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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16화 (16/232)

16.

레베카는 정성스럽게 계약서를 고치고 율리안에게 내밀었다.

율리안은 계약서를 찬찬히 살펴봤다.

그리고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리더니 곧 라이터를 들어 계약서에 불을 붙였다.

레베카는 화르륵 타오르는 불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무슨…….”

“어차피 그대나 나나 서로를 배신할 일은 없으니 이제 증거는 없애두는 게 좋아. 난 이 계약을 목숨을 걸고 지키겠다. 그대도 목숨이 아깝다면 날 배신하는 일은 없겠지.”

율리안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흩날리는 재 사이로 그의 눈동자가 황금색으로 물들였다.

그가 손깍지를 끼고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날 배신할 건가?”

익살맞다 못해 섬뜩하기까지 한 그의 표정에 레베카는 문득 악마와 계약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디 배반할 테면 해봐라, 하는 태도였다.

레베카는 문득 그런 그의 자신감이 부러워졌다.

자신이 레베카 오벨리아가 아니라 요하네스 공작으로 태어났더라면 그와 같은 표정을 지을 수 있었을까 막연하게나마 상상했다.

레베카는 잠시간의 터무니없는 상상을 끝내고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저도 목숨을 걸고 계약을 지키겠습니다.”

“좋아. 그럼 이제 계약은 끝났고. 자, 첫 번째 계획은 뭐지? 백작가를 무너뜨리는 게 말이 쉽지. 데본셔 백작은 호락호락한 자가 아니야. 그는 나와 라트라니스 공작 다음으로 제국에서 영향력이 강한 세력가야.”

“알고 있습니다.”

레베카가 망설임 없이 대답하자 율리안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얼른 다음 말을 재촉했다.

레베카는 그의 숨기지 않는 관심을 보며 슬며시 웃었다.

“데본셔 백작가를 지탱하는 주춧돌이 뭔지 아십니까.”

“뭔데?”

“사람입니다.”

“사람?”

“네. 백작가에는 총 네 개의 주춧돌이 있습니다. 하나는 저택을 관리하는 고용인들. 두 번째는 백작가의 주요 사업을 맡은 가신들. 세 번째는 백작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수행원들. 마지막은 백작가를 호위하는 기사단입니다. 그리고 이 주춧돌을 구성하는 핵심 인물들을 사냥개라고 부릅니다.”

“사냥개라…….”

“이들은 충성심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백작은 모든 사냥개의 약점을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냥개들은 오로지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적절한 보상으로 움직이죠. 따라서 절대적으로 백작의 명령에 복종합니다.”

“어떤 더러운 일이라도 한다는 말이지.”

“네. 명령에 불복종하면 죽음보다 끔찍한 일이 벌어질 테니까요.”

“그럼 그 사냥개를 처리하는 게 관건이란 말이군. 어떻게 할 생각이지? 한번 길들인 사냥개는 쉽게 주인을 배신하지 않아.”

율리안의 말에 레베카는 짧게 웃었다.

“한 가지 간과하신 게 있습니다.”

“그게 뭐지?”

“아까도 말했듯이 백작가를 지탱하는 건 사람입니다. 그들은 진짜 사냥개가 아니라 우리와 같은 인간이란 말입니다.”

레베카는 잠시 찻잔을 매만지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차이가 바로 제플린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결정적인 부분이죠. 제플린은 사람을 개로 만들었습니다. 저는 그 목줄을 풀고 약점이라는 감옥을 부숴버릴 겁니다. 그러면 그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이 인간인 걸 깨닫고 백작가를 흔들기 시작할 겁니다.”

율리안은 잠시 할 말을 잃고 레베카를 바라봤다.

아주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던 일인 듯 그녀의 눈은 한없는 확신에 차 있었다.

“좋아. 그럼 내가 뭘 도와주면 되지?”

“일단 자그마한 상단을 만들까 합니다. 데본셔가의 자금줄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시장에 뛰어드는 편이 좋으니까요. 아, 이왕이면 상단주 역할을 할 유능한 사람을 구해주시면 좋겠네요.”

