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제플린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제 딴에는 레베카가 자신의 엉망진창이 된 기분을 풀어줬으니 상을 준다는 의미였다.
당근과 채찍.
제플린이 레베카에게 자주 사용하던 수법이었다.
하지만 이제 제플린의 애정은 레베카에게 상이 아니었다. 차라리 고문을 하는 게 더 나았다.
‘괜찮아, 레베카. 수도 없이 해온 일이잖아.’
그렇게 다짐하면서도 온몸이 떨려오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저녁을 먹었는지도 모른 채 레베카는 얼른 이 시간이 지나가길 빌었다.
“저녁에 힘을 쓰려면 조금 더 먹는 게 좋지 않겠어? 아니다. 배가 나올 수 있겠군. 내가 실언했어.”
레베카가 깨작거리자 제플린이 유혹이 가득한 눈빛으로 말했다.
때문에 레베카는 식사 시간 내내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주먹을 꽉 쥐고 있어야만 했다.
* * *
저녁 식사가 끝나자 하녀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하녀들이 향유를 푼 목욕물에 레베카를 꼼꼼하게 씻겼다.
따뜻한 목욕물이 어쩐지 얼음장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어떠세요? 완벽하지 않습니까?”
레베카의 치장을 끝낸 그레이스가 그녀에게 커다란 전신 거울을 보여 주었다.
순백의 실크 드레스가 레베카의 완벽한 몸매를 여실히 드러나게 했다.
그녀의 머리에 뿌린 진주 가루가 화려한 조명 아래 은은히 빛났다.
자신을 훑어보던 레베카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하. 더럽게 예쁘구나.”
“예?”
“아니다.”
어차피 벗어야 할 텐데 제플린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어디서든 완벽하게. 침실 안에서도 예외는 없었다.
갈비뼈를 압박하는 코르셋이 마치 제플린의 손아귀 같았다.
레베카는 숨을 조금씩 몰아쉬며 내키지 않은 발걸음을 억지로 내디뎠다.
* * *
레베카는 지옥에 끌려가는 기분으로 느릿느릿 삼층으로 가는 계단을 향했다.
“백작님의 방으로 가시는 건가요?”
그때 알리시아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알리시아는 잔뜩 꾸민 레베카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내렸다.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순간 알리시아의 질투심으로 불타는 눈동자를 본 레베카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일말의 희망이 그녀를 찾아왔다.
레베카가 알리시아를 향해 진심으로 환히 웃었다.
“그런가요? 그렇게 봐줘서 고마워요.”
레베카의 우아한 미소에 알리시아는 멈칫했다.
승전 연회 날 이후로 알리시아는 방에 박혀 제 처지가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레베카가 자신을 가지고 놀았다는 걸 깨달았다.
가보를 일부러 보여 준 것까지 모두 계획적인 일이었다.
‘보석에 눈이 멀어 방심했어.’
알리시아는 이렇게 된 이상 레베카에게 제 속내를 감추는 걸 그만두고 정면으로 승부를 겨루기로 결심했다.
지금의 레베카는 자신을 아끼던 예전의 레베카가 아니었다.
알리시아가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하지만 그것도 한때인 건 아시죠? 저는 레베카 님보다 훨씬 어리다는 걸 잊으셨나요? 세월 앞에 장사 없다지요. 백작님의 관심이 제게 곧 향하실 거예요.”
지금인가?
레베카는 아래층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하녀와 하인들을 흘깃 내려다봤다.
지금이라면 꽤 괜찮을지도 몰랐다.
레베카는 일부러 계단 한 칸을 더 올라갔다.
그리고 입 한쪽을 비뚜름하게 올리곤 가소롭다는 듯 알리시아를 내려다봤다.
“그래. 그 관심, 너나 마음껏 가지렴. 하지만 그래도 넌 절대 첫째 부인은 될 수 없을걸. 만약 내가 오늘 아이를 가진다면 네 아이도 너처럼 영원히 두 번째가 될 거야.”
레베카의 도발에 알리시아는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어디 그 교만한 미소가 얼마나 오래가나 보자.
