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꼭 그렇게까지 하셔야 했습니까.”
칸나가 레베카의 붕대를 새로 감아주며 말했다.
어제 계단에서 구른 일로 그녀의 팔과 발목의 인대가 크게 다쳤다고 주치의들이 말했다.
적어도 두 달 이상은 무리한 운동을 해서는 안 됐다.
무리한 운동 안에는 부부관계도 포함됐다.
레베카의 몸을 끔찍이 살피는 제플린이었으니 그녀의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잠자리를 강제하진 않을 터였다.
“얻은 거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주 값싸지.”
레베카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전 생에서 알리시아는 어제와 똑같이 계단에서 굴렀다.
그리고 질투에 눈이 먼 레베카가 자신을 밀었다고 모함했다.
교묘하게 술수를 꾸민 탓에 목격자가 많았다.
그날로 레베카에게 두 배 이상의 수행원이 붙었다.
그리고 그 벌로 리베르타 구휼원에 방문하는 게 금지되었다.
‘똑같은 행동을 할 줄이야.’
역시나 사람은 변하지 않는 법이었다.
하지만 상황을 바꿀 수는 있었다.
“그래서, 알리시아 쪽은 어떻게 됐어?”
“사냥개가 잔뜩 붙었습니다. 백작이 무척 화가 났더군요. 덕분에 지금 레베카 님 쪽 사냥개는 로버트 한 명만 남았습니다.”
“아주 잘 됐어. 그나저나 내가 부탁한 손님은?”
“예. 전갈을 넣었더니 오늘 당장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제플린은 별말 없었고?”
“오히려 잘 됐다고 당분간 자주 불러오시라 말하더군요. 이 일로 레베카 님이 정신적 충격을 받았으면 어쩌냐고 하면서요.”
“답지 않게 내 정신 걱정은.”
그의 진의가 어찌 됐든 잘된 일이었다.
레베카는 손님 맞을 준비를 시작했다.
* * *
“레베카! 대체 무슨 일이야! 안 돼. 일어나지 마라.”
“어머니, 오랜만이에요.”
레베카가 반갑게 웃으며 다나에를 맞았다.
다나에는 팔과 다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 누워 있는 큰딸을 보고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듣자하니 그 알리시아란 여자가 널 밀었다며? 내가 그러니까 조심하라고 그렇게 말했잖니!”
“아니에요. 사고였어요. 그 아이가 넘어지는 걸 제가 구하려다가…….”
“애가 이렇게 착해 빠져서 어떻게 여기서 살아남으려고!”
“왜요. 여기가 어떤 곳인데요?”
레베카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홉뜨고 다나에를 바라봤다.
사실 어머니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었단 걸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원망이 들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날 밤 서재에서 본 바로는 레베카가 제플린과 결혼하기 전부터 오벨리아가는 이미 가세가 기울고 있었다.
레베카를 신부를 맞이하는 조건으로 제플린이 내민 돈은 거금이었다.
‘레베카, 절대 백작의 아이는 갖지 말거라. 혹여 갖더라도 마음을 너무 주지 마. 아이가 생기는 순간 여자는 발목이 잡혀버려.’
결혼식 날, 다나에는 레베카의 머리에 티아라를 씌워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막 행복한 결혼 생활을 시작할 딸에게 할 조언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다 알고 있었다. 때문에 레베카는 집안을 위해 어머니와 아버지가 자신을 이곳에 팔아넘겼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레베카의 눈빛에서 상처를 읽은 다나에는 쿵하고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무능한 어미인 자신이 원망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녀는 레베카가 다쳤다는 말을 듣고 백작가에 오자마자 제플린에게 따지려고 했다.
하지만 제플린은 바쁘다는 핑계로 그녀를 맞으러 밖으로 나와 보지도 않았다.
집사가 난감한 웃음을 흘리며 그녀를 안내할 뿐이었다.
그는 레베카를 위로하기 위해 다나에를 고용했다는 듯 두툼한 돈 봉투를 건넸다.
“백작님께서 수고비를…… 챙겨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집사가 멋쩍어하며 내민 돈 봉투를 다나에는 차마 쳐낼 수 없었다.