“어렵지는 않네. 그런데 당신은 외출하는 것도 꽤 버거워 보이는데 상단은 어떻게 운영하려고.”

“그건 제가 따로 생각해둔 바가 있습니다.”

거침없는 레베카의 대답에 율리안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나는 가만히 앉아서 돈만 주면 된다는 건가? 나쁘지 않군. 돈이야 썩어 넘치니 좋을 만큼 가져다가 써.”

“감사합니다. 대략적인 상황은 나중에 서신으로 전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이왕 쓰시는 거 좀 더 쓰세요.”

“응?”

레베카는 싱긋 웃었다.

“저는 공작님과 더 빨리 결혼하고 싶거든요.”

* * *

까만 갈고리 모양의 잎이 발톱처럼 생겨 악마의 발톱이라 불리는 식물이 있다.

먹을 수도 없고, 잎에 살짝 닿기만 해도 발진이 생기는 식물이라 처음엔 외면당했다.

그러나 악마의 발톱을 염료로 썼을 때 여태껏 본 적 없는 오묘한 보라색이 나온다는 게 밝혀졌다.

이윽고 악마의 발톱은 각광 받기 시작했다.

악마의 보랏빛이라 명명한 이 새로운 색상에 다수의 귀족이 환호성을 질렀다.

악마의 발톱은 재배 방식도 까다로워서 그 희귀성에 부르는 게 값이 되어 버렸다.

“그러니까, 그 악마의 발톱을 구해다 달라고?”

“네. 대신 말린 잎이 아니라 반드시 생잎이 필요해요.”

“유감스럽게도 생잎을 구하는 건 불가능해. 직접 재배하지 않는 이상.”

“온실과 연구실만 마련해주시면 됩니다. 씨앗만 있다면 악마의 발톱을 키워낼 적임자를 데리고 오겠습니다.”

“흠. 그걸로 드레스나 만들려는 건 아닐 테고. 대체 용도가 뭐지?”

“악마의 발톱이 가진 새로운 용도를 알고 있거든요.”

이전 생에서 악마의 발톱은 다이아몬드보다 더한 가치를 지녔었다. 어떤 식물학자가 악마의 발톱의 또 다른 효능을 알아냈기 때문이었다.

악마의 발톱의 생잎을 먹으면 사람에 따라서 한 달 혹은 석 달까지 온몸에 흉측한 수포가 생겼다.

수포에서는 끔찍한 악취가 나고 때에 따라 고열이 지속됐다.

하지만 이 수포가 가라앉았을 때는 대부분의 고질병이 치료되었다.

악마의 발톱은 그 중독 증세로 몸속의 독소를 배출해 주는, 이른바 만병통치약이었다.

레베카는 제플린과 함께 이 잎을 먹은 적이 있었다.

피부가 젊었을 적처럼 좋아진다는 말에 제플린이 거금을 주고 들여온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이 잎을 먹고 난 몇 달 뒤 레베카는 임신했다.

레베카는 수포가 올라온 자신의 얼굴을 경악한 얼굴로 쳐다보던 제플린의 표정을 떠올렸다.

저도 끔찍한 몰골이면서도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레베카를 멀리했다.

제플린은 가끔 그 당시 레베카의 얼굴을 악몽으로 꾼다고 했다.

그때에는 레베카가 다시 아름다워질 거란 걸 알았기에 제플린은 그녀를 내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아직 악마의 발톱의 효능이 밝혀지기 한참 전이었다.

레베카가 미모를 잃게 된다면 제플린은 가치가 없어진 그녀를 내칠 것이었다.

그녀의 설명을 듣던 율리안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단지 흉측해졌다는 이유만으로 이혼을 한다고? 제플린은 그대를 끔찍이도 아끼던데 과연 그럴까?”

“사랑과 혐오는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걸 아십니까.”

결코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다.

레베카는 평생을 바쳐 사랑했던 남편이 한순간에 괴물처럼 변해버린 순간을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에게 발길질을 퍼붓던 제플린의 혐오 어린 그 눈빛도.

“제플린이 저를 사랑하는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그를 닮은 이 아름다운 외모. 저는 백작가에 팔려 오듯이 왔어요. 이 외모마저 사라지면 그가 저를 붙잡을 이유는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오히려 짐 덩어리일 뿐이죠.”