알리시아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몇 발자국 뒤로 발을 옮겼다.
“그 말! 후회하실 거예요!”
알리시아는 레베카의 손을 잡고 제 가슴께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크게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꺄아악! 레, 레베카 님, 제게 어떻게!”
알리시아의 뒤로는 로비까지 이어지는 긴 계단이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위를 향했다. 알리시아는 계단에서 발을 떼었다.
참으로 훌륭한 연기였다.
뒤로 떨어지는 알리시아를 본 레베카의 얼굴 위로 환희가 떠올랐다.
레베카는 곧바로 몸을 날려 알리시아의 손을 잡고 그녀를 자신의 품 안으로 감싸 안았다.
통증이 느껴질 거라 생각해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알리시아는 푹신한 레베카의 가슴팍에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경악에 찬 얼굴로 레베카를 바라보았다.
레베카는 계단 모서리에 머리를 찧고는 밀려드는 고통에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레베카의 입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녀는 알리시아의 머리를 소중한 보물인 것마냥 보호했다.
알리시아가 계획한 건 결코 이런 게 아니었다.
백작가의 두 여인은 서로 부둥켜안은 채 한참을 굴러떨어졌다.
육중한 소리와 함께 고용인들이 달려왔다.
알리시아는 레베카의 품에서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상태였다.
“아악!”
커다란 고통이 밀려왔다. 레베카가 소리를 질렀다. 알리시아를 안았던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레베카의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로 그녀의 새하얀 드레스가 붉게 물들었다.
“무슨 일이야!”
제 방에서 레베카를 기다리고 있던 제플린이 뛰쳐나왔다. 그리고 계단에서 고통을 호소하는 레베카를 발견했다.
제플린의 눈이 커다랗게 변하더니 곧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의 눈에는 엎어져 있는 알리시아 따위는 들어오지 않았다.
“레베카!”
제플린이 다급하게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레베카는 아무 말도 못하고 입만 뻐금거리고 있는 알리시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네 배 속에 있는 작은 비밀을 잘 지켜야지. 네 유일한 재산이잖니.”
그 말에 알리시아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레베카를 바라보았다.
레베카는 불안에 떠는 알리시아를 향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때마침 황급히 달려온 제플린이 피범벅이 된 레베카의 얼굴을 보고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러댔다.
제플린은 애꿎은 고용인들을 살기 어린 눈으로 쳐다봤다.
“레베카의 얼굴에 흉터 하나라도 생기면 다 죽은 목숨인 줄 알아!”
레베카가 가녀린 목소리로 말했다.
“제플린, 알리시아는 아무 잘못도 없어요. 그러니 용서를…….”
레베카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기절한 척은 쉬웠다.
제플린은 세차게 레베카를 흔들어 깨웠다.
“레베카! 레베카! 안 돼! 절대…… 절대 안 돼!”
제플린은 거의 절규에 가까운 비명을 질렀다. 레베카가 없는 세상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레베카는 그에게 꿈이자 희망이자 모든 것이었다. 젊은 날을 다 바쳐 만든 회심의 작품이었다.
칸나가 절박한 얼굴로 그런 제플린을 말렸다.
“아직 돌아가신 게 아닙니다. 얼른 방으로 모시고 의사를 불러 주십시오.”
“뭐, 뭐…….”
“얼른요!”
칸나가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눈자위가 붉게 변해 있었다. 칸나가 다급하게 레베카를 안아 들었다.
제플린은 칸나의 외침에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 그래. 당장 의사를 불러와.”
제플린은 멍하니 레베카의 방으로 달려가는 칸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얼굴을 쓸어내렸다. 축축한 눈물이 손에 배어 나왔다.
제플린은 다시 한번 더 레베카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확인했다.
그녀가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도.
“배, 백작님…….”
알리시아는 본능적으로 배를 부여잡고 그를 불렀다.
제플린은 분노로 불타오르는 눈으로 알리시아를 쏘아봤다.
“알리시아. 주제도 모르고 감히 이런 짓을 벌였단 말이지?”
알리시아는 지금껏 이 정도로 분개한 제플린을 본 적이 없었다.