자존심보다 가족들의 안위에 대한 생각이 더 컸다.
아직 데뷔탕트도 치르지 않은 어린 딸이 두 명이나 있었다.
가문의 존망은 레베카에게 달려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상처를 입은 레베카를 보니 가문 따위가 뭐가 중요하나 싶었다.
다나에의 눈시울이 벌겋게 물들였다.
그녀는 레베카의 손을 붙잡고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변명하지 않으마. 레베카, 여긴 끔찍한 곳이야. 우리 그냥 도망가 버릴까? 그러자 레베카. 어디 가서 농사라도 짓고 살면 돼. 이런 생활보단 낫지 않겠니?”
레베카는 다나에의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많은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레베카는 그 감정들을 애써 억누르며 담담하게 말했다.
“정말이세요? 정말 지금까지 누리던 걸 모두 버리고 평민처럼 사실 수 있겠어요? 어머니는 그럴지 몰라도 아버지는요? 또 제 동생들은? 어머니가 저만을 위해 그 세 사람에게 희생을 강요하실 수 있어요?”
“베키…….”
다나에는 떨리는 목소리로 레베카의 애칭을 불렀다.
베키. 어렸을 적 가족들이 그녀를 부르던 이름이었다.
그 이름을 듣자 레베카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주르륵 흘렀다.
충분히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어머니 앞에서 그녀는 언제나 철없는 소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다.
칸나가 말없이 손수건을 가져왔다.
레베카는 손수건으로 눈물 자국을 꾹꾹 닦았다.
칸나의 존재를 잊고 있었던지 다나에가 흠칫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마 오늘의 대화가 제플린의 귀에 들어갈까 봐 염려하는 눈치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칸나는 제 사람이에요.”
다나에는 레베카와 칸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칸나의 입꼬리가 씰룩거리며 올라갔다.
‘내 사람이라고 해주셨어.’
칸나는 일기장에 꼭 오늘 일을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레베카는 다시 냉정한 눈빛을 되찾고 입을 열었다.
“도망치는 건 아무런 도움이 안 돼요. 제대로 된 발판을 만든 다음에…….”
“다음에?”
“제 발로 나가야죠. 어머니, 이 지긋지긋한 데본셔의 그늘에서 같이 나가요. 저랑.”
“나가다니, 대체 무슨 수로 말이니?”
“저, 이혼할 거예요.”
“이혼……?”
다나에는 아까보다도 훨씬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금 눈앞의 레베카가 자신이 알던 그 레베카가 맞는지 혼란스러웠다.
“네, 그리고 재혼할 거예요. 요하네스 공작이랑.”
“얘, 얘야. 요새 많이 힘드니? 요하네스 공작이라고……?”
“우선 어머니만 알고 계세요. 특히 아버지는 절대 아시면 안 돼요.”
다나에는 확신에 찬 레베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레베카는 눈꼬리를 치켜올리고 입을 단단히 앙다물고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백작 부인이 되기 전, 레베카가 저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그녀는 무슨 일이든 해냈었다.
다나에는 더 추궁하지 않았다.
자기가 빠뜨린 지옥에서 딸이 어떻게든 살려고 발버둥 치고 있었다.
동아줄은 되지 못할망정 발을 잡아서는 안 될 노릇이었다.
다나에가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무슨 일을 하면 되겠니.”
레베카는 그제야 웃었다.
다나에를 닮은 그녀의 짙푸른 눈동자가 총기로 반짝였다.
“사업을 하나, 해보시겠어요?”
* * *
다나에가 떠난 뒤 레베카는 더더욱 쓸쓸해졌다.
가족들과 즐겁게 지내던 나날들이 떠올랐다.
그때의 레베카는 이런 미래가 기다릴 거란 상상도 못할 정도로 꿈에 부푼 소녀였다.
“답답하십니까?”
칸나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서늘한 밤공기가 들어왔다.
레베카는 애써 웃어 보였다.
“조금. 침대에만 있으려니 답답하네.”
“그럼 산책이라도 하시겠습니까?”
