 배려하려는 게 틀림없었다.
레베카는 율리안의 의도를 지레짐작하고는 활짝 웃어 보였다.
“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지만 불편하시다면 그 조항은 바꿔보도록 하지요. 공작님은 생각보다 따뜻하신 분이셨군요.”
느닷없는 칭찬에 율리안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형식적인 결혼이라 하더라도 레베카와 혼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동안은 다른 여자를 만날 생각은 없었다.
그 조항을 보는 순간 아버지가 떠올라 고쳐달라고 했을 뿐이었다.
율리안은 당황스러운 입매를 쓸어내렸다.
지금까지 냉혈한, 얼음조각, 사나운 짐승 등등의 평판은 들어봤어도 따뜻한 사람이란 말은 처음 들어봤다.
레베카를 만나고 처음 겪는 일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