담담하게 말하는 레베카에 율리안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어색한 침묵을 무마하고자 레베카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실 필요 없습니다. 다들 인생에 가시 하나쯤은 품고 사는 거 아니겠어요?”

레베카는 율리안에게 내린 저주 또한 그녀의 비참한 인생처럼 그가 평생 품고 살아야 할 가시라 말하고 있었다.

율리안은 금방 레베카가 한 말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그는 자신의 인생과 레베카의 인생 중 어떤 게 더 비참한가 비교하고 있던 걸 그만두었다.

그리고 그 찰나의 생각에 수치스러워졌다.

율리안은 괜스레 멋쩍어져서 조용히 차를 홀짝였다.

레베카는 그런 그의 마음을 알면서도 모른 척 능청스럽게 말했다.

“악마의 발톱의 효능은 아직 아무도 모르는 사실입니다. 한번 투자해 보세요. 밑지는 장사는 아닐 겁니다. 아 그리고 출처는 묻지 마세요. 영업비밀이니까요.”

농담도 던질 줄 알고.

율리안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머릿속에선 그녀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되는 중이었다.

‘더 알고 싶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율리안은 재밌는 장난감을 발견한 것처럼 씩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 미소가 유달리 천진난만해 보여서 레베카는 잠시 넋을 잃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어떨 때는 위험한 사내 같다가도 순수한 소년의 눈빛으로 돌아오곤 했다.

율리안이 커다란 손을 내밀었다.

“그래. 이제 우린 동업자야. 잘해보자고. 레베카.”

레베카는 그의 손을 잠시 바라보았다.

내가 악수를 해본 적이 있었던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없었다.

손등에 키스를 받는 게 아닌 동등한 입장에서 악수를 하는 건 기분이 묘한 일이었다.

레베카는 벅찬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의 손을 잡았다.

“잘 부탁드립니다.”

* * *

“생각보다 늦게 왔군.”

기분 좋게 귀가한 레베카는 저택 문 앞에 서 있는 제플린을 보고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레베카의 말대로 머리를 짧게 자르고 왔다. 그의 날카로운 턱 선과 뚜렷한 이목구비가 훤히 드러났다.

고용인들이 그의 수려한 외모를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예전의 레베카였다면 그들처럼 그의 모습을 넋 놓고 봤겠지만 지금의 그녀는 아니었다.

율리안을 보고 와서 그런지 몰라도, 그는 그저 어설프게 사내 흉내를 내는 아이 같아 보였다.

오늘따라 체격도 작아 보였다.

“어때, 당신 말대로 잘라봤어.”

진짜 의견을 물은 질문이 아니었다. 대답은 항상 정해져 있었다.

레베카는 다시 얼굴빛을 고치곤 부드럽게 웃었다.

“물어 뭐하나요. 역시 잘 어울리세요.”

“당신이 없는 동안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제플린이 레베카에게 서서히 다가왔다.

그러곤 레베카의 어깨에 늘어뜨린 레베카의 머리카락을 훑어 내렸다.

레베카의 등 뒤로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알리시아를 들인 이후로 당신에게 소홀한 것 같아서. 오늘은 우리만의 시간을 가질까 생각하는데.”

제플린은 레베카의 머리카락을 들어 입을 맞췄다.

그가 보내는 신호를 레베카는 단번에 눈치챘다.

오늘 밤 둘은 같은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피할 수 없는 일인 건 알았지만 막상 닥치니 버거웠다.

저 파렴치한 인간과 살을 맞대는 지금 이 순간도 참기 힘들었다.

그런데 그와 한 침대에서 그렇고 그런 짓을 하다니.

레베카는 과거 그와의 정사를 떠올렸다. 문득 헛구역질이 올라와 안색이 창백해졌다.

지금 이 순간 제플린의 숨결이 닿고 있는 자신의 귀를 잘라내고 싶었다.

칸나가 그 모습을 굳은 얼굴로 지켜봤다.

“알겠지, 레베카? 그럼 허름한 옷은 벗고 예쁘게 하고 있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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