레베카는 붕대로 감은 발을 들어 보였다.
“하지만 난 못 걷잖니. 걸을 수 있다고 해도 제플린이 절대 못 나가게 할 거야.”
“방법은 항상 있습니다. 단지 찾지 않았을 뿐이죠.”
칸나는 말없이 레베카에게 다가오더니 그대로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
“카, 칸나?”
레베카의 몸무게를 가늠해 보던 칸나가 이를 우득 깨물었다.
“이렇게 가벼우시다니……. 제플린, 이 씹어 먹어도 모자를 자식이…….”
“칸나. 보는 눈이 많아.”
“걱정 마세요. 이 시간에는 사냥개들이 잘 다니지 않습니다. 지금 이 근방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왔습니다.”
칸나는 훌쩍 창문가로 올라섰다.
“악!”
발밑을 내려다본 레베카는 저도 모르게 칸나의 목을 끌어안았다.
제 목을 안는 레베카의 손길에 칸나는 잠시 움찔하더니 아래로 곧바로 뛰어내렸다.
레베카는 추락을 염려해 눈을 꾹 감았지만 아무런 반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부드럽게 바닥에 착지한 칸나는 멀뚱히 레베카를 쳐다봤다.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예전부터 칸나의 근육이 다부지다는 건 어렴풋이 느꼈지만 이렇게 힘이 셀 줄은 몰랐다.
“지금은 제가 레베카 님의 다리가 되겠습니다. 가시고 싶은 곳을 말씀해 주세요.”
“그럼 저기 라일락 정원 쪽으로…….”
라일락 정원은 전대 백작 부인이 좋아하던 정원이었다.
하지만 제플린이 그곳을 유독 싫어했기에 정원사 말고는 방문하는 이가 없어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라일락이 만개한 정원은 제 향을 마음껏 뽐내고 있었다.
레베카는 칸나에게 안긴 채 정원을 거닐었다.
칸나는 레베카가 손짓하는 대로 충실히 움직였다.
이따금 들려오는 칸나의 심장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밤이었다.
레베카는 칸나에게 안긴 채 물었다.
“칸나, 왜 아무것도 묻지 않니.”
“무엇을 말입니까.”
“내가 오늘 어머니와 나눴던 대화 말이야.”
레베카는 어제 자신이 기절한 척했을 때 보았던 칸나의 표정을 계속해서 곱씹어보았다.
그때 칸나는 마치 세상이 무너져 내린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예민한 감각으로 레베카가 의식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을 텐데도 칸나는 그러지 못했다.
레베카가 다친 이유 하나만으로도 칸나는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그리고 레베카는 그 순간 확신했다. 칸나는 온전한 제 사람이라고.
그래서 어머니와 있을 때에 칸나를 내보내지 않았다.
칸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레베카 님을 믿으니까요.”
“응?”
“어떤 선택을 하시든지, 그곳이 설령 지옥이라도 레베카 님을 따를 거라 다짐했으니까요.”
레베카는 잠시 할 말을 잃고 칸나에게 안긴 채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진한 갈색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여기서 잠시 쉴까요?”
흰 대리석으로 만든 벤치에 레베카가 앉았다.
레베카의 어깨에 숄을 걸쳐주려는 순간 칸나가 매서운 눈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누군가가 있습니다. 레베카 님.”
나무 뒤에서 검은 인영이 움직였다.
* * *
로버트 크로울리는 굳게 닫힌 레베카의 방문을 바라봤다.
팔다리가 다쳤다고 했으니 아마 칸나가 밖으로 나오기 전까진 저 방문은 열리지 않을 테다.
로버트는 주위를 살피다가 슬그머니 정원으로 빠져나왔다.
원래라면 계속해서 레베카의 동태를 살펴야 했지만 오늘은 마음이 뒤숭숭해서 도무지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사냥개 대부분의 동선을 알고 있는 그였기에 로버트는 능숙하게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신선한 공기가 필요해.’
로버트는 어젯밤 읽은 어머니의 편지 내용을 떠올렸다.
<지혜의 불씨는 아직 꺼지지 않았다.>