맹수 앞의 토끼처럼 알리시아의 어깨가 파르르 떨려왔다.
“그, 그게 아니라 이, 이건 사고…….”
용기를 내어 변명하려 노력해봤지만 증오로 범벅된 제플린의 살기 앞에서 알리시아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제플린은 손에 묻은 레베카의 피를 차갑게 바라보다가 하녀들에게 손짓했다.
“데려가.”
하녀들이 알리시아의 양팔을 붙들었다.
제플린은 손수건으로 피를 닦아내었다.
“빛의 전당으로.”
순간 그곳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냥개들이 흠칫 놀라 제플린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감히 반기를 들지는 못하고 고개를 다시 숙였다.
사냥개는 사냥개의 일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 * *
다나에 오벨리아는 빠듯한 예산안을 들고 이마를 짚었다.
이렇게 가다가는 딸들의 드레스는커녕 특별한 날에만 먹는 디저트도 사지 못할 형편이었다.
그나마 최근 들어선 남편 테오의 투자 병이 잠잠한 것 같아 다행이었다.
‘내가 나가서 돈이라도 벌어오고 싶은 심정이야.’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로탄더스 제국에서 여자가 돈을 버는 건 평민이나 하는 짓이었다.
자신이야 무슨 취급을 받아도 상관없지만 그랬다가는 쌍둥이 딸 리비아와 헤레나까지 손가락질 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큰딸 레베카는 무려 백작 부인이었다. 어머니가 일을 한다는 소문이 들리면 그건 또 무슨 망신인가.
“하아.”
가슴이 답답했다.
정원에서 노는 딸들과 테오의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테오는 자상한 아빠이자 남편이었다.
애초에 그런 점에 반해서 결혼했었다.
하지만 좋은 아빠와 좋은 가장은 달랐다.
테오는 좋은 가장이 아니었다.
너무도 착하고 귀가 얇은 탓에 여기저기 따져보지도 않고 냉큼 투자를 해버리는 고질병이 있었다.
결국 유복했던 집안은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
겨우겨우 입에 풀칠만 하고 살 뿐이었다.
다나에는 어쩐지 이 모든 게 우연 같지 않았다.
‘레베카와 결혼하겠습니다.’
다나에는 제플린을 떠올렸다. 그는 맡긴 물건을 찾는 것마냥 레베카와 결혼하겠다고 찾아왔다.
그녀는 처음부터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엔 제플린의 청혼을 거절했다.
애초에 데본셔 백작가와 오벨리아 자작가는 급이 맞지 않았다. 그런 결혼은 필시 불행한 법이다.
다나에는 제플린을 레베카의 아름다운 얼굴만 보고 달려드는 수많은 구혼자 중 하나라 생각했다.
금방 사그라들 관심이라 여겼다.
하지만 의외로 제플린은 끈질겼다.
그는 매일같이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그즈음 다나에는 테오의 투자 실패 사실을 알았다.
거의 집안의 전 재산을 들이부은 투자였기에 오벨리아 가문은 파산 직전이었다.
그때 제플린이 마치 이 상황을 미리 알았던 마냥 막대한 돈을 들고 찾아왔다.
그는 지참금도 받지 않겠다고 했다.
그녀의 입장에선 거절할 수 없는 혼사였다. 심지어 레베카도 제플린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러니 괜찮다고. 딸을 팔아넘기면서도 그저 기우일 뿐이라고 다나에는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미쳤었지. 다나에, 너는 엄마 자격도 없어.’
레베카가 백작 부인이 된 뒤 다나에는 매일 후회 속에 살았다.
다나에의 직감대로 레베카는 하루하루 말라갔다.
외양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아니, 날이 갈수록 더더욱 아름다워졌다.
하지만 친정도 마음대로 오고 갈 수 없는 감옥에 갇혔는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마님! 급한 서신이……!”
하나밖에 없는 하녀가 문을 두드렸다. 저 하녀도 곧 내보내야 할지 몰랐다.
다나에는 한숨을 길게 내쉬고 하녀가 내민 서신을 받았다.
서신의 봉투에는 데본셔 백